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535
535장. 조인수 (1)
“막내야, 치안감 승진 다시 한 번 축하한다.”
“막둥이 수고했다.”
“다 형님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산청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와룡산에서 세 명의 중년 남자가 뿌듯한 얼굴로 대화를 나눴다.
이사관 급에 해당하는 치안감 정복을 입은 막내의 어깨를 두드리는 두 남자.
숨길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다.
오랜 집안의 숙원이 이제 풀리고 있었다.
“할아버지하고 아버지 그리고 선영들에게 인사 올려라.”
“넵!”
경남지방경찰청장으로 부임한 막내 염동천이 술잔을 잡았다.
용이 웅크려 승천을 기다린다는 와룡산자락 명당에 염씨 집안 선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중요한 날이지만 집안 친척들과 아녀자들은 없었다.
염씨 집안 아들 셋만 모였다.
또로록.
술잔에 안동 소주가 채워졌다.
10여 개의 묘지 아래에 위치한 대형 대리석 상석에 북어를 비롯한 여러 가지 안주가 차려져 있었다.
그 옆으로 놓이는 술잔.
“추우우우웅서서엉!”
염동훈이 힘차게 경례를 올렸다.
정복 입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조상에 대한 예의.
“…….”
첫째 염중천과 둘째 염상천의 눈시울이 불거졌다.
그동안 가슴에 담겨 있던 아픔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다들 알겠지만 이제부터 잘 해야 한다. 호시탐탐 우리 가문을 모욕할 놈이 나타날지 모른다. 할아버지께서……. 친일파 인명사전에 등재됐다. 그 때문에 우리가 그동안 당했던 서러움을 너희들은 뼈에 새겨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첫째 염중천이 한 맺힌 음성으로 당부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이전부터 유복하게 살던 집안이었다.
양반 집안은 아니었지만 상인으로서 부를 쌓아 산청에서는 염씨 집안 땅을 안 밟고는 길을 갈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졌다.
염중천의 할아버지는 그런 부잣집의 외동아들이었다.
그 시대에 동경제국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을 정도로 수재였다.
졸업 후에 자연스럽게 관직에 나섰다.
있는 집 자손에 일본 첫째가는 대학 출신 유학생이었기에 강점기 때임에도 고위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그렇게 살던 시대였다.
산청군수를 비롯해 경상도에서 내로라하는 고위직을 전전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느덧 맞이한 해방.
해방 직후 갑자기 친일파로 찍혔다.
반민족 행위 특별조사위원회 악질 친일파 명단에 식구들 이름이 올랐다.
가문에 위기가 찾아왔다.
다행스럽게 이승만 정권이 친일 경찰을 동원해 쓸어내는 틈에 살아남았다.
그러나 6.25 전쟁으로 재차 위기가 찾아왔다.
산청의 대표적인 친일파 지주 가문이 염씨 집안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산군에 의해 가족이 몰살당할 상황에 몰렸다.
다행이 충성스런 종놈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땅문서만 빼고 대부분의 재산을 강탈당했다.
삼형제의 아버지 염일겸은 부친 뜻을 따라 한의사가 됐다.
친일파 딱지로는 정치권에 나가기가 쉽지 않다는 걸 빨리 깨달았다.
염일겸은 똑똑한데 손기술도 좋았다.
실력을 인정받아 제법 돈을 쓸어 담았다.
경상남도의 명의로 전국에 소문이 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어느 날 아버지가 밤사이 급살을 맞으면서 발생했다.
6.25 당시 빼앗긴 집안의 돈과 금 때문에 화를 품고 살았던 염일겸.
남은 자손들을 위해 이후 자신만 아는 모처에 긁어모은 재물을 숨겼다.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금괴와 여러 가지 무기명 채권 및 외화를 비롯한 현금이 그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그걸 찾지 못했다.
중요한 이권 사업을 따내기 위해 돈이 꼭 필요했던 큰 아들 염중천과 시의원에서 도의원으로 도약한 염상천, 총경에서 더 위로 승진하려던 막내 염동천까지 멘붕에 빠졌다.
당시에는 불법적인 돈이 사업과 정치, 경찰 승진에 필수적이었다.
급히 이것저것을 팔아 현금화했지만 돈이 턱없이 모자랐다.
그때 거짓말처럼 생각지 못했던 기회가 찾아왔다.
집안사람들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종놈에게 줬던 땅이 도로로 수용됐다.
순진하고 무식한 종놈답게 등기를 몰랐다.
아버지도 무슨 심산이 있었던지 등기를 넘겨주지는 않은 상태였다.
제법 큰 땅이 관통당해 수용비로 20억이 책정됐다.
넘겨줄 당시 돌밭에 불과했던 토지였지만 긴 세월 동안 옥토로 바꿔놓은 종놈 식구.
소 막사까지 버젓이 세워져 있어 보상비가 상당히 많았다.
바로 소송을 걸어 토지를 빼앗았다.
종놈 가족이 울고불고 인정에 호소했지만 그들을 봐줄 입장도 또 생각도 없었다.
냉혹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양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종놈 자식이 사법시험에 합격했다고 했나?”
염중천이 셋째에게 물었다.
승진하기 전 경찰청에 근무했던 터라 정보가 빨랐다.
“덕수 그놈이 크게 될 놈이라고 아버지께서 살아생전 말씀하시더니…….”
둘째 염상천이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사법연수원에 들어갔습니다.”
“위험하지 않겠어?”
“성적이 최하위입니다. 학벌도 없는 놈이 연수원에서 나와 봤자 별 볼일 없는 변호사밖에 할 일이 있겠습니까. 전혀 위험하지 않습니다. 요즘 길가에 차이는 게 덕수 놈 같은 허접한 변호사들입니다.”
“그때 동천이 네가 확실히 밀어버렸어야 했는데…….”
둘째가 입맛을 다셨다.
“상천아!”
“죄송합니다. 제가 입방아를 쪘습니다.”
“정치한다는 녀석이 왜 그렇게 입이 가벼워? 우리끼리 있어서 다행이지 만약 그 사실이 알려지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이냐.”
염중천이 조용하고 엄중하게 둘째를 꾸짖었다.
“둘째 형님 말이 맞습니다. 그때 확실히 제거했어야 했습니다.”
염동천 역시 과거를 떠올렸다.
대학교 신입생 때 잠깐 본가에 들렀다.
그때 염동천은 신덕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덩치 큰 녀석이 총기가 넘쳤다.
어릴 적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녀석이었다.
심심해서 영어 문장 몇 개를 알려줬는데 그걸 단박에 외웠다.
힘이 장사에 머리도 비상했다.
그때 아버지가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신덕수를 보고 있었다.
조용히 스쳐가는 말로 염씨 집안에 위험한 녀석이라는 말을 흘리셨다.
무슨 뜻인 줄 바로 알아챘다.
그날 칡이 먹고 싶다고 녀석을 꼬셔 산으로 데려갔다.
마침 벼랑에 칡뿌리가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걸 캐자고 꼬드겼다.
순박한 녀석은 칡을 캐기 위해 용을 썼다.
실수인 척 살짝 몸으로 밀었다.
벼랑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통이 깨져 버린 신덕수.
집으로 끌고 갔을 때 아버지는 별다른 말씀 없이 녀석의 머리에 침을 꽂았다.
그 이후 녀석의 총기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일은 됐다. 막내가 신경 써서 살펴봐라. 만약 수상하면……. 전화로 얘기해라.”
“형님, 찝찝한데 그냥 처리하죠? 제가 아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둘째 염상천이 개운치 않은 표정으로 몇 마디 덧붙였다.
“안 돼. 연수원생도 명색이 고위 공무원이다. 괜히 건들면 탈난다.”
염중천은 신중했다.
“큰형님 말씀이 맞습니다. 어차피 놔두면 찌그러질 녀석입니다. 건드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뭐 그렇다면야…….”
“상천이 넌 국회의원 공천은 준비되고 있는 거지?”
“물론입니다. 흐흐. 형님 덕분에 원내대표에게 공천 약속 받았습니다.”
“마지막까지 긴장 늦추지 마라. 정치하는 인간들 중에 의리 있는 놈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 도대체 뭘로 협박한 겁니까? 막내 승진도 그렇고 제 공천도 그렇게 쉽게 따낼 수 있는 게 아닌데…….”
염상천이 궁금한 듯 물었다.
정치권과 연관된 토목 사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큰형 염중천의 로비력이 대단했다.
도의원으로 끝날 것 같은 정치 인생이 국회의원까지 이어졌다.
받기만 하면 당선되는 국회의원자리였다.
어지간한 연줄이 없으면 안 되는 걸 큰형이 해냈다.
막내의 승진까지 더해서 말이다.
“그건 알 필요 없다. 너희들이 알아봐야 좋을 일 아니다.”
염중천은 동생들에게도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 로비였다.
“다들 명심해라. 우리 목표는 아직 멀었다. 가문의 이름이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질 그때까지 처신 조심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형제들끼리 뭉쳐서 돌파해야 한다. 그게 아버지와 조상님들이 원하시는 염씨 가문의 미래다!”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두 동생은 힘차게 답했다.
지금도 친일파 후손이라고 인근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염씨 가문의 세 형제.
아버지의 마지막 염원을 가슴에서 새기고 잊지 않았다.
친일파가 아닌 가문을 대한민국 최상류층으로 끌어올리려는 욕망을 뜨겁게 품었다.
***
“신수가 훤합니다~.”
“그러냐?”
“잘나가는 것 같습니다. 선배~”
“흐흐. 내가 요즘 강남 뚜쟁이 아줌마 섭외 순위 상위권이다.”
“오! 용 됐습니다.”
“내가 좀 잘났잖아~.”
“……양심을 그새 파셨군요. 신입생 때 봤던 불투명한 미래에 다 죽어가던 선배를 이 후배가…….”
“태산아, 내가 격하게 사랑하는 거 알지?”
“글쎄요. 오늘 보니까 아닌 것 같은데…….”
“오늘 이 선배가 여기 밥하고 술 쏜다. 마음껏 먹어.”
“벼룩의 간 같은 선배 월급이 얼마나 된다고……. 여기서 먹으면 몇 백 그냥 깨져요.”
“그래? 그럼 니가 쏴~.”
강남으로 선배를 불렀다.
일산에서는 보는 눈이 많았다.
도처에 감시자가 따라 붙었다는 것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내 소유인 팰튼 호텔의 총 지배인에게 연락해 VIP 폐쇄적 다이닝 룸을 빌렸다.
쏘라는 말을 던지면서도 전혀 기가 죽거나 비굴하지 않은 유학필 선배.
자존감이 대폭 상승했다는 게 느껴졌다.
잘나가는 2년 차 연수원생답게 여유가 넘쳐흘렀다.
처음 볼 때와 사람이 달라졌다.
“2년 차들은 간이 테스트도 많다던데 술 마셔도 돼요?”
“흐흐흐. 난 돼.”
“왜요?”
“……너니까 알려준다. 선택받은 자들은 특별 과외를 받는다.”
학필 선배는 조용히 속삭였다.
“과외요?”
“라인 쪽에서 성적 관리를 다 해준다. 일명 족보. 그것도 교수에게서 바로 획득한 따끈따끈한 녀석으로다가~.”
“……진짜 더럽네요.”
할 말이 없었다.
오승택 라인에 내가 선배를 침투시켰지만 이렇게까지 타락한 곳인지는 미처 몰랐다.
이러니 공정한 경쟁이 될 리가 없었다.
입학 성적과 더불어 연수원 성적이 관리 된다면 수도권 판사 임용은 거저먹기다.
“나도 그렇게 더러울 줄 몰랐다. 뿐만인 줄 알아? 품위 유지비용이 한 달에 500씩 따로 나온다.”
“오! 완전 개꿀입니다.”
“목줄이다. 위에서 장학금으로 받아 분배하는 것 같아.”
“한 곳이 아닙니까?”
“자세히는 모르지만 여러 그룹에서 돈을 받아 비공식 장학금으로 관리하는 것 같아.”
“…….”
짐작만 했던 비밀의 장막 뒤에는 생각보다 더 비리가 심했다.
“대법원장 라인 말고도 다른 조직도 있겠군요?”
“당연하지. 각종 연구회에서 접촉 없었어?”
“있었습니다.”
“어디?”
“일단 대법관 쪽과 한국 민법 판례 연구회요.”
“역시 장태산! 핵심 쪽은 다 연락해 왔네. 그것 말고도 대충 열 곳이 넘는다.”
“연구회가 그렇게 많습니까?”
“연수원 연구회는 미래의 돈과 명예, 밥줄이다. 좋은 연줄 못 잡으면 끝난다.”
“일반인들이 모르는 내용이군요.”
“다들 관심 없지. 사실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군대도 있고 기업에도 사내 정치 라인이 존재하잖아. 다른 쪽을 물어뜯어야 살아남는 처절한 사파리가 대한민국 곳곳에 존재한다.”
“선배도 그러려고요?”
“난 아니지.”
“믿어도 됩니까?”
“당연하지. 배신하지 않아. 난 널 믿는다.”
“뭘요?”
“너 돈 많잖아. 나 여기서 떨궈줘도 받아줄 거 같고……. 위험하면 구해도 줄 거잖아.”
“너무 믿는 거 아닙니까?”
“응. 난 우리 부모님보다 널 더 믿어.”
할 말이 없었다.
부모보다 더 믿는다는 유학필 선배 말이 진심이라는 건 알았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말했듯이 연수원에서는 절대 아는 체하지 마십시오. 연락도 안전 메일로만 보내십시오.”
“오케이!”
학필 선배 임무가 중요했다.
적을 알아야 확실히 부셔버릴 수 있었다.
지금은 와신상담의 계절.
적의 심장에 내 사람을 착실히 심는 것만으로도 바빴다.
“드십시오.”
밥처럼 먹을 수 있는 주방장 특선 요리와 와인이 준비 됐다.
또로로록.
와인을 잔에 채워줬다.
“그런데 너와 같이 다니는 그 산적은 뭐냐? 보디가드는 아닐 테고…….”
“동생입니다. 먼 친척 동생~.”
“전혀 안 닮았던데. 그리고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던데 동생?”
“족보가 꼬였습니다.”
“요즘도 족보나 촌수 따지는 집안이 있어?”
“우리 집안이 좀 뼈대 있어서 말입니다.”
뼈대가 특대짜리인 지리산 호랑이 가문 출신이다.
신덕수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형님, 형님 하며 연수원에서 친동생처럼 따랐다.
눈에 안 띄면 그게 이상했다.
도련님과 산적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도 내 귀로도 들었다.
“그건 그렇고 연구회는 정했어? 빨리 정해라. 그게 연수원 생활하는 데 편해.”
“반드시 소속되어야 합니까?”
“응.”
“그럼 하나 만들어야겠군요.”
“연구회를?”
“안 됩니까?”
“그건 아니지만……. 선배들이 주는 자료들과 취직 연줄을 위해서라면…….”
“나중에 졸업하면 로펌 만들어서 다 취직시켜 줄 생각입니다.”
“헐…….”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말에 유학필 선배는 질린 표정을 지었다.
“초봉은 품위 유지할 수 있게 1억씩 주고 자가용에 해외 휴가 빵빵하게 보장하고……. 그리고…….”
“태산아! 나 진짜 너 사랑한다! 이 선배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니 거였어!”
갑자기 BL스런 분위기로 흘러갔다.
날 향한 시선에 꿀 뚝뚝 떨어지는 저 눈빛.
닭살이 확 돋았다.
– 사랑은 내 마음 사로잡는데~♫.
마침 스마트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 날세.
“네?”
약간은 구수한 나이가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쉽게 알 수 없는 내 번호로 전화를 해 ‘날세’라고 말할 만한 간 큰 존재는 대한민국에 몇 명 되지 않았다.
“누구신데 야밤에 저에게…….”
목소리가 까칠하게 바뀌려는 순간.
– 원장 조인수네.
“네??? 워, 원장…… 님요!!!”
회귀의 전설 2부
조인수 (2)
“벌써 봄이 왔어……. 봄이.”
사법연수원에서 가장 멋진 풍경을 마주할 수 있는 명당 연수원장실.
따사로운 봄 햇살을 즐기며 조인수 연수원장은 나른한 오후를 느끼고 있었다.
수십 년간 정들었던 판사 생활을 정리하고 찾아온 사법연수원.
법원 고위직이면서 동시에 한직이었다.
법원장을 지냈지만 대법관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렇게 더 이상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남은 법관들이 스쳐 지나가는 명예 관문이 사법연수원장이었다.
임기도 1년밖에 안 됐다.
뒤로 퇴직할 후배들이 줄줄이 기다렸다.
퇴임 후 대부분 약속이나 한 듯 로펌에 취업하지만 막상 아쉬움이 많았다.
대법관이라는 현역 법관으로 영예롭게 마무리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었다.
조인수도 그랬다.
사법시험에 합격할 당시 대한민국은 격동의 시대를 건너고 있었다.
한국대 법학과 재학시절 피 끓는 울분을 참지 못한 동기들이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한국대 법학과라는 타이틀 때문에 구속되면 간첩 누명을 쓰고 대부분 언론에 노출됐다.
심장이 뜨거웠던 조인수도 수없이 갈등에 갈등을 반복했다.
하지만 조인수는 부모님의 만류로 분을 삭이며 학업에 집중했다.
평생 흙을 만지며 농사 지어 힘겹게 조인수를 공부시켜온 부모님의 부탁이었다.
줄줄이 동생들도 딸려 있었다.
조인수의 심장은 누구보다 뜨거웠지만 못지않게 이성은 냉철했다.
다른 방식을 추구했다.
기껏 돌 몇 개 던지고 대자보 붙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다른 형태의 실재적인 방법이 필요했다.
독재 정권은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협박하는가 하면 살인까지 저질렀다.
고도성장 뒤에 감춰진 인권 탄압과 당연시 되는 뇌물, 특정 계층에 대한 특혜는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였다.
눈 딱 감고 공부에 매진한 결과 우수한 성적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조인수.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품은 뜻대로 판사로 임용이 됐다.
하지만 그때 인생에 오점이 될 정도의 위기에 봉착했다.
광주 법원에 발령이 났는데 시기가 좋지 않았다.
부임하자마자 시작된 광주 민주화 항쟁 재판.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새파란 고등학교 여학생과 촌부에게 징역을 선고했다.
판사로서의 자의적 양심에 위배되는, 전혀 다른 판결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광주 법원 지원장이 조인수를 불러 직접 말했다.
피식 웃으며 ‘징역형을 때리지 못하면 너도 빨갱이 반동분자다’라고 말이다.
치욕에 몇날 며칠을 잠도 이루지 못했다.
양심을 지키고자 한다면 영웅이 될 수 있었지만 꿈꾸던 미래는 장담할 수 없을 게 뻔했다.
사법부를 비롯해 여러 조직 곳곳에서 조인수를 지켜봤다.
해당 지역 출신 판사의 판결인 만큼 남다른 의미를 두었다.
그때부터는 철저하게 연극판에 올라간 배우가 되어야만 했다.
집안의 기대와 직면한 시국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조인수는 법복을 입고 정권의 입맛에 맞게 망치를 두들겼다.
“영욕(榮辱)의 세월이었다……. 이게 뭐라고…….”
양심을 버린 대가는 생각보다 달콤했지만 그에 반해 또 가혹했다.
판결에 만족한 상부에서는 조인수를 동기들보다 빠르게 승진시켰다.
누구보다 빨리 부장판사가 되었고 법원장이 됐다.
하지만 5월만 되면 떠오르는 그때의 악몽.
그나마 남아 있는 양심이 꿈틀거릴 때면 홀로 술잔을 기울여야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사형 판결을 내려 이슬로 사라져 간 얼굴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등 돌리고 외면하며 지켜온 지난 30년의 판사직.
이제 모든 걸 내려놓을 때가 다가왔다.
그럼에도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남았다.
독재정권이 물러난 이후에도 판사로서 양심껏 판결할 수 없었다.
곳곳에 숨은 독재 잔재는 그대로 남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아니 민주주의 탈을 쓰고 교묘하게 모습을 바꿔가며 공생했다.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 얼굴빛만 바꿔 변신한 것처럼 사법부도 그랬다.
선배들과 정치인들의 청탁을 적당히 들어줘야 승진할 수 있었다.
독버섯 같은 법원 안의 잔재들은 정권과 결탁해 판사들의 독립성을 해쳤다.
결단코 그걸 막고 싶었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전무했다.
동료들을 모았다.
그러나 부셔야 하는 벽은 높았고 힘은 강대했다.
양심에 무릎 꿇은 동료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조인수는 남았다.
아니 버텼다고 하는 게 맞았다.
어느 시점부터 후배들이 조인수를 앞질러 임명되기 시작됐다.
명예롭게 떠나라는 권유도 몇 번이나 받았다.
그래도 눈을 질끈 감고 귀를 닫았다.
아직 쓸 만한 후배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처지였다.
갈수록 세력을 더해가는 사법 적폐들의 그림자는 커져만 갔다.
그리고 그 핵심 중심에 그놈이 있었다.
“오승택…….”
나이도 학번도 사법연수원 기수에서도 선배인 오승택.
서울지방법원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당시 오승택은 민사수석부장판사였다.
조인수가 맡고 있던 대기업 민사사건에 압력을 행사했다.
대기업 승소 판결을 내리라는 판결문까지 작성해서 내밀었다.
조인수는 거부했다.
그때 오승택이 비웃음을 흘리며 말했었다.
버러지 같은 출신이 겁도 없다고.
정기 인사 시즌이 아니었지만 그 일이 있은 뒤 지방으로 발령이 났다.
명백한 대기업의 갑질 횡포 사건은 오승택 라인 판사가 맡았고 그의 뜻대로 됐다.
그 이후 더 면밀하게 알게 된 오승택의 그림자.
대법관이 될 만큼 그 뒷배가 대단했다.
평생 엘리트로 살아왔던 오승택을 제거하기에는 조인수의 힘이 한참 모자랐다.
무색하게 세월은 흘렀고 오늘에 이르렀다.
사법연수원장이 될 때 그를 스쳐 지나가듯 만났다.
들릴 듯 말 듯 잡초처럼 질긴 놈이라고 웃으며 한마디 했던 오승택.
그 때만 생각하면 조인수는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힘없는 자의 서러움을 조인수는 법원에서 뼈저리게 맛봤다.
“그 녀석이라면…….”
친구의 추천을 받았다.
대학 시절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한민국을 위해 빛과 소금이 되자고 약속했던 친구가 한국대 법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친구는 녀석이 세상을 바꿀 괴물 같은 놈이라고 소개했다.
친구의 입에서 나온 그런 평가는 처음이었다.
급한 대로 정보들을 수합해 알아봤다.
실로 놀라운 녀석이 아닐 수 없었다.
조인수는 뜻하지 않게 퇴직 전에 희망이 생겼다.
썩을 대로 썩은 그룹 몇 개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날려버렸다는 소문도 들었다.
대단한 재력과 사업수단을 겸비했다.
대학 입학 면접 당시에도 교수들과 한 판 승부를 봤을 만큼 깡이 넘쳤다.
조인수는 흥분했다.
사법부를 한 번 뒤집어볼 수도 있을 것 같은 핵폭탄 원재료를 손에 쥔 듯했다.
“만나보면 알겠지…….”
수십 년을 법관으로 살아온 만큼 사람만 보면 어느 정도 성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대에 몸이 달았다.
똑똑.
마침 들려온 노크 소리.
“장태산입니다.”
“들어오게.”
조인수는 후계자 면접을 보는 자리에 먼저 앉았다.
***
또로로록.
향기가 고소하게 퍼지는 그윽한 녹차가 도톰한 찻잔에 채워졌다.
전형적인 공무원 수장이 거주하는 공간.
오래된 갈색 가죽 의자와 탁자 유리 밑에 깔려 있는 녹색 부직포.
책장도 깔맞춤 색이었고 그 안에 꽂혀 있는 고리타분한 법 관력 서적, 화분 몇 개, 구식 컴퓨터 모니터가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바깥의 변화와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감 떨어지는 공간, 한마디로 별거 없었다.
“…….”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서로 웃으며 가벼운 사담을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마시게. 선물 받은 우전 죽로차네. 향이 좋아.”
마른 체격에 이마가 훤칠한 조인수 원장은 말투가 빠르지 않았다.
매부리코는 인생 뚝심을 증명했다.
맑은 눈동자는 어린 아이처럼 반짝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뜨거운 열정이 아직 식지 않은 눈빛이다.
후룩.
뜨거운 차를 가볍게 불어 마셨다.
맑은 바람 같은 고소한 풍미가 입안을 적셨다.
대나무 밭에서 대나무 이슬을 마시며 자란다는 대한민국 최고급 차.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하던 명품 차를 마셔본 게 이번이 두 번째였다.
랏데 성경호 회장과 단판 지을 때도 마셔본 차였다.
“역시 좋군요.”
“역시? 이 차를 마셔봤나?”
진심으로 놀라는 표정을 짓는 조인수 원장.
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전혀 짐작을 못하고 있는 눈치였다.
“성경호 회장님께서 내주셨던 차입니다.”
“랏데 성 회장님?”
“네.”
“……나도 동석해 본 적이 없는데 젊은 친구가 소문대로 능력이 좋아.”
조인수 원장은 다시 한 번 나를 살폈다.
마치 면접 자리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마시는 차가 더 좋습니다. 재벌가에서 먹고 마시는 음식들은 대부분 욕심이 잔뜩 들어있어 체하기 딱 좋습니다.”
“뭐라고? 푸하하하하하.”
조인수 원장이 느닷없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조인수 원장한테서 어제 전화가 왔다.
오늘 오후 일정을 끝내고 잠깐 봤으면 한다는 간단한 연락이었다.
갑작스런 통보에 당황했었다.
만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함께 식사하던 유학필 선배는 역시 장태산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연수원생들 중에서도 조인수 원장과 독대한 이는 손에 꼽는다고 했다.
보수의 아이콘인 법원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 맞았다.
“원장님. 그런데 어인 부르심인지…….”
나이 지긋한 분들은 뭘 해도 뜸을 잘 들인다.
과거 대화 스타일이 이랬다.
날씨 경제 이야기를 나누다가 훅 본론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 발동 했다.
사법연수원장은 대법원장 밑에 몇 안 되는 중요 고위직이지만 다른 면에서 말년 병장 같은 신세였다.
대법관이 되지 못하는 고위 법관에게 주는 마지막 서비스 보직이었다.
“태열이가 많이 놀랄 거라더니 정말이군. 자네는 내가 두렵지 않나?”
조인수 원장 입에서 학과장님인 주태열 헌법 교수님 이름이 흘러나왔다.
연배가 비슷한 것을 보니 한국대 출신 동기인 것 같았다.
“원장님요? 전혀요.”
“나 이래봬도 연수원장인데?”
“독재 정권 시절도 아니고 제가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원장님은 곧 퇴직하시지 않습니까.”
팩트 폭력은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상대의 진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전초전이 꼭 필요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도 호랑이야~.”
“…….”
대꾸는 안 했다.
여기서 더 나가면 저 이빨 빠진 호랑이 할배 자존심 상할 거다.
오정 회장님도 내 앞에서는 몇 수 접어주셨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서 나를 무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야 했다.
신들도 포인트로 후려치는 마당에 힘 빠진 사법연수원장님이야…….
“자네가 궁금해서 불렀네. 그리고 부탁할 것도 있고.”
“???”
연수원장님 본인 말대로 법원 연수원에서 그는 호랑이급 인사였다.
그러니 일개 신입 연수원생인 나를 불러 부탁할 일 같은 건 없었다.
“뭔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녹차가 채워진 잔이 다 비워졌다.
또로로록.
다시 잔을 채워주는 조인수 원장.
그리고…….
“나를 도와주게.”
도와줘? 뭘?
“제가 도울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밑도 끗도 없이 의문이 들었다.
아니 이해가 안 갔다.
“우리 학회에 들어와 주었으면 하네.”
“학회요?”
다시 또 입질이 들어온 명목상 연구회의 탈을 쓴 학회.
조인수 원장의 눈동자는 좀 전보다 더 반짝였다.
“한국인권법연구회라고 하네. 자네를 내 직접 추천하지.”
많이 들어봤던 연구회 명칭.
미래에 자자하게 회자되던 연구회 이름이다.
줄이 없는 평판사들이 속해 있다는 그곳.
대법원장까지 배출하는 사법부의 또 다른 대형 연구회였다.
전국 판사 회의를 주도할 정도로 소속된 회원 숫자가 엄청났다.
특히 그들은 오승택 라인과 확연히 다른 방향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연수원장이 추천한다면 미래는 확실히 보장될 게 확실했다.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조인수 원장 할배.
씨이익.
나의 입가에 슬쩍 번지는 미소.
그리고…….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