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049
한제는 종대홍의 기억을 뒤지긴 했지만 중요하고 굵직한 기억만을 살폈을 뿐이라 흑마법왕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한제는 말없이 흑마법왕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데 지금껏 주위의 쑤군거림에도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고 갈 길을 가던 흑마법왕이 한제의 시선이 닿은 순간 흠칫 놀랐다. 마치 온몸이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에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다행이라면 그 느낌이 순간 사라졌다는 것이다.
흑마법왕은 감히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속도를 높였다.
한편, 어느덧 뇌정전에 가까워진 한제는 하늘을 가득 뒤덮은 푸른 안개를 볼 수 있었다. 그 안개 사이에는 작은 균열 같은 길이 나 있었다. 폭이 1백 척 정도 되는 좁고 긴 통로였다.
푸른 안개 바깥쪽에는 붉은 옷을 입은 두 명의 수련자가 냉랭하게 서 있었다. 마흔을 갓 넘긴 듯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수천 년을 수련해온 음의의 수련자들이었다.
두 사람의 차가운 눈빛이 이곳을 지나는 모든 수련자들을 훑었다. 누구나 그 시선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흑마법왕 역시 그들 앞에서는 공손하고 겸손해졌다.
빽빽할 정도로 많은 수련자가 모였지만 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갈등도 소란도 없었다. 모두가 그저 얌전하고 조용하게 통로 안으로 진입할 뿐이었다.
한데 한제가 갑자기 흠칫하더니 멀리 떨어진 하늘 끄트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하늘 가장자리의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더니 구름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을 연결시킬 듯 내리 떨어졌다.
콰르릉!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 순간, 균열 같은 통로 바깥의 수련자들은 심신이 진동했다. 통로를 감시하는 음의의 수련자들 역시 신중한 모습이었다.
뒤이어 응축된 구름 속에서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백발이 성성했지만 두 눈은 예리하게 빛났다. 그가 내딛는 걸음마다 시공을 뛰어넘듯 허공이 왜곡됐다.
“규열기 수준 수련자라⋯⋯.”
한제는 작게 웃었다.
통로를 지키고 있던 적의의 두 수련자가 공손한 표정으로 포권을 했다.
“주천자 선배를 뵙습니다. 선배님께서 뇌정전에 다 오시다니, 곧 10등 이내로 진입하시겠군요.”
노인은 살짝 포권을 하며 웃었다.
“10등 이내라니, 30등 이내에만 진입해도 감사할 걸세.”
그는 단약 두 개를 꺼내 적의의 수련자 둘에게 하나씩 건네더니 말없이 채 통로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자 통로 여기저기서 수련자들은 분분히 길을 비켰다.
붉은 옷을 입은 두 수련자는 손에 든 단약을 보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노인의 뒤에다 대고 포권을 한 채 자리로 돌아갔다.
노인이 떠난 뒤에야 주위의 수련자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주천자 선배께서 첫날인 오늘 오실 줄이야.”
“휴, 우리에게는 언제 주천자 선배 같은 강자가 생기려나.”
한제와 종대홍은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뚫고 균열과 같은 통로 앞에 이르렀다. 붉은 옷의 수련자 둘이 한제를 슥 훑어보았지만 그뿐이었다.
한편, 처음으로 섬뇌족의 금지에 오른 한제는 사방의 푸른 안개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안개는⋯⋯?’
섬뇌 순위표에 이름을 올리다
꾸물거리는 푸른 안개 속에서 수시로 전광이 번득였고 요란한 소리도 울려 퍼졌다.
균열과 같은 통로를 나아가는 동안 수련자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마치 그 안에서 감히 저항할 수 없는 존재가 나타나 자신을 잡아갈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통로의 가장자리에서 최대한 멀어졌다. 감히 비행할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물론 한제는 예외였다. 그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흥미로운 안개로군.’
그의 눈에는 이 안개가 천둥번개로 보였다. 누군가가 신통술로 안개 형태로 바꾼 데다가 방어막 작용까지 더했을 뿐이었다.
‘그러니까 번개는 본래 안개로 만들 수 있는 거였군. 번개 신통술에 대해 섬뇌족의 경지는 역시 상당하다. 형태를 가진 번개를 형태가 없는 안개로 만들 수 있다면 그 방어력은 내 풍우계(風雨界)에 비견할 만하겠지. 게다가 명령 한 번으로 이 천둥번개를 수축시켜 철창으로 만든다면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해!’
한제는 통로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가며 주위를 세심하게 관찰했다.
‘이 천둥번개를 여기에 배치해놓고 통로를 열어주기까지 한 걸 보면 섬뇌족은 외부인들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는 천둥번개의 신통력으로 방어막을 만드는 핵심을 공개한 것과 같은데 말이야. 친절하게도 공개를 해준다면 그 친절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겠지?’
한제는 속으로 웃으며 신식을 펼쳐 계속해서 천둥번개를 연구했다.
그의 강력한 신식은 천둥번개를 은근히 압박해 어떤 반항도 하지 못하게 했다. 만약 보통의 상황에서라면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겠지만 지금은 천둥번개가 안개의 통로로 개방되어 있었기에 훨씬 더 빨리, 더 편하게 연구할 수 있었다. 덕분에 금방 안개를 형성한 신통술을 파악하는 데 성공했다.
‘정말 정교한 술법이로군!’
한제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섬뇌족은 외부의 누군가가 이 통로로 파고들이 이토록 빨리 그 신통술을 파악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또한 누군가가 자신들의 성역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는 번개의 연못을 뛰어넘어 섬뇌족 일원으로 위장할 수 있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번개의 연못은 세 번째 단계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면 들어설 수도 없는 곳이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은 오직 한제뿐으로 그의 원신 자체가 불멸의 번개와 같은 수준의 번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그가 금지(禁地) 중 하나인 이곳의 비밀스런 술법까지 파악했다는 것을 안다면 섬뇌족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할 터였다.
통로는 길지 않아 지나는 데 1각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곳의 안개는 한제에 의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허나 누구도 그 변화를 눈치챌 수 없었다. 한제의 신식 또한 번개였기 때문이다.
한제는 통로를 빠져나간 순간 신식을 거두었다. 반짝이는 그의 눈에서 하나의 문양이 나타났다. 번개를 안개로 만들 수 있는 신통술의 정수였다.
균열 밖으로 나오니 전방에 높이 솟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그 꼭대기에는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대전이 있었는데 그 위로는 번득이는 전광이 커다란 세 글자를 이루었다.
뇌정전
한제와 종대홍을 비롯한 일행은 곧장 그 대전으로 향했다.
“주인님, 이 대전에는 동, 서, 남에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그중 동문은 뇌정을 교환하는 곳이고 남문은 뇌정을 법보나 단약, 혹은 공법과 바꾸는 곳이지요. 마지막으로 서문은 오직 수준 높은 수련자만이 출입할 수 있습니다. 섬뇌족은 그곳에서 임무를 받고 임무를 완수하면 뇌정을 받지요.”
종대홍은 한제가 아직 한 번도 뇌정전에 와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의아했으나, 곧 의심을 접고 설명을 이어갔다. 허나 사실 이는 이미 한제가 종대홍의 기억을 뒤져 파악한 것이었다.
“이제부터는 혼자 다녀도 되겠군. 떠날 때가 되면 부르마.”
한제의 덤덤한 목소리에 종대홍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한제는 호화로운 대전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는 이 대전이 1층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 내부는 네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음을 단박에 간파했다.
동서남의 각 문은 서로 다른 층으로 연결되는데 마지막 층에는 문이 없다. 허나 한제는 신식으로 한 번 훑음으로써 네 번째 층 안에서 아홉 갈래의 기운이 호흡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홉 갈래의 기운 중 다섯은 규열기, 세 명은 정열기, 마지막은 쇄열기! 섬뇌족에는 과연 강자가 적지 않군.’
한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뇌정전의 동문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매우 많은 섬뇌족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돌아다녔다. 개중에는 홀로 다니는 이들도 있었다.
가장 많은 수련자가 모인 곳은 동문이었다. 기뻐하거나 아쉬워 보이는 수련자들이 들고났으며, 아직 볼일이 남은 듯 더 머무는 자들도 있었다.
잠시 수련자들과 주위를 살피던 한제는 이내 동문으로 향했다. 그는 이곳의 누구와도 알지 못했고 마찬가지로 이곳의 누구도 그를 알지 못했다. 게다가 한제의 표정이 너무도 냉랭했기에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동문 안으로 들어선 한제는 격리된 공간에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방에는 거대한 검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진흙탕이 부글부글 끓었다.
연못 옆에는 세 명의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한 명은 양의에 다른 둘은 음의의 경계에 이른 상태였다. 그들의 몸 안팎으로는 천둥번개의 힘이 번득였다.
한제는 이미 종대홍의 기억을 통해 뇌정을 교환하는 방법도 파악했기에 곧장 미간을 두드려 뇌정으로 바꿀 수 있는 대량의 물건들을 꺼냈다. 이 물건들은 곧장 진흙탕 안으로 흡수됐다.
한참이 지났지만 한제는 여전히 온갖 물건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자 가부좌를 틀고 있던 세 명의 노인이 흥미롭다는 듯 한제를 살폈다. 이곳의 책임자인 이들조차 한 번에 이토록 많은 물건을 쏟아내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한제는 자신의 수준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이도록 적당히 조치를 해둔 상태였다. 세 노인의 눈에는 문정기 수련자로 보일 터였다.
한참 후에야 가진 물건을 모두 검은 진흙탕에 쏟아낸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옥패를 하나 꺼냈다. 명혼을 담은 그 옥패는 원정을 기록하는 일종의 표식이었다.
옥패는 휙 하고 날아가 검은 연못 안에 잠겼다. 그러자 연못은 음울한 포효를 내질렀고 잠시 후 출렁거리더니 옥패를 돌려보냈다.
그 순간, 섬뇌족에 속한 수련성의 모든 섬뇌족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순위표 옥패에 파문이 일었다. 순위표에 변화가 생겼다는 알림이었다.
해마다 뇌정전이 열리는 사흘 동안 순위표에는 요란하고도 격렬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8백 등 안의 이름이 사라지거나 새로운 이름이 올라오는 일은 드물었다.
한데 지금, 순위표 옥패의 파문은 유독 격렬했다. 이는 새로운 사람이 순위표에 이름을 올렸다는 의미였다.
거의 모든 섬뇌족 수련자는 분분히 순위표 옥패를 확인했다.
1위는 여전히 운삼자였다. 하지만 그의 원정은 19억 7만천 개에서 14억 9천 개로 바뀌어 있었다.
섬뇌족 수련자들이 순위표를 훑어보는 동안 개중 똑똑한 사람은 밑에서부터 훑어 올라갔다. 그리고 새롭게 이름을 올린 사람을 금방 찾아냈다.
799등에 새로 이름을 올린 사람은 우비, 원정은 46만 4천 개였다. 800보다 3천 개가 더 많았다.
“우비? 어느 수련성에 있는 사람이기에 단번에 순위표에 이름을 올린 거지?”
“들어본 적 없는 자인데? 뭐, 내가 모든 수련자의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순위표에 이름을 올리다니, 얕잡아볼 수 없는 자겠군.”
“우비라니,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군. 허나 사흘이 지난 후에도 순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섬뇌족의 열세 개 수련성 곳곳에서는 우비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한제가 연못에서 튀어나온 옥패를 챙겨 막 떠나려는 찰나, 가부좌를 튼 세 명의 노인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우비렷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한제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조용히 말했다.
“나의 압박감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다니, 마음이 아주 굳건하군. 게다가 몇 년간 모은 물건들을 그동안 참아왔다가 오늘에서야 뇌정으로 바꾼 것을 보니 꾀 또한 만만치 않겠구나! 그 정도면 서문에 들어갈 자격이 있을 터. 네게 적합한 임무가 있는지 가 보거라. 자원을 뇌정으로 바꾸는 것은 수준이 낮은 수련자들이나 하는 짓. 임무를 완수하면 더 많은 뇌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순위표에 이름을 올렸으니 어서 가 보아라.”
노인은 덤덤함을 유지하는 모습에 더욱 만족한 듯 대견하다는 눈으로 한제를 보았다. 허나 한제는 대답 없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관례에 따르면 동문의 책임자는 순위표에 새로 이름을 올린 자를 만나게 되면 선물을 주게 되어 있다. 이것은 취뇌환(聚雷丸)이다. 내가 직접 제련했지. 8천 9백 배로 압축해둔 것이다!”
노인이 손을 휘두르자 엄지만 한 번개 공이 튀어나와 한제에게로 날아갔다.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짓던 나머지 두 노인 중 한 사람은 옥패를 소환해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