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103
103화
클로드의 주황색 눈을 마주하고 있자니, 그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이 궁금했다. 황태자가 의외라는 듯 눈썹을 까닥이는 걸 보니 더욱 그랬다.
‘클로드가 아이작에게 보이는 모습과 비슷하려나.’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고 나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시선을 내려 무릎을 꿇고 있는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결국, 전부 사실이었던 것 아닙니까. 달튼 자작님의 약재 목록을 몰래 훔친 것도, 그와 함께 먹으면 안 될 음식을 선물한 것도, 제게 추문을 씌운 것도.”
“그렇지.”
소피아가 자기 입으로 시인했던 것처럼, 아이작의 수첩에 담긴 건 내 처방전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내 것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수작을 부린 거지.
물론 소피아 일라리아는 북부를 위해 벌인 짓이라고 변명했으나,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는 내게는 검은 속내가 너무나도 뚜렷하게 보였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정말이지 유치하고 저열하기 짝이 없는 행태 아니냐? 솔직히 무슨 자신감으로 티를 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소피아 일라리아는 헤링본 자작만큼 멍청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상관없어.’
어차피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랑에 미친 사람이 사회적 지위나 입장 따위를 내다 버리는 걸 처음 보는 것도 아니고.
나를 기다리는 황태자에게 할 말은 단 하나였다.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사람이니 뭐니, 그런 이유 따위는 붙일 필요도 없었다.
“전하, 실망하시진 않을 거예요.”
또렷한 시선을 마주한 황태자가 흥미롭다는 듯 살짝 입꼬리를 당겼다. 소피아와 클로드, 그리고 나를 차례로 눈에 담은 그가 가볍게 턱을 긁었다.
“이건 생각 외의 수확이네. 좋아, 영애에게 맡기지.”
“감사합니다, 전하.”
좋아, 허락받았다. 나는 단번에 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소피아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서 조용히 눈을 내리깔자,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내게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게 분명한 클로드부터 우선은 지켜보고 있는 전 카르테인 공작 내외, 그리고 우리 부모님까지.
황태자가 단단히 당긴 긴장감을 고스란히 넘겨받은 듯한 그런 기분이었다.
뭘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고민했는데, 소피아와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나는 부인에게 정말 실망이 커요.”
정말이다. 처음 소피아 일라리아를 봤을 때는 솔직히 설레기까지 했으니까.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눈을 감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이 나와 나눌 말이 없다는 것처럼 느껴져 나도 더 말을 얹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별도로 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소피아 일라리아와 일라리아 백작가의 사교계 출입과 발언을 모조리 금합니다. 그리고 달튼 자작님.”
“예, 나디아 님.”
“제가 먹은 영양제, 그건 제가 아니라 다른 누가 먹어도 상관없는 거지요? 영양제니까.”
“네, 그렇습니다.”
아이작의 뒤편에서 몇 사람들이 몸을 움찔 떠는 것이 보였다. 나와 아이작의 대화에서 내가 뭘 하려는 건지 감을 잡은 모양이었다. 그건 가까이 있는 소피아도 다르지 않았다.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뜬 그녀가 꾹 입술을 앙다물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내 것과 똑같은 영양제를 내리겠습니다. 몸에 잘 받으시는지 매번 확인할 테니, 부인은 단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먹어야 할 겁니다. 아, 그리고…….”
나는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무릎을 굽혀 바닥에 구르던 초콜릿 하나를 집었다. 그러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채 소피아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드세요.”
“…….”
“부인이 내게 화해의 의미로 내민 손길, 그거 나도 내미는 거로 하려고요.”
크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 백작 부인이 잘게 떨리는 손으로 초콜릿을 집었다. 스친 손은 아주 차가웠다.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그녀에게 굴욕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소피아가 입에 초콜릿을 넣는 걸 확인하며 나지막하게 줄리엔을 불렀다.
“줄리엔.”
“네, 나디아 님.”
“내가 연회장에서 먹은 것과 동일한 초콜릿을 일라리아 백작가에 보내드려. 내 체면이 구겨지지 않을 정도의 양으로.”
“…공녀님.”
사람들이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사이로, 소피아가 여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차마 초콜릿을 먹는 걸 확인하겠다는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목구멍까지 치민 감정을 누른 채 나는 입을 다물었다.
‘됐어. 이 정도면 충분히 경고는 됐겠지. 백작 부인의 입지도 좁혔고, 영양제를 빌미로 계속 감시도 할 테니까.’
그렇게 마음을 먹고 시선을 떼려던 찰나였다. 방금까지 모든 걸 받아들이겠다는 듯 굴던 그녀가 똑바로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그녀의 분홍색 눈동자에는 웃기게도 억울함과 분함, 굴욕의 감정이 서려 있었다.
‘뭐야.’
지금 고개를 숙인 건 전부 클로드 때문이지, 진심이 아니라는 거야?
나는 절로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그녀의 눈빛을 받아 냈다. 본능적으로 여기에서 한 번 더 강하게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상황을 정리하려던 마음을 접고는 조금 더 몸을 낮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 딱 우리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그렇게 티를 내는데, 내가 눈치를 못 채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소피아 일라리아, 그대의 위치를 기억해. 무슨 수를 써도 그대는 백작 부인이야. 예비 공작 부인이 아니라.”
나는 그 말을 하며 힐긋 옆으로 시선을 주었다. 당연하게도 소피아 일라리아의 남편, 일라리아 백작이 서 있는 곳이었다.
나를 따라 눈을 돌린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라리아 백작의 표정에 의심과 부정, 그리고 당황의 기색이 선명하게 서린 게 보인 탓이다.
“위치…….”
내가 한 말을 짧게 읊조린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긴 머리카락이 다른 사람에게서 그녀의 표정을 가렸다. 처음으로 그녀가 내게 감정을 드러냈다. 세게 입술을 악문 그녀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자리는… 거인데. 아냐, 조금만…….”
잘 들리지 않는 말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짧고 강하게 마음의 동요를 드러내던 그녀가 순식간에 감정을 갈무리했다. 단번에 차분하게 기운을 정리한 그녀가 작게 바람 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건 정말 괴이한 광경이었다. 한 번도 부정적인 감정을 보인 적이 없던 사람처럼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 그녀가 지그시 나와 눈을 마주했다.
“…공녀님, 저를 이겨서 좋으시겠어요.”
“뭐?”
“축하드려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그녀에게서 더는 말하지 않겠다는 기색이 강하게 엿보였다. 가늘게 눈을 뜨자 그녀가 담담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마지막 자존심인지, 아니면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절로 헛웃음이 나올 만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이 이상의 신경을 쏟지 않기로 했다.
‘그래, 맘대로 해라.’
어차피 달라질 건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그녀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달리 생각하면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공격이 이렇게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짧은 고민 끝에, 나는 기꺼이 웃으면서 그녀의 축하를 받기로 생각했다.
“그래, 좋네. 이겨서. 축하 고마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게 몸을 펴고는 가만히 사람들을 훑었다. 그러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간 북부 사교계를 이끌었던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더는 나를 도울 수 없게 되었으니, 이곳을 정리할 사람이 필요한데…….”
나는 간택을 하듯 자리에 있는 귀부인들과 영애들을 살폈다.
긴장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 가운데, 부채로 입가를 가린 채 소피아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던 네펠리 영애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나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거리낌 없이 그녀를 불렀다. 내 개인적인 사정을 뒤로하면 지금의 내가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그녀였던 탓이다.
“네펠리 영애. 번거롭겠지만, 당분간 저를 도와 북부에 남아주실 수 있나요?”
어떻게 보면 염치없게 들릴 수 있는 부름에 네펠리 영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 두 번. 짧게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이윽고 슬쩍 눈웃음을 지으며 부채를 접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한 발 앞으로 나온 네펠리 영애는 우아하게 가슴에 손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번거롭긴요. 다른 누구도 아닌 나디아 님의 요청인데요. 그렇지 않아도 지적하고 싶은 곳들이 자꾸 눈에 들어와 곤혹스러웠답니다. 덕분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요.”
소피아 일라리아의 자리가 완전히 대체된 탓일까. 어린 영애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어째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들을 보니, 그간 소피아가 이곳에서 어떤 위치였는지가 대강 눈에 그려졌다.
“그럼 이제 로드릭 헤링본만 정리하면 되겠군.”
“네, 전하.”
“일라리아 백작 부인이 한 말로 보아 소문은 저쪽이 퍼뜨린 듯하니, 로드릭 헤링본은 내가 데리고 가 조사하겠다. 다른 의견 있나?”
나는 고개를 내저어 황태자의 말에 동의했다.
얼추 상황이 정리되는 가운데, 누군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아무 말 없이 지켜보고 있던 카르테인 공작 부인이었다.
“정말이지, 마수들이 들끓는 전쟁터보다도 난장판인 상황이라니.”
자연스럽게 사건의 중심지로 걸어온 그녀가 고고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을 눈에 담았다.
한심함과 약한 경멸을 담아 그들을 보던 그녀가 황태자와 나에게 목을 숙여 인사했다.
“전하, 멀리서 방문하셨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어 송구하군요. 그리고 영애, 그대에게도 미안하구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북부가 상당히 해이해졌던 모양이야. 같잖은 수작으로 영애를 보내게 될까 봐 내 심장이 다 철렁했어.”
“에스텔 님.”
“서약식을 마친 이상 기정사실이 되었지만, 한 번 더 명확하게 하지.”
부드럽게 풀어졌던 그녀의 눈빛이 단숨에 서릿발이 날릴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았다. 클로드 못지않은 위압감으로 사람들을 누른 그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애의 뜻은 곧 나와 이안의 뜻이야. 영애를 해하는 것은 카르테인을 해하는 것과 같다. 아, 그 전에 나를 먼저 상대해야겠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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