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309
한편,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 이르러 있던 한제의 얼굴도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그는 망설임 없이 피를 뱉어내 혈둔술을 발휘했다.
‘내가 방해하지 않았더라도 저자는 나를 죽이려 했을 것이 분명해!’
엄청난 위기였지만 한제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만 할 일이었다.
칠채도인을 피해 도고의 제단을 찾아갔더라면 당장은 위기 없이 수준을 높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래봐야 죽음을 약간 늦추는 데 불과했을 것이다.
환각 속의 일이 사실이고 그래서 칠채도인이 세 번째 주혼을 찾아내게 된다면 동부계는 멸망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은 새로운 칠채선존의 통제에 따를 것이고 한제 자신의 생사도 스스로 택할 수 없게 됐으리라.
그렇기에 반드시 칠채도인의 계획을 무너뜨려야만 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래야 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도망치는 한제 뒤편의 우주가 휘우뚱 일그러졌다. 한제는 칠채도인이 자신을 뒤쫓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칠채도인은 수준이 매우 높은 만큼 신식을 펼칠 수 있는 범위도 넓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제단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그곳에 살길이 있을지도 몰라!’
한제는 애초에 제단으로 갈 것인지 칠채도인의 환각에 들어갈 것인지를 두고 깊게 고민을 한 바 있다. 각 선택에 따른 득실을 계산하고 천운자의 혼을 이용해 미래를 예측하기도 했는데 제단에 살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반산로는 동부 전쟁 당시 천도가 나타나 연도비를 삼키고 칠채선존이 삼혼칠백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운해성역 균열 안의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녀는 또한 이 공간은 또 다른 기이한 공간과 연결되어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이토록 많은 흉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균열의 깊은 곳, 칠흑처럼 어두운 우주에 거대한 제단이 떠 있었다. 약간 망가진 채 우주에 떠 있는 제단은 고정된 듯 한곳에 머물러 있었다.
제단은 전체적으로 검은색이라 우주와 분간하기도 힘들었지만 한쪽 모서리만은 부드러운 빛으로 어렴풋이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모서리 때문에 제단이 표류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또 다른 공간과 연결되어 있는 듯한 모서리에서는 파문이 일어나 수만 년간 쉬지 않고 퍼져 나갔다. 허나 그 공간 역시 온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곳곳이 파손되어 있었고 몇 갈래 거대한 균열도 있었다. 제단의 모서리를 뒤덮은 빛은 바로 그 균열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마치 종이 하나에 표창이 하나 꽂혀 있는 듯한 모습으로 표창이 꽂힌 곳에 균열들이 있었다.
제단에서는 도고의 기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 기운은 보이지 않는 힘에 가로막힌 듯 멀리까지 퍼져 나가지는 못했다.
작은 언덕처럼 보이는 제단은 팔각형이고 사방에는 계단이 있었다. 각 계단은 꼭대기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이 꼭대기는 폭 1천 척 정도의 평평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수많은 검은색 문양이 아주 오래된 듯한 진을 하나 이루고 있었다.
진의 중앙에는 팔 하나가 있었다. 도고의 기운은 바로 이 팔에서 발산되는 것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수백 척 정도의 팔은 고정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듣는 것만으로 동정심이 절로 생길 정도로 무기력함과 슬픔이 가득 찬 비명이었다.
“이만 저를 놓아주십시오. 더 이상 해드릴 이야기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법보를 주신다 해도 할 이야기가 없다고요! 1백 년 넘도록 이야기만 하느라 입이 다 바짝 말랐습니다. 이제 한계라고요!”
비명과 함께 제단이 연결된 공간으로부터 뻗어 나온 거대한 균열에서 초췌한 낯빛에 두 눈이 퀭한 누군가가 고통에 찬 표정으로 힘겹게 빠져나왔다.
균열 안에는 보이지 않는 막이 있었지만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지 그는 곧 균열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뒤로는 일고여덟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두 소녀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무척 귀여운 두 아이는 각각 보라색과 푸른색 옷을 입고 있었다.
“하영, 놓아줄까? 조금 불쌍한데.”
푸른색 옷을 입은 소녀가 불쌍하다는 눈으로 다른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비명을 내지르던 사람은 그 말을 듣고 눈물을 쏟아냈다. 두 눈에는 겁이 잔뜩 어려 있었다.
“아가 이 사람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잖아. 불쌍하다고 생각할 것 없어. 이곳에 오자마자 우리를 위협했던 사람이라고.”
하영이라 불린 소녀는 균열 밖으로 몸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는 사람의 다리를 붙잡고 확 잡아당겼다. 울부짖던 사람은 다시 균열 안으로 쭉 끌려 들어갔다.
“탐랑, 얼른 방금 하던 이야기를 끝내. 망월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잖아. 마저 듣고 싶다고.”
아가라는 소녀는 미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탐랑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는 게 어때? 1천 년만 더 이야기를 해주면 그때 너를 보내줄지 말지 결정할게.”
다시 돌아오게 된 이 끔찍한 공간을 바라보며 흐느끼던 탐랑은 아가의 이야기에 더욱 서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어. 저, 저번에도⋯⋯ 똑같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전 정말로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니까요! 그리고 무, 물을 마시고 싶습니다.”
아홉 개의 태양
탐랑은 끝없이 후회하고 절망했다. 그는 계외에서 한제를 마주치고 마침내 악취에서 해방됐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계내와 계외의 전쟁이 발발했고 탐랑은 흥분했다. 자신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장에서는 더 많은 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수준도 더 높일 수 있을 터였다.
이에 계외 대군을 따라 운해성역에 들어온 뒤 몰래 이탈한 탐랑은 법보에 대한 직감을 따라 운해성역의 균열을 발견하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이곳에서, 그는 매우 격앙됐다. 아주 짙은 법보의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크하하! 그럼 그렇지! 아직 나는 행운이 따르는 사람이라니까!”
이번 행운으로 다시는 한제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는 강자가 되어 이전에 빼앗겼던 법보까지 되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희망과 야망을 품은 채 직감을 따라 움직인 탐랑이 발견한 것은 도고의 제단이었다.
제단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제단 한쪽 모서리에서 새소리와 꽃향기가 흘러나오는 세상을 보게 됐을 때 탐랑은 환호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수많은 선초(仙草)였다. 그중 일부는 오직 책을 통해서만 보았던 것이었고 다른 일부는 난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무거나 골라잡아 약을 만들어도 수준을 대폭 높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양도 어마어마해 침이 꿀꺽 넘어갈 정도였다.
선초뿐만 아니라 무시무시한 기운을 발산하는, 그러나 매우 유순해 보이는 선수(仙獸)들도 있었다. 이 선수들은 술래잡기를 하듯 놀고 있었다.
그 광경에 탐랑은 한층 더 흥분했다. 그의 경험상, 이런 선수들은 먼저 공격해오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린 시절 만났던 뇌룡처럼 애완동물로 삼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탐랑은 이런 광경에 몸이 떨려올 정도로 희열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잃고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는 우선 균열 밖에서 공간을 지키는 수련자가 있는지를 며칠간 자세히 관찰했다. 그러다가 두 소녀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며칠 만에 나타난 사람들이 아무 위협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두 소녀임에 탐랑은 광기 어린 웃음을 흘리며 망설임 없이 균열 안의 기이한 공간으로 들어갔다.
안쪽에는 막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다. 탐랑은 이 점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엄청난 행운을 타고난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이런 일을 적지 않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균열 안으로 들어온 그는 껄껄 웃으며 소매를 휘둘러 깜짝 놀라는 두 소녀를 가둬놓고는 잔뜩 흥분해 선초를 뜯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때의 선택이 평생 잊을 수 없을 만큼 슬프고도 비참한 경험의 시작이 될 것임을…
그는 두 소녀가 갇힌 채 나누던 대화를 똑똑히 기억했다.
“하영, 저 사람은 누굴까? 어떻게 갑자기 여기에 나타났지?”
“나도 모르겠어. 이상하네. 저 사람이 어떻게 우리 자양종(紫陽宗)의 사수계(飼獸界)에 들어왔을까?”
“미쳤나? 흉수들한테 먹일 풀을 왜 지가 먹고 있는 거지?”
한동안 멍하니 탐랑을 바라보던 두 소녀 중 아가가 이내 몇 걸음 걸어 나왔다. 소녀는 탐랑의 봉인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채 다가와 냅다 발길질을 했다. 탐랑의 비극을 알리는 신호가 된 발길질을…
탐랑으로서는 감히 반격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아가에게 걷어차인 것만으로도 모든 수준을 잃을 뻔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존재들이었다.
“드, 들려드리겠습니다! 지난번 말씀드렸던 그 잔인하고 추악하고 뻔뻔하고 거만한 악한 이한제가 바로 그 망월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탐랑은 슬픔과 서글픔을 애써 참으며 입을 열었다.
“이한제 그 사람, 정말 끔찍하네!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보라색 옷을 입은 하영이 코를 찡긋거리며 불쾌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영,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나와 박사님이 약초를 찾으러 밖에 나갔을 때 아주 기괴한 신식을 한 줄기 감지했다고. 난 그 신식과 이야기를 나눈 적도 있었는데 그 신식의 주인이 말하길 자신의 이름이 이한제라고 했어.”
★ ★ ★
탐랑이 힘겹게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을 무렵, 기이한 공간의 균열 밖 제단이 떠 있는 우주. 창백한 얼굴의 한제가 또 한 번 피를 토해 혈둔술을 발휘했다.
그의 뒤편 우주는 마치 타오르는 듯했다. 아홉 마리의 거대한 불새가 추격해오면서 뜨거운 작열감을 발산하며 온 우주를 진동시킬 정도의 위압감을 발휘했다. 그 뒤로는 일곱 색채의 빛과 함께 살기등등한 칠채도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어디로 도망치는지 보자. 네 도고의 육신까지 잿더미로 만들고 회복할 때마다 더욱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게 해주마! 네 원신과 혼백을 붙잡아 법보로 제련해 나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풀겠다!”
한제는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피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전신에 더욱 깊은 고통을 안겼다. 혈둔술을 펼치기 위해 뱉어내는 피마저 뜨거웠다. 그런 피를 담고 있는 그의 몸은 거대한 단로와도 같았다.
화염의 본원을 깨달은 한제조차 이런 상황을 해결하지 못해 더 악화되는 것을 지연시키는 게 고작이었다. 본원으로도 칠채도인의 신통술을 저지할 수 없었다.
그의 육신은 끊임없이 손상과 회복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고통은 점점 커졌고 이제 한제로서도 견디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한제는 이를 악물고 끊임없이 혈둔술을 이용해 질주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한제는 저 멀리 옥패 속 지도가 가리킨 곳에 떠 있는 제단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한제는 한 줄기 희망을 본 듯 곧장 제단으로 돌진했다.
같은 시각, 자양종의 사수계와 연결된 제단 모서리의 균열 안에서 탐랑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두 소녀가 한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틈에 몸을 날려 재빨리 균열 밖으로 튀어나왔다.
“드디어… 드디어!”
탐랑의 눈에서는 또다시 눈물이 흘러 나왔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쁨의 눈물이었다. 균열 밖 어두운 우주를 보자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밀려든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 멀리서 돌진해오고 있는, 타오르는 듯한 빛줄기와 그 주인공을 발견한 것이다.
“이… 이한제? 이한제!”
흠칫 놀란 탐랑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틀림없는 이한제였다.
“이, 이 독한 자식! 여,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하얗게 질린 탐랑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때, 한제는 제단 위에 도착했다. 그는 내려서기가 무섭게 비틀거리며 한 움큼 피를 토해냈고 탐랑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하지만 그는 탐랑을 내버려둔 채 곧장 돌아서더니 먼 곳을 내다보았다.
저 멀리서 타오르듯 일렁이는 우주에서 거대한 불새로 형성된 아홉 개의 태양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칠채도인이 짙은 살기를 품은 채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다가왔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온 우주가 진동했다.
“히익!”
탐랑은 안색이 변해 덜덜 떨며 물러났다. 칠채도인을 본 순간 죽음의 위기를 직감한 것이다.
‘이한제 이 녀석이 무시무시한 자를 건드렸구나. 저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탐랑은 다시 균열 속의 사수계로 돌아가려 했다. 차라리 사수계의 소녀들에게 천 년간 이야기를 해주는 편이 저 무시무시한 자와 마주하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한데 그때, 칠채도인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제단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곳이 네 종착점이냐? 그럼 이곳에서 널 제련해주마!”
칠채도인의 손짓에 아홉 개의 태양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한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뜨거운 열기가 세상 모든 것을 불살라버릴 것만 같았다.
제단 위에 가부좌를 튼 한제는 사방에서 달려드는 아홉 개의 태양을 보았다. 한데 그의 눈에 제단 위에 놓인 팔 한 짝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