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531
‘내게는 약속이었다. 그러니 이 정도는 참을 수 있어!’
한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고 황존의 말에 담긴 뜻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지만 그는 몇 걸음 다가가 도고 황존의 옥패를 두 손으로 받아 들고 포권을 했다.
“감사합니다, 황존.”
이어서 한제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뒤로 물러나 현라의 옆에 섰다.
도고 황존은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더니 현라에게 포권을 했다.
“이만 물러나도록 하지. 오늘 자네 제자를 만날 수 있어 아주 기뻤어. 현존의 선택으로 우리 도고 일맥은 앞으로도 건재할 수 있겠군!”
현라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도고 황존은 소매를 휘두르더니 보라색 기운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그와 함께 모든 호위병 또한 현라에게 절을 올린 뒤 하나둘 도고 황존을 따라 떠나갔다.
하늘을 채운 보라색 기운도 사라지면서 모든 것이 원상태를 찾았다.
다음 순간, 황궁에 나타난 도고 황존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누각에 올랐다. 미소가 걸려 있던 입은 점점 더 크게 벌어졌고 그 사이에서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현라의 제자인들, 고조의 피 열 방울을 손에 넣고 혼혈까지 한 방울 가지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이한제 넌 결국 내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을! 이번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리 될 것이야!
이한제 네놈은 절대 나를 건드리지 못한다. 난 고도 대천존의 보호를 받고 있어. 현라가 환생에 돌입하면 난 네놈에게 내 권력으로 너를 죽이는 것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려줄 것이다! 으하하하!”
★ ★ ★
도고전. 현라는 복잡한 빛이 담긴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한제가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말했다.
“스승님, 제게 첫 번째 선물을 주신다고 하셨지요? 벌써 사흘이 지났습니다.”
한제의 덤덤한 모습에 현라는 심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동부계에서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었고 선족 구역에서는 백발 약천존으로 대천존 아래 최강자에 등극했던 너다. 허나 고족 구역에서는 황권이 지나치게 높아 고개를 숙이고 살 수밖에 없지. 이럴 줄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보니 네가 점점 힘들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현라가 유일한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생각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이곳에 오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부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강력한 황권을 가진 도고 황존이 저를 억압하고 제 무릎을 꿇리고 싶어 한다면 대전에서 그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동부계에서 스승님께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도고 일맥을 지키겠다고… 약속은 지켜야지요.”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한참 동안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던 현라는 이내 결단을 내린 듯했다.
“넌 내 유일한 제자다. 만약 이곳이 네게 적합하지 않다 느껴진다면 당시 약속은 잊어도 좋으니 마음대로 떠나도록 해라. 어떤 선택을 내리든,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가든 이 현라는 영원히 네 스승일 것이다!”
현라의 진심 어린 말에 한제는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 온기는 사흘 전 함께 마셨던 차처럼 마음을 풀어주었다.
한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하자. 이제 너를 데리고 몇 군데를 다닐 생각이다. 네 본원의 수련에 막대한 도움이 될 장소들이지!”
웃으며 소매를 휘두른 현라는 한제와 함께 하늘로 솟아 올라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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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고 일맥, 평천군(平天郡).
이곳은 산이라고는 없이 넓디넓은 평원뿐이었다. 그 위로 자라난 풀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이 평원의 북부에는 썩어 들어가는 듯한 기운을 풍기는 깊은 연못이 하나 있었다. 주위의 초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아 마치 있어서는 안 될 장소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곳은 내 이전 도고 일맥 대천존이 금제로 봉인해둔 곳이다. 덕분에 완전한 모습으로 보존돼 있었지. 내가 물려받았을 당시만 해도 후에 신술을 발휘할 수 있는 법보로 제련할 생각이었으나 네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게 이곳을 주도록 하마!”
현라는 전혀 아까워하는 기색 없이 말했다.
“이 연못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나는 깊은 연구 끝에 이곳이 이전에는 전투장이었을 거라는 결론을 얻었다. 어마어마한 살기가 담겨 있으니 네 살육 본원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떤 본원을 품고 있는 장소가 몇 군데 더 있다. 그곳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며 소개해주마. 대부분은 시고나 극고 구역에 있지만 이미 수백 년 전 네가 그곳에서 수련을 할 수 있도록 시고와 극고 대천존과 협의를 한 상태란다.”
현라는 한제를 바라보며 웃었다. 비록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한제는 그 협의를 위해 자신의 스승이 분명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렀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너를 데리고 우리 고족의 선조, 고도 대천존을 뵈러 갈 것이다. 그는 거의 항상 폐관수련을 하고 계신다. 난 너에 대해 당시 그에게 보고한 바 있다. 그러니 우리가 가면 폐관수련을 멈추고 너를 보려 하실 게야. 어쩌면 네게 아주 큰 행운이 될지도 모르지.”
현라는 자애로운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는 지난 수백 년 동안 한제를 위해 이미 여러 가지 준비를 해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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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의 산 안쪽 깊은 골짜기, 평원 위의 기이한 연못, 언제 지어졌을지 모를 거대한 지하 고분. 바로 현라가 한제를 위해 준비한, 도고족 구역 안의 장소였다. 한제와 현라는 이곳들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매우 짙은 살육의 기운이 어린 평원의 연못에서 한제는 3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현라는 그동안 내내 연못 밖에서 한제를 보호했다.
한편 겹겹의 산 안쪽 골짜기를 둘러싼 가파른 벼락에는 하나하나의 문양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금제가 담긴 문양들이었다. 그 금제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천천히 이 산골짜기를 도고 일맥 구역 중 가장 많은 금제가 있는 골짜기로 변모시켰다.
현라는 보통의 수련자는 발도 들일 수 없는 이 공간을 수백 년 전 봉인해두었다. 제자가 금제 본원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장소로 준비해둔 것이다.
한제는 금제로 둘러싸인 이 골짜기 안에서도 3개월 정도를 보냈다.
그런가 하면 도고장군(道古藏郡) 지하에는 매우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고분들이 있었다. 그 고분들 안에 묻혀 있는 것은 시체가 아니라 폐기된 법보들이었다.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전, 누군가가 이렇게 깊이 묻어둔 것으로 보아 제사에 사용된 것 같은 이 법보들은 이미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이곳은 법보들 덕분에 오행의 힘으로 뒤덮여 있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 오행의 힘은 점점 더 짙어지면서 천천히 본원의 기운까지 갖게 됐다.
이곳에서도 3개월을 보낸 한제는 아쉬움을 억누른 채 오행 본원의 흡수를 멈추고 현라와 함께 떠나갔다.
다음으로 향한 시고 구역에서 한제는 시고 일맥의 대천존을 보았다. 그리 시고 일맥이 차지하고 있는 열두 개의 군을 돌아다니며 세 군데의 장소에서 좌선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동안 다섯 달이 지나갔다.
극고 구역에서는 극고 일맥의 대천존을 보지는 못했지만 현라를 따라 반년 동안 곳곳을 방문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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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제가 도고 황성을 떠난 지 벌써 1년 반이 지났다. 그 사이 한제는 아무런 위험도 맞닥뜨리지 않았고 죽음을 피하려 아등바등하지도 않았다. 그저 더 많은 본원의 힘을 흡수하고 빠르게 수준을 높여나갔을 뿐이다. 그의 스승인 현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제는 현라가 자신을 진정한 제자로 대해주고 있음을 그의 태도에 어떠한 수작이나 계략도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언제나 집과 같이 따뜻한 빛이 어려 있었다.
평생을 통틀어 몇 번 없는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한제에게는 이러한 관계가 상대와 함께하는 이런 시간이 더욱 귀중하게 느껴졌다. 스승인 현라가 평생 바랐지만 쉽사리 누리기 힘들었던 평온하고 행복한 나날이 더없이 소중했다.
그는 이런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바랐다. 그러면 심지어는 도고전 앞에서 고황을 마주했을 때 느꼈던 위압감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승님께서 이토록 잘 대해주시니 반드시 도고 일맥을 수호해야지.’
한제는 언제나 이런 다짐을 되새겼다.
그는 은혜와 정을 중시했다. 현라가 동부계에서 그에게 베풀었던 은혜와 스승으로서 베풀고 있는 정은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런 현라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고도산(古道山) 꼭대기의 방울 소리
1년 반의 외출을 마치고 현라는 한제를 데리고 고도산(古道山)으로 향했다.
도고 구역, 시고 구역, 극고 구역의 경계에 서 있는 고도산은 고도 대천존이 머무는 곳이었다. 이 산이 성산, 혹은 성지라 불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도산 아래에 도착한 현라는 매우 공손한 표정으로 마치 일반인처럼 산꼭대기로 이어진 계단을 걸어서 오르기 시작했다.
하늘에 닿은 듯한 계단의 끝은 구름에 가려져 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그 흐릿한 윤곽에서 풍기는 짙은 위압감만은 느낄 수 있었다.
“고도 대천존을 뵙게 되거든 반드시 공손해야 한다. 고도 대천존은 선배님이야. 나 역시 그분 앞에서는 절을 하며 예를 갖춰야 하지.”
앞서 계단을 오르던 현라는 자애로운 얼굴로 한제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걱정 마십시오, 스승님. 잘 알겠습니다.”
한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수차례 들었던 당부였다. 현라는 한제와 별 차이 나지 않는 청년처럼 보였으나 마치 아이를 가르치는 어른처럼 반복적으로 잔소리를 하고 있었다.
“고도 대천존은 고조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배님이시다. 우리 고족의 수호자이기도 하지. 만약 그분이 없었더라면 우리 고족은 아주 오래 전 이미 선족의 손에 소멸됐을지도 몰라.”
현라는 고개를 들어 고도산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진심에서 우러난 존경심이 어려 있었다.
“선족 구역에 있었을 당시 여러 서적을 통해 고도 대천존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책에 설명된 바에 따르면 그분은 이미 대천존의 수준을 넘었다고 하더군요. 수준이 같은 대천존 여럿을 참살한 유일한 사람이라고요. 그런 강자라면 당연히 존중할 수밖에 없지요.”
한제는 계단을 오르며 조용히 말했다. 그의 눈빛도 고도산 꼭대기에 닿아 있었다.
“고도 대천존의 진정한 수준에 대해서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앞에 서면 꼭 내가 일반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되지.”
현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가벼운 한숨을 뱉어냈다.
‘고도 선배님은 대천존이 아닌 고족 사람은 결코 보려 하지 않으신다. 그저 새로운 고황이 선출될 때만 불러서 복을 빌어주시지.’
묵묵히 계단을 따라 걸으며 현라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과연 그분이 한제를 보려 하실지 확신할 수 없다. 당시 한제가 고조의 피 열 방울을 얻었고 그중 혼혈도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했으니 보시려 할 것 같기는 한데⋯⋯.’
산꼭대기에 가까워질수록 현라의 불안함은 점점 더 짙어졌다.
‘만약 고도 대천존이 한제를 만난다면 모든 일은 순조로울 거야. 고도로부터 확정을 받으면 도고 일맥 내 한제의 지위도 공고해지겠지. 그렇게 되면 한제에게 깊은 질투를 느끼고 있는 황존도 별다른 말을 하지는 못할 터. 허나 만약 고도 대천존이 한제를 보지 않겠다 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