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76
같은 시각, 수도자가 쏘아 보낸 여섯 번째 옥패는 계내 곳곳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한제의 이름은 순식간에 계내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천역주가 다시 나타났다!”
그야말로 충격인 소식이었다. 전쟁 준비에 전념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였건만 수도자의 말에 수련자들은 마음이 뒤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준비에만 몰두하는 자는 없었다. 대부분은 천역주가 무엇인지도 잘 몰랐지만 수도자가 약속한 것들만 해도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게다가 수도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한제라는 자를 죽이는 것은 대의를 이루는 일이기도 했고 전쟁에 있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수도자가 보내온 옥패에는 한제의 생김새도 담겨 있었다. 수백 년 전의 모습이긴 했지만 알아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한제를 잘 아는 몇몇이 수도자의 말에 불신을 표했지만 그들은 극히 소수일 뿐이었다.
★ ★ ★
소하성역의 흘러넘칠 듯한 영기를 품은 수련성. 구름으로 휩싸인 산봉우리 꼭대기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여인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온몸이 흐릿해 그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엉덩이에 닿을 만큼 길었다.
그녀가 눈을 번쩍 떴다. 눈동자는 별빛처럼 반짝였지만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이한제가 장존의 장기 말이라⋯⋯.’
한편 소하성역의 다른 곳에서는 나태해 보이는 걸음을 옮기며 끊임없이 하품을 하는 청의의 사내도 있었다.
“마 사숙께서 그러셨지. 그것은 소하 안에 있을 것이라고. 한데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바로 그때, 청년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이한제 이자… 당시의 그 녀석 아닌가! 이거 재미있군!”
운해에 영광을
연맹성역, 봉인된 우의 선계. 폐관수련을 하며 부상을 치료 중이던 청림이 두 눈을 번쩍 떴다.
한참 뒤 그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한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우의 선계 전역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빗방울들은 청림이 폐관수련을 하는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더니 이내 청림의 손에 응집해 영패를 형성했다.
곁에 있던 사도환 역시 두 눈을 번쩍 뜨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이런 망할! 저 빌어먹을 자식이 감히 내 형제 같은 한제를 간교한 배신자로 몰다니! 천역주는 내가 그 녀석에게 준 것이니 그럼 나도 간교한 배신자라는 거냐? 천 번을 죽여도 시원찮을 놈! 절대 가만두지 않겠다!”
사도환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광분해 뛰쳐나가려 했다.
“앉아라. 내가 처리하지. 게다가 수도자는 망할 자식이 아니야. 내 스승님의 노예지.”
청림이 일갈했으나 사도환은 겁먹기는커녕 그런 청림을 매섭게 노려보며 차게 웃었다.
“넌 내 스승이지. 허나 한제는 내 형제다. 녀석이 수련을 시작했을 때부터 내내 같이 붙어 있었지. 게다가 너를 소생시킨 것도 녀석인데 설마 너는 그 녀석을 못 믿는 거냐?”
“못 믿는 건 내가 아니라⋯⋯ 장존이다.”
청림은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침묵하다가 빗물로 응집된 영패를 움켜쥐더니 한 줄기 신식을 주입했다.
“이한제는 나의 제자다. 누가 감히 그런 자를 모함하려 하느냐!”
그 신식은 곧장 우의 선계 밖으로 튀어나가 연맹성역 전역을 뒤덮고는 더 먼 곳까지 퍼져 나갔다.
★ ★ ★
운해성역, 한 산골짜기 안. 노부자와 요종의 종주를 비롯한 이들이 공손하게 선 채 적의(赤衣)의 사내 앞에 서 있었다. 적의의 사내는 덤덤하고 침착했으나 두 눈은 서늘하게 빛났다.
이때, 산골짜기 안의 모든 사람은 신종에서 전달된 옥패로부터 수도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말도 안 돼! 이한제가 장존의 장기 말일 리가!”
“당시 봉계의 지존이 이한제에게 직접 말했어. 계내를 대표해 계외의 침입에 저항하라고!”
노부자와 요종의 종주를 비롯한 이들의 표정이 동시에 급변했다.
적의의 사내는 더욱 서늘해진 눈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홍삼자는 이런 시기에 그자의 수준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으나 그자가 죽음을 자초하는군.”
적의의 사내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내다보았다. 그의 눈에서 서늘한 빛이 사라지더니 곧 대견한 제자를 바라보는 스승의 눈빛과 비슷하게 바뀌었다.
“봉계 지존의 눈썰미가 어떤지 두고 봐야겠군. 어디까지나 그들의 일이니.”
★ ★ ★
운해 7급 성역.
신종 분종에 소속된 수백 명의 수련자들이 수백 년간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던 귀원종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귀원종으로서는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귀원종 내의 모든 수련자가 제압된 채 전송진을 통해 9급 신종으로 보내졌다. 이제 신종의 명만 떨어지면 귀원종 제자들은 참수를 당할 터였다.
그중에는 여연비도 포함되어 있는데 그녀는 침착해 보였다. 그녀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고 그럼에도 후회는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뿐만 아니라 귀원종의 모두가 그러했다. 여자호, 즉 이한제가 없었더라면 귀원종 역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각, 노쇠한 파천종의 종주는 복잡한 얼굴로 자신의 종파를 훑어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착하게 신종으로 향했다.
한편, 신종 내의 진 안에서 폐관수련을 하고 있던 모은미도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녀의 손에는 단약이 한 알 있었다. 수백 년 전 수도자가 준 것으로 수준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이 될 단약이었지만 그러려면 반드시 적합한 시기에 먹어야만 했다.
모은미는 말없이 단약을 바라보았다.
이 무렵, 수도자의 명령에 따라 운해성역의 수련자들은 일제히 신종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신종 제자들이 전송진을 열어둔 덕분에 신종 외부의 안개 속에 모여든 수련자의 수는 이미 1만 명을 넘어선 상태였다.
이들은 본래 계외에 저항하기 위한 용도인 구멸여천진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 ★ ★
한제의 두 눈에 짙은 분노와 살기가 어렸다. 그는 수도자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여섯 번째 옥패에 담긴 신식은 똑똑히 느꼈다.
점점 짙어진 살기는 한제가 앞으로 나아감에 따라 급기야 실체를 갖춰 서리를 형성했다. 이 서리는 순식간에 반경 1만 척을 뒤덮었고 서리에 닿은 안개는 쩌적 소리를 내며 그대로 얼어붙었다.
‘수도자를 죽이고 안정을 찾겠다. 반드시 죽인다! 그자는 노예로 삼을 가치도 없는 자다. 심지어 이천매가 치러야 했던 모든 대가도 수도자 때문이다. 그자가 천역주를 탐내지만 않았더라도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이란 말이다.’
한제의 체내에서 발산된 살기는 이미 하늘을 뒤덮었고 서리 역시 더욱 확산되면서 어느새 반경 10만 척을 뒤덮었다.
한제가 가진 본원 중 물의 본원은 없으니 진정한 얼음을 형성할 수는 없었다. 허나 수도자를 죽이겠다는 지독한 살의에 서리가 생겨난 것이다.
한제는 군자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소인도 아니었다. 그는 공명정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음험하고 비열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이한제였다. 평생을 오직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없는 마음만을 추구해왔다. 만약 그런 자신의 마음에 얼룩을 남기려는 사람이 있다면 한제는 상대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한제가 운해성역을 가로지르며 나아가는 동안 그의 주위로는 서늘한 기운이 끊임없이 확산되었다. 10만 척, 50만 척, 1백만 척!
곳곳에서 얼어붙은 안개 사이로 강력한 기세를 발산하며 한제는 운해성역 가장 깊은 곳, 9급 신종을 향해 돌진했다.
그가 질주하는 사이 그의 살기에도 기이한 변화가 생겨났다. 이 변화로 인해 한제가 평생 저질러온 살육에서는 한 줄기 본원의 기운이 피어올랐다.
살육의 본원이었다. 세상 만물은 본원을 갖는 법이었지만 살육의 본원은 그중에서도 특히나 보기 어려웠다. 무작정 살육을 많이 저지른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정확히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깨달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운해성역 가장 깊은 곳인 9급 성역에 다다른 한제가 그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순간, 9급 성역에는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그 안을 채운 안개도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수도자!”
신종 근처에 나타난 한제의 차갑고도 우렁찬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넌 계외와 결탁하여 네 주인을 배반했다. 이에 당시 봉계의 지존은 내게 너를 소멸시킬 것을 부탁했다. 오늘, 나는 그의 노예인 너를 죽이러 왔다!”
한제의 목소리에 실린 묵직한 위엄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강력한 수련자들의 신식이 집중됐다. 그리고 이들의 싸움은 훗날 계내에서 한제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될 터였다.
한제의 위압감이 실린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지면서 이곳에 집중하고 있는 수준 높은 수련자들에게도 전달되었다. 4대 성역 내의 여러 수준 높은 수련자들은 한제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목소리에 담긴 내용에 경악했다.
“뚫린 입이라고 잘도 헛소리를 지껄이는구나! 구멸여천진, 장존의 개인 저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신종에서 울려 퍼진 수도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예리한 검처럼 곧장 한제의 심신으로 돌진했다.
“훗!”
한제는 차게 코웃음을 쳤다. 그 소리는 사방으로 울려 퍼지며 수도자의 목소리에 담긴 기세를 흩어버렸다. 동시에 한제는 오른손으로 미간을 두드렸다. 순간 붉은 빛이 피어나더니 신종으로 향했다.
한제의 뒤로는 지독히도 서늘한 기운이 모든 것을 얼려버리고 있었다. 심지어 얼음으로 봉인된 안개에서도 세상을 뒤흔들 듯한 살기가 발산되었다.
이 살기와 한제의 체내에서 발산된 살기가 한데 융합해 한 줄기 살육의 본원을 형성했다. 살육의 본원이 나타나자 한제는 마치 살선(殺仙)처럼 느껴졌다.
한편, 4대 성역 각지의 강력한 수련자들은 살육의 본원이 나타난 순간 크게 놀랐다. 특히 그 공격의 대상이 된 수도자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본원! 당시에 가지고 있던 본원도 적지 않았는데 그새 하나가 더 늘어났단 말인가! 더욱이 저것은 살육의 본원이다. 당시 봉계의 지존도 깨닫지 못한 살육의 본원! 뭐, 하긴 그렇다고 해도 소용없겠지. 흐흐흐.’
수도자는 손에 금색 방울을 꽉 쥔 채 음흉하게 웃었다.
한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 순간 구멸여천진을 이루고 있던 만여 명의 수련자들은 그 전의에 짓눌려 표정이 급변하며 동시에 뒤로 물러났고 몸을 바르르 떨며 체내의 원력을 빠른 속도로 가동했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한제의 걸음이 마치 그들의 심신을 짓밟기라도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