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2
현라는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초대받지 않은 한제를 데리고 온 자신의 행태에 고도 대천존은 불쾌해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도고 일맥을 위해서이자 자신의 제자가 도고 일맥을 수호하는 데 아무런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도고 일맥은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부족이고 한제는 그가 평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거둬들인 제자다. 어떻게든 이 두 가지를 모두 지키고 싶었다.
한제는 그런 현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 넓지 않은 등이었지만 한제는 따뜻함과 든든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 1년 반 동안 내내 그와 함께했던 감정이었다.
‘난 고족에 어떠한 귀속감도 느끼지 않아. 이곳에 온 것은 그저 스승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 도고 일맥을 지키겠다고 한 것도 스승님을 위해서고⋯⋯.’
두 사람의 조용한 발소리가 고도산의 적막에 녹아들었다.
그렇게 꼭대기에 이르자 높은 탑이 보였다.
총 아홉 개 층으로 이루어진 탑 사방에는 네 개의 거대한 기둥이 있었고 그 기둥 끝과 탑 꼭대기는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었다. 한제와 현라가 이곳에 이른 순간 그 쇠사슬에 달린 수많은 방울이 바람을 맞은 듯 딸랑딸랑 흔들리면서 맑고 청아한 소리를 냈다. 이 소리는 심신으로 퍼져 모든 잡념을 씻어내고 체내 고족의 힘을 더욱 빠른 속도로 가동시켰다.
순간 한제의 안색은 약간 창백해졌다. 그는 자신의 수준이 강한 힘에 의해 제압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오직 고족의 힘만 제압되지 않고 오히려 강한 생기를 발산했다.
수준과 본원이 제압됨에 따라 몇 채의 산에 짓눌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된 한제는 급기야 숨까지 가빠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를 악문 채 현라의 뒤에 섰다.
네 개의 거대한 기둥 위에는 각각 한 사람씩 총 네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모두 중년으로 보이는 그들은 하나같이 몸 위로 회색 도포를 입고 있었고 시종일관 눈조차 뜨지 않고 있었다. 현라의 방문도 그들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했다.
“고도 대천존을 뵙고자 합니다.”
현라가 포권을 하며 탑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한제 역시 스승을 따라 포권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사방은 고요했다. 바람에 흔들린 방울만이 맑은 소리를 퍼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딸랑거리는 소리에 깃든 기이한 힘은 체내의 본원과 수준을 더욱 세게 억눌렀고 한제의 이마에서는 식은땀까지 배어 나왔다.
한참 뒤, 탑의 1층 문이 안쪽으로 열리면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머리카락이 없는 민머리 소년이었다. 기둥 위에 앉은 이들과 마찬가지로 회색 도포를 입은 소년은 탑 밖으로 나온 뒤 현라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주인님께서는 신유(神遊) 중이십니다. 현라 대천존께서는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덤덤한 표정의 소년은 매우 공손했다.
“알겠네. 여기서 기다리지.”
현라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제를 힐긋 본 소년은 곧장 시선을 거둔 뒤 현라를 향해 다시 한번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나 탑 안으로 돌아갔다. 열렸던 문은 천천히 닫혔다.
시간은 천천히 흘러 사흘이 지났다. 그동안 현라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힘들어하거나 짜증이 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고 여전히 공손한 태도였다.
그런 현라의 뒤에 선 한제에게 지난 사흘은 3년, 아니, 3백 년처럼 느껴졌다. 쉴 새 없이 울리는 방울 소리가 계속해서 그의 심신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선족으로서의 수준과 온몸의 본원은 당장이라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방울 소리는 마치 그에게 본원과 수준을 포기하고 고족의 힘만 가지기를 종용하는 것 같았다. 체내에 숨겨둔 한 방울의 혼혈이 그의 온몸을 돌고 있는 혈맥을 따라 퍼져 나가게 만드는 것이 그 목적인 듯했다.
현라는 덤덤하게 서 있긴 했지만 속으로는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고도 대천존이 자신을 밖에서 기다리게 한 것은 자신의 행태에 불만이 있기 때문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불만의 원천은 제자 한제의 체내에 존재하는 선족의 수준과 본원일 것이다.
고도 대천존은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는 고조의 혈맥을 가진 후손에게만 신경을 썼고 역대 고황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무엇보다도 고조의 혼혈에 집중했다. 허나 그렇다고 고조의 혼혈을 가진 사람의 체내에 선족의 기운이 존재하는 것까지 허락할 리는 없었다.
한제는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지난 사흘 동안 쉬지 않고 울려 퍼진 방울 소리는 그의 심신을 파고들어 콰쾅 하는 요란한 소리로 변함과 동시에 그의 수준과 본원을 억누르고 지우려 했다.
‘고족의 힘도 선족의 수준도 전부 이 이한제가 평생 힘들여 수련한 끝에 얻은 것이야. 이걸 잃을 수는, 고족의 힘만 가질 수는 없어!’
붉게 달아오른 한제의 두 눈에는 굳은 의지가 드러났다. 그는 방울 소리에 맞서는 중이었다.
한제 체내 선족의 힘 역시 그의 심신에 파고든 방울 소리를 흩어 없애려는 듯 끊임없이 충돌했다.
그때, 두 눈을 번득이던 현라가 몸을 홱 틀더니 한제가 방울 소리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도우려 했다. 어쨌든 한제는 그의 제자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때, 탑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이전의 그 소년이 나타났다.
“현라 대천존, 주인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이에 우뚝 멈춰선 현라는 한참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다가 끝내 오른손으로 한제의 미간을 두드린 다음에야 탑으로 향했다. 소년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한제를 살피더니 뒤로 물러나 탑으로 들어갔다. 문은 다시 닫혔다.
한편, 한제는 현라의 손이 미간에 닿는 순간 심신에 격렬한 콰쾅 소리가 울리면서 따뜻한 힘 한 줄기가 체내로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의 수준을 제압하지 않고 방울 소리에 맞서주었다.
덕분에 압박이 약간 완화되자 한제의 수준과 본원은 빠르게 응집되어 가동됐다.
현라가 주입해준 힘이 방울 소리에 맞서다가 점점 흩어지고 한제 체내의 수준과 본원이 빠르게 그의 온몸을 한 바퀴 돈 순간, 방울들이 또다시 흔들렸다. 이어서 딸랑딸랑 소리가 거친 파도처럼 한제의 심신에 다시 한번 몰아쳤다.
한제 체내의 수준과 본원은 그 위력에 다시 맞섰다.
한제는 피를 한 움큼 왈칵 토해내며 몸을 휘청거렸고 뒷걸음질을 치며 산꼭대기로부터 계단 위까지 밀려났다.
“선족의 수준을 씻고 본원의 힘을 지우고 과거의 기억을 잊은 뒤 혈맥 속의 유산을 각성하라. 그러면 널 도고 일맥의 수호자로 삼고 대천존의 능력을 줄 것이다!”
서늘하고 노련한 목소리가 한제의 심신 속에서 울려 퍼지는 방울 소리로부터 흘러나왔다.
한제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의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동시에 갑작스레 활성화된 그의 수준이 그가 가진 고족의 힘과 합쳐졌다. 그러자 한제는 찰나의 순간 현재 그가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강한 힘을 발휘했다.
“내게 선족의 수준은 없다! 내가 가진 것은 이 이한제가 지난 3천여 년간 모아온 내 자신의 힘뿐이다! 그런데 네가 무엇을 이유로 그것을 없애려 하느냐!”
한제의 낮은 포효와 함께 심신으로 파고든 방울 소리는 콰쾅 하고 울리면서 그의 수준과 충돌했다. 그는 다시 한번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뒤로 끝없이 밀려났다. 어느덧 수백 개의 계단 아래로 밀려나 고도산의 중턱에 이른 상태였다.
“내 본원은 내 삶에서 얻은 깨달음과 평생에 걸친 운명과의 투쟁을 통해 얻어낸 것이다. 그런데 네가 무엇을 이유로 그것을 흩어 버리려 하느냐!”
다시 고개를 쳐든 한제는 전보다 더 충혈된 두 눈을 번득이며 고도산 꼭대기를 향해 외쳤다. 그리고 그 말을 맺자마자 세 번째로 피를 토해내면서 붕 날아올랐고 그의 체내에서 포효하듯 울리는 방울 소리에 재차 밀려났다. 이제 거의 산 아래로 떨어진 그의 뒤로 남은 계단은 단 열아홉 개뿐이었다.
“내 기억은 수준보다 더 중요하고 본원보다 더 중요하며, 내 혈맥 속 유산보다 더 중요하다! 네가 약속한 대천존의 능력보다도 훨씬 더 중요하다! 네가 무엇을 이유로 그것을 잊으라 하느냐!”
한제가 목이 터져라 포효한 순간, 심신으로 파고든 방울 소리의 힘은 폭발하듯 콰쾅 하고 울렸다. 그리고 한제는 또다시 한 움큼 피를 토해내며 열여덟 걸음을 밀려났다.
마지막 계단 하나에 오른발을 디딘 그때, 한제는 체내에서 울리는 펑, 펑 소리와 함께 억지로 그곳에서 멈춰 섰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번쩍 쳐든 그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허나 그의 체내에 울리던 방울 소리의 위력은 완전히 제압된 상태였다. 덕분에 방울 소리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한제가 수준을 폭발시키자 그의 머리는 흑백으로 반씩 나뉘게 됐다.
그런 그의 뒤로 대천존 태양의 윤곽이 드러났다. 이 태양 역시 흑백으로 반씩 나뉜 채 기이한 빛을 번득였다. 그것이 등장하자 한제는 대천존에 비견할 만큼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 상태였다.
그 순간, 고도산 상공 바람과 구름의 기색이 변했다.
“고도산 꼭대기에 이르는 계단은 총 999개다. 만약 3백 번째 계단을 밟는 데 성공한다면 네놈의 불경스러움을 용서해주마!”
냉랭하고도 연로한 목소리가 산꼭대기의 탑 안에서 울려 퍼졌다.
산에서의 한 걸음
같은 시각, 탑 꼭대기. 온몸을 안개로 가린 채 가부좌를 튼 인영 앞에 현라가 서 있었다.
“고도 선배님⋯⋯.”
현라가 초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네 제자 녀석을 난 인정하지 않는다!”
안개로 가려진 인영이 냉랭하게 말했다.
“네가 데려왔으니 기회는 주도록 하지. 3백 번째 계단을 밟는데 성공한다면 네가 저 녀석을 데리고 떠날 수 있도록 해주마. 허나 녀석 체내의 혼혈을 각성할 수 있도록 돕지는 않을 것이야. 도고 일맥의 수호자 역할은⋯⋯ 너의 선택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이 순간부터 녀석은 고족 구역을 떠날 수 없다. 이를 어긴다면 내가 나서서 막겠다.”
안개 속 인영의 목소리는 매우 서늘했다.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것 같았다.
현라의 표정은 씁쓸했다. 한제에게 좋은 기회를 주고 싶어서 데리고 왔건만 고도 대천존으로부터 이런 대접을 받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침묵하던 그는 이내 결단을 내린 듯한 눈빛으로 안개 속 인영을 향해 포권을 했다.
“3백 번째 계단을 밟지 못한다면 그는 이곳에 남아야 할 것이야.”
안개 속 인영의 목소리에 현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한편, 고도산 아래, 마지막 계단 위에 선 한제는 고개를 들어 산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어쩌면 스승이 그곳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제야, 네가 발휘할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발휘해 3백 번째 계단을 뛰어넘어야 한다! 고도 대천존께 이 현라의 제자가 어떤 자인지 보여드리도록 해라!”
이때 산꼭대기에서 울려 퍼진 현라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분노가 어려 있는 듯했다.
현라의 목소리는 탑 꼭대기 층에서 흘러나왔다. 안개로 몸을 가린 대천존이 바로 앞에 있다는 사실도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저 녀석은 동부계에서 데려온 자입니다. 제가 이곳으로 데리고 왔지요. 그러니 저는 죽더라도 반드시 저 녀석을 데리고 갈 겁니다!”
뒤이어 곧장 안개 속 인영을 향해 돌아선 현라가 말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는 더 이상 상대를 향해 절을 하지도 않았다.
안개 속 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탑 꼭대기 층은 적막에 잠겼다.
한제에 대한 현라의 감정은 특별했다. 그는 동부계 안에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굳건한 의지와 결단력을 발휘하는 한제를 보았다. 심지어 모완이라는 여자에 대해 품은 한제의 깊은 연정도 그는 알고 있었다. 또한 동부계에서 아내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물을 쏟던 한제의 모습 역시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은 현라 자신을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한제가 선족 구역에서 보였던 모습들 또한 현라에게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처럼 느껴졌다. 오랜 세월 한제를 지켜보면서 그와 자신을 어느새 떼어놓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에 이르렀다.
한편, 한제는 귓가에 울리는 스승님의 목소리에 결단을 내린 듯 눈을 번득였다. 그는 이 고도산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고도 대천존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어떠한 존경심도 느끼지 않았다.
‘본디 강자가 약자의 운명을 통제하게 되어있는 법이지. 고도의 수준은 선강 대륙을 통틀어 가장 높아. 허나 언젠가 이 이한제는 더욱 강력해져 고도의 자리를 꿰찰 것이다!’
한제의 눈이 번득이자 그의 뒤로 나타난 대천존 태양의 윤곽이 밝은 빛을 뿜어냈다. 그 빛들은 일제히 한제의 체내에 녹아들었고 그러자 한제의 몸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뒤이어 한제는 발을 번쩍 들어 한 걸음 내딛었다.
이 한 걸음은 고족에 대한 한제의 첫 번째 반항이자 고족 구역에서 처음으로 낸 저항의 목소리이며 고족과 그 사이의 관계에 난 첫 번째 균열이었다.
원래 그는 고족 구역에 오래 남아 있을 생각이었다. 스승이 베푼 은혜를 생각해 도고 황제의 무릎을 꿇으라는 명령도 받아들였고 도무지 적응이 안 되는 황권도 인정했다. 지금도 더 참을 수는 있지만 한제는 자신과 고족 사이에 이미 거대한 균열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만약 이후로 다른 일이 벌어지지만 않는다면 이 균열은 스승인 현라 때문에라도 천천히 아물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회는 같은 시각 도고 황성에서 벌어진 한 사건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 ★ ★
도고 황성, 황궁. 도고 황존은 왕좌에 앉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보라색 옷을 입은 세 노인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꿇어앉은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