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3
72장. 그녀
“누구…….”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오빠라는 말에 당황스러웠다.
여동생 친구들 몇몇이 번호를 따서 전화할 때가 있다.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흐윽. 그새 날 잊은 거야? 예린 언니와 진짜 사귀기라도 하는 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녀다.
“서련이?”
“우아아아앙! 오빠, 나빴어! 난 오빠를 보고 싶어도 바늘로 꼭꼭 허벅지 찌르며 기다렸는데 내 목소리를 잊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서련이 울먹였다.
서련이가 거의 1년 만에 전화를 걸어왔다.
목소리가 좀 더 성숙하게 변했다.
마지막에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까맣게 잊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련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과거 당당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 데뷔는 하지 않은 연습생 신분이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데뷔 날짜가…….
“다음 주에 데뷔하겠네?”
“어? 오빠 나 데뷔하는 거 알아?”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날 FOB가 전격적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겨울에 어울리는 동화 속 겨울왕국 공주님들처럼 파격적인 안무와 함께 말이다.
노래 제목은 아이스 판타지아.
2007년 연말을 시작해 2017년까지 그녀들은 가요판에서 아이돌로 생존한다.
그렇게 크게 튀지도 않았지만 오래 버텼다.
그 중심에 서게 되는 서련.
그룹이 해체된 뒤에 솔로 가수가 되었고, 곧 연기자가 되어 제2의 전성기를 누린다.
걸그룹 센터로서의 미모뿐만 아니라 성격도 당찼고 센스도 남달랐다.
그런 서련이 나를 잊지 않고 연락해 왔다.
“인터넷에 추측성 기사 났어. FOB 엔터테인먼트에서 퍼펙트한 걸그룹을 준비 중이라고 말이야.”
“어머~ 소문이 거기까지 났어? 헤헤.”
아무리 그래도 소녀다.
양념 뿌리자 바로 풀렸다.
그게 바로 내가 알던 서련의 매력이다.
“나 먼저 간다. 장 대표.”
조 변호사님이 조용히 속삭이며 자리에서 사라졌다.
꾸벅 인사를 전하고 보내드렸다.
“누구랑 같이 있었어?”
“어 변호사님.”
“변호사? 왜? 또 깡패들 팼어?”
서련은 나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다.
“이제 손 씻었다. 오빠가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오빠가? 대학교는? 한국대 합격 안 했어?”
서련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내일 면접일이야.”
“와아아! 역시 우리 오빠야! 꼭 합격할 거야~. 날 믿어. 내가 밤마다 우리 서방님 잘 되라고 정화수 떠다 놓고 기도하고 있으니까.”
말이라도 고마운 서련이다.
내가 좋아했던 첫사랑 예린 선배와 달리 서련은 날 먼저 찜했다.
그래서 정성이 남다른 것 같다.
정화수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로 보아 요즘 애들이 아니다.
“푸히히히. 정화수래……, 키.”
“서련이 완전 웃겨~.”
그때 핸드폰 너머로 발랄한 소녀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련 주변에 몰려 있는 동료들인 것 같았다.
“조용히 해! 매니저님 알면 니들 다 죽고 나만 살아남을 거다!”
소음이 순식간에 차단됐다.
서련이 소녀들을 포스 넘치게 아웃 시켰다.
“핸드폰 아직 안 풀렸지?”
“응~ 데뷔할 때까지 어림도 없어. 지금도 겨우 코디 언니 거 빌려서 하는 중이야. 오래 못하니까……, 나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내가 확 떠서 오빠 사시 뒷바라지할게.”
서련은 참 싸가지 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직진 고백은 언제 들어도 좋다.
말 몇 마디로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다.
“그리고 군대 가면 내가 위문공연도 갈 테니까 그것도 걱정 마! 오빠를 향한 내조는 내가 다 책임질게!”
“꺄아아아아아아! 내조래!”
“서련이 닭살 사랑 파이팅!”
“오빠, 힘내세요. 서련이가 매일 오빠 생각만 해요~.”
“한국대 꼭 합격하세요.”
수화기 너머로 소녀들의 밝은 에너지가 듬뿍 전해왔다.
서련의 마음이 진심임을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데뷔 전이라 해도 귀엽고 잘생긴 연습생들도 많을 텐데 나를 잊지 않는 그 마음이 갸륵했다.
그래 FOB 너희들 내가 끌어주마.
뜨지 않는 그룹이었지만 내가 도와준다면 다를 것이다.
돈 벌어서 뭐 하겠는가.
걸그룹 하나 육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시간 날 때 연락해. 오빠 이제부터 서울에 거주한다.”
“정말? 같은 서울 하늘에 있는 거야? 푸히히! 좋다!”
“열심히 해. 성공해야 오빠 뒷바라지해주지. 사시 의외로 돈 많이 든다.”
서련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걱정 마. 나 진짜 열라 준비했어. 데뷔하고 나면 세상 뒤집어질 거야~.”
걸그룹 생존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 안다.
말은 안 했지만 서련과 동료들은 땀을 몸무게만큼 흘렸을 거다.
“그래. 힘들면 바로 연락해. 배고파도.”
“맛있는 건 내가 사 줄게. 오빠는 학생이잖아. 흐히히.”
서련인 내가 얼마나 부자인 줄 감도 못 잡았다.
마음만 먹으면 전세기 타고 미국 가서 스테이크 썰고 와도 됐다.
“그래. 성공해서 맛있는 거 사줘.”
“알았어. 오빠. 나 꼭 뜬다! 그러니까 내 걱정 말고 한국대 법대 꼭 합격해!”
“고맙다. 서련아.”
“피이, 이제 알았어? 나 떠도 오빠 안 버린다. 그러니까 오빠도 내 생각해야 해. 예린 언니만 신경 쓰지 말고!”
예린 선배와 끝장난 걸 서련은 몰랐다.
알리고 싶지도 않다.
적당한 경쟁 상대가 있다는 건 서련에게(?) 좋은 자극이 될 거다.
아무리 봐도 난 착한 남자로 살기는 글렀다.
“콘서트하면 말해. 오빠가 갈 테니까.”
“오빠~ 알았어엉. 로열석으로 꼭 보낼게. 오빠도 면접 잘 봐.”
“그래. 힘들더라도 수고해라. 아프니까 청춘이란다.”
“오오! 역시 우리 오빠야. 그 대사 멋졌어!”
내가 살던 2020년에는 슬픈 단어였다.
비정규직에 내몰리는 청춘들을 대표했던 시대 언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기 2007년 청춘들은 실감하지 못할 때다.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되고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바이러스처럼 퍼지게 되는 비정규직 문제를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미래를 살아봤던 나만이 그 실상을 낱낱이 알고 있다.
지금은 말해봤자 나만 정신병자 취급받을 게 빤하다.
여론전에 휘말려 정규직이라는 것 자체를 대부분 부정하게 되는 사태를 곧 맞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내년부터 국정원을 이용한 여론전이 대대적으로 실시된다.
살고자 소리치면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파렴치한 인간들의 등장.
누구도 탓할 수 없다.
부동산 욕망에 물들어 사기꾼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이 짊어져야 할 몫이다.
“오빠 많이 보고 싶어도 꾹 참아. 절대 다른 여자에게 빠지면 안 돼. 나 완전 쭉쭉빵빵 변했어. 오빠가 보면 기절할 걸~ 흐흐.”
서련이 악마 웃음소리를 흘렸다.
서련은 전생에도 몸매 종결자로 불렸다.
갑자기 서련이 확 보고 싶다.
“알았다. 보고 싶어도 꾹 참을 테니까. 조심해. 데뷔해도 항상 겸손함 잃지 말고~ 남자 선배들 조심해라.”
“오오오~. 내 걱정하는 거 맞지? 걱정하지 마. 내 별명이 철벽 서련이야.”
“서련아! 매니저님 떴다!”
“오, 오빠! 전화 끊어야 돼. 매니저님 왔나 봐. 다음에 전화할게. 내가 오빠 무지 사랑한다!”
뚝.
대답을 하기도 전에 핸드폰이 끊겼다.
서련과의 통화로 잊고 있었던 과거 기억이 떠올랐다.
대차게 나에게 고백하고 사랑을 쟁취하려던 꼬맹이 고1짜리 소녀가 아이돌이 됐다.
“귀여운 녀석.”
내가 고삐리가 됐지만 아직까지 30대 아재 정신은 남아 있다.
아청법이 뇌리에 똑똑히 박혀 있기에 서련이는 아직 애로 보였다.
“내일이 드디어 면접이다. 아우!”
한번 살아 봤다고 해서 다시 사는 삶의 전철을 밟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제 중요한 터닝 포인트인 사회적 신분 세탁 순간이다.
“기다려라 한국대! 내가 간다!”
애용하는 호텔 특실에서 준비하는 한국대학교 정시 면접.
이것도 면접이라고 가슴이 뛰었다.
***
“수능 만점자들도 이번에는 위험하다고 하던데…….”
“당연하지. 등급제로 무슨 변별력이 있겠어. 수능 성적은 1차, 면접과 논술이 당락을 좌우한다.”
“흐흐흐. 어떤 녀석들인지 몰라도 정말 억울한 놈들 많이 나오겠네.”
“이왕이면 여자 후배들이 많이 들어오면 좋겠다.”
“내년부터는 로스쿨 때문에 후배들 없다! 다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눈 크게 떠라.”
한국대 법과대학 면접장에 왔다.
포르쉐를 타고 아주 편한 마음으로 도착했다.
법대 앞에 사람들이 많다.
수험생들뿐만 아니라 학부모들도 함께였다.
합격하는 순간 인생 노선이 달라진다.
면접자들에게 순서표를 나눠주거나 따뜻한 차를 나눠주는 선배들이 법과대학 면접장 주변에 어슬렁거리며 눈을 빛냈다.
미래의 판검사나 변호사가 될 수컷들이다.
외모가 봐줄 만한 여학생들에게는 과잉 친절을 베풀었다.
그에 반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적의에 가득 찼다.
자신들이 내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들은 몰랐다.
‘인생 두 번 살고 볼 일이라니까.’
나도 한국대 면접은 상상해 본 적이 없다.
논술은 이미 끝난 상태다.
수능은 한 문제 틀렸지만, 등급제였기에 만점자 자격을 얻었다.
내신도 이번 학년도는 2등급까지 패스다.
1차 수능 성적 전형은 등급제로 만점자 대열에 합류했다.
2차는 학생부와 논술, 그리고 면접이다.
논술 문제 또한 과거 재수할 때 풀어 봤기에 어려움이 없다.
인문계에 적용된 부계 혈통과 동성동본 문제, 민주주의 다수결과 과거 신라나 백제 등의 왕국에 있었던 여러 집단회의 제도에 대한 비교 문제다.
단순한 암기 지식이 아니라 맥을 짚어야 하는 창의적 논술을 필요로 했다.
모든 문제를 막히지 않고 술술 풀었다.
정답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구체적 방안까지 제시해야만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
그것도 간단하게 패스.
이제 남은 건 면접뿐이다.
‘면접 문제는 복불복이라고 했지.’
한국대 면접은 난해함을 자랑했다.
교수들이 묻는 문제들은 모두 다 허를 찌르기로 유명했다.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1번부터 5번까지 다섯 명 단위로 끊겠습니다. 1번부터 5번까지 입장해 주십시오.”
조교로 보이는 이가 딱딱한 말투로 면접을 알렸다.
대형 강의실 입구에서 조교들과 선배들이 포스를 풍기며 신입생들을 압박했다.
싸가지 오동성 그놈은 보이지 않았다.
방학 기간이기에 어디서 계집질이나 하고 있을 게 뻔했다.
선배들 눈초리가 따뜻하지 않다.
면접자들은 후배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합격해야 후배로 인정을 받았다.
지금은 왕의 성총을 기다리는 궁녀들처럼 다들 순번을 기다렸다.
나도 그 일부다.
세계 갑부 순위를 찍어도 오늘은 평범한 수험생 놀이를 즐겼다.
마음만 먹는다면 대학교 하나 구입하는 건 일도 아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차지하는 한국대라는 이름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역사와 전통, 그리고 사회에서의 거대한 인맥을 자랑했다.
지금 나에게는 굳이 필요 없는 과정이지만 한 번 경험해 보고 싶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대한민국 최고 지성의 구성원이 되는 경험도 나쁘지 않았다.
“하아…….”
“후.”
긴장되는 듯 곳곳에서 한숨이 튀어나왔다.
기업 면접 장소도 아닌데 다들 정장 차림이다.
한국대 법대가 주는 무게감은 정장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회색과 연 블랙 투 컬러 세미 정장을 차려입었다.
눈을 감고 조용히 명상에 빠져 평정심을 유지했다.
한 번 죽었던 경험 때문인지 우황청심환을 먹을 정도는 아니다.
또각또각.
그때 복도 쪽에서 규칙적인 하이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와…….”
“오!”
옆에서 놀라는 남자들의 감탄사가 들렸다.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걸음걸이가 일정한 보폭을 유지했다.
눈을 뜨지 않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면접자들에게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미녀임을 알 수 있었다.
뚝.
거짓말처럼 내 앞에서 멈춰서는 걸음.
훅 하고 부드러우면서 은은하게 달콤한 향수가 맡아졌다.
‘뭐지?’
“어! 여기는 무슨 일이야?”
그때 법학과 조교가 놀라 멈춰선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 순간 보이는…….
# 73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