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09
한제의 덤덤한 질문에 청년은 어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출구는 하나뿐이다. 화요군 안에 있지.”
말을 마친 그는 빛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림은 곧장 무너져 내렸으나, 그 그림을 이루고 있던 빛들은 배이라의 손에서 뭉쳐지더니 손가락 크기의 수정이 되었다. 배이라는 그 수정을 한제에게 던져주었다.
“이것을 가지고 가라. 신식을 통해 보면 내 시선을 빌려 조석의 심연 안을 살필 수 있지. 약속을 지켰으니 이런 선물 하나쯤 받을 자격이 있지.”
한제는 수정을 받아들고 공손하게 포권을 했다.
“고맙군.”
청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마워해야 할 쪽은 나야. 가봐, 난 폐관수련을 좀 해야겠군.”
한제는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져 용담을 떠났다.
배이라는 한제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기이한 눈빛을 번득였다.
“1백 년 후면 나머지 일곱 고요를 전부 융합할 수 있다. 그럼 이 배이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지. 고마 탑가 당시의 전투에서 네게 전공을 빼앗겼지. 1백 년 후 과연 얼마나 회복했는지 확인해주겠다. 그리고 저 녀석… 저 녀석의 심신에는 옅지만 매우 순수한 고신의 기운이 있다. 우리 고요나 고마들에게는 굉장한 자양제이나, 그 기운이 순수할수록 삼키기가 어려우니⋯⋯.”
그 기운을 떠올린 배이라의 심신이 살짝 경련했다.
“고신⋯⋯ 분리된 상태에서 대량의 힘을 얻는 종족⋯⋯. 저 녀석의 체내에 있는 기운으로 미루어 그 고신은 최소한 8성급, 어쩌면 9성급에 달할지도 모른다. 9성급 고신이라면 나와 고마가 손을 잡는다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지. 게다가 그 기운 깊숙이에는 숨겨진 의지가 존재한다.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나를 떨게 만들었지.”
배이라는 다시금 몸을 살짝 떨었다.
“오직 왕족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느낌⋯⋯. 그 기운 덕에 난 저자의 피를 통해 형체화하면서도 저자의 심신이 붕괴할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었지. 허나 당초 그자에게 했던 말과 달리 정말 고신의 기운을 가졌다 해도 그 기운에 황족의 의지가 들어 있지 않은 이상 내가 형체화하는 데 도움을 주지는 못했을 거야.”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는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 고마 탑가가 여태 살아남아 있으니 고신도 분명 그럴 것이다. 만약 그 고신이 그 수련자의 몸에 남겨놓은 기운을 삼켜버린다면 큰 화근을 남기게 되는 것이겠지. 하지만 내가 과연 그 유혹을 참아낼 수 있을까? 고마 탑가가 그 유혹을 참을 수 있을지 어쩔지도 모르는데⋯⋯.”
★ ★ ★
조석의 심연은 요령의 땅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곳이었고 요령의 땅 밖에 존재하는 바닷물의 근원이기도 했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량의 법보와 영석, 영수(靈獸)들은 요령의 땅에 흡수된 뒤 조석의 심연에 갇혔다.
그 조석의 심연 깊은 곳, 검은 안개 속에는 1천 척 너비의 광활한 땅이 있었는데 지금 그 땅에는 여러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중 한 중년 남자는 외모가 당당하면서도 어딘가 음험하고 악독한 느낌이 있어 전체적으로 야심만만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풍겼다.
그는 서리처럼 차가운 얼굴로 이 땅의 중앙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는데 그에게서는 짙은 죽음의 기운이 피어올라 사내 주위를 맴돌았다. 또한 오른손으로는 기이한 형태의 두개골을 쥔 채 끊임없이 쓰다듬고 있었다.
그가 두 눈을 뜨고 감을 때마다 보는 사람의 심신을 와들와들 떨리게 만드는 음침한 눈빛이 드러났다.
그 곁에는 남색 도포를 입은 네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등에는 거대한 검을 메고 있었고 표정 또한 모두 똑같이 음침했다.
바로 이때, 먼 곳에서 검은 안개가 용솟음치더니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와 이들 앞에서 멈추었다. 그 역시 남색 도포를 입고 등에는 커다란 검을 멘 채였다.
“탐랑 선배님, 전방의 마수들이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중앙에 앉은 중년 남자는 다름 아닌 탐랑이었다.
그는 차게 코웃음을 친 뒤 말했다.
“내가 이곳을 얕잡아봤구나. 이곳의 마수들은 모두 우주에서 끌려와 이곳에서 기이한 변화를 겪었으니 당연히 강할 수밖에 없는 것을.”
“선배님, 저 마수 녀석들은 수도 너무 많고 굉장히 사납습니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대체 무슨 마수들인지 생각이 나지를 않습니다.”
곁에 앉아 있던 대나검종의 제자가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탐랑은 그를 힐긋 바라보았다. 저자가 대나검종의 제자들에게 얼마나 존경받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의 정체는 대나검종의 대사형인 진룡이기 때문이다.
진룡은 검존 능천후의 애제자로 생각이 매우 깊었고 숨기고 있는 수준은 심지어 탐랑 자신도 몇 번이나 자세히 살펴야만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겉으로는 영변기 후기인 척하고 있지만 실제적인 수준은 문정기 초기에 이르러 있었다. 검초십이자 중 수준이 가장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문정기 중기에 달하는 축우도 진룡에게는 매우 공손했다.
진룡의 말에 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마수들이다. 무한한 우주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생명체가 있으니, 어찌 한낱 수련자가 모든 생명를 알고 있겠는가. 특히 저 마수들 역시 5천 년에 한 번씩 이곳으로 끌려온 것일 테니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될지 가늠할 수도 없다.”
그 말에 진룡도 고개를 끄덕였고 다른 대나검종의 제자들도 입을 다물었다.
“키야아!”
그때 날카로운 포효가 들려왔다. 검은 안개의 가장자리에는 출구가 있었는데 그곳은 현재 시커멓고 거대하면서도 예리한 주둥이를 가진 마수들이 날개를 퍼덕이면서 빽빽하게 포위하고 있었다. 마수들의 붉은 눈에서는 음산한 빛이 번득였고 긴 주둥이는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정도로 끔찍했다.
만약 한제가 이 마수를 봤다면 단박에 흡혈 마수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허나 이들의 몸은 자금색이 아닌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신후의 육신은 이미 저 마수들이 삼켜버렸고 그 원신도 달아나지 못했습니다.”
오마가 풀죽은 모습으로 말하는 것을 보며 진룡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검초십이자 중 죽은 말양과 밖에 남아 있는 자서, 그리고 해저를 제외한 아홉은 모두 탐랑을 따라 이곳 조석의 심연으로 들어온 상태였다.
탐랑은 온 요령의 땅을 통틀어 이곳에 가장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했고 그 말에 진룡을 제외한 나머지 대나검종 제자들은 마음이 크게 동했다.
그들은 값진 법보와 각종 기이한 물건들이 요령의 땅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직접 본 이들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들어온 목적은 고요의 유산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각종 법보와 기이한 물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줄곧 냉철했던 진룡은 뭔가 불안했지만 탐랑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대신 약간의 꾀를 부려 세 사람을 따로 뽑아 축우로 하여금 대열을 이끌게 한 뒤 다른 방향에서 진입하여 계속 연락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한 자서와 해저를 밖에 남겨둔 것도 진룡의 계획이었다.
처음 조석의 심연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움은 탐랑이 어느 동굴에서 뭔가를 가지고 나온 뒤로 급변했다.
그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기이한 마수들에 포위되어 이곳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곳에 갇힌 지도 이제 물경 1백 년에 이르렀다.
1백 년… 길다면 길지만 그들에게는 순식간이었다.
밤낮의 구분이 없는 이 심연의 검은 안개 속에 갇힌 그들이 밖으로 나가려고만 하면 수많은 마수가 여지없이 포위했다.
신후는 처음으로 그 마수들을 상대로 공격을 고집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죽기 직전 검존이 준 검기를 사용하여 몇몇 마수들을 죽이기도 했지만 마수가 너무 많아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진룡은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검기를 합친다고 해도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진룡은 조용히 탐랑에게 다가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네 명의 대나검종 제자들도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탐랑을 포위했다.
탐랑은 거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보게들, 지금 뭐하자는 겐가?”
“선배님이 그 동굴에서 뭘 가지고 나오셨는지 우리도 알 자격이 있습니다.”
진룡의 차분한 목소리에 탐랑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알 자격이 있다? 좋다. 보여주지.”
말을 마친 그는 저물대에서 타원형의 알을 하나 꺼냈다.
그 알에서는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죽음의 기운으로 뒤덮여 있을 뿐이었다.
탐랑의 공법은 죽음의 기운과 관련 있으니 그가 수련하는 데 이용하려고 저 알을 가지고 왔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진룡은 탐랑이 그 동굴에서 발견한 것이 정말 저 알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능천후의 면을 보아 이번에는 너희의 불경한 행동을 용서해주겠다. 허나 또다시 이런 행동을 취한다면 그때는 절대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탐랑이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대나검종 제자들의 귀에는 청천벽력처럼 우렁찬 호통이었다. 진룡을 제외한 나머지 제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숙인 진룡은 살기 어린 눈빛을 감추며 공손하게 말했다.
“이해하십시오. 마음이 급하여 그렇습니다. 이곳에 갇힌 지도 벌써 1백 년이 다 되어가지 않습니까?”
“급할 것이 뭐가 있느냐. 1백 년 후면 너희 스승이 이곳에 올 것이고 그럼 너희들도 이곳에서 나가게 되지 않겠느냐.”
탐랑은 두 눈을 감은 채 느릿하게 말했다.
진룡은 말없이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이전부터 탐랑에게 석연찮은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탐랑은 마치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진룡은 궁금했다.
적계 소속
한편, 그 무렵, 한제는 빠른 속도로 화요군에 있는 조석의 심연 출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조석의 심연에 대해서는 요석설을 통해 들은 바 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천운자 등이 눈이 벌게지도록 찾아 헤매는 그 영패도 지금은 조석의 심연에 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었을 때, 한제는 1백 년 전부터 행방이 묘연해진 탐랑과 대나검종 제자들이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만약 그들이 그곳에서 이미 나왔다면 상관없지만 아직 그곳에 있다면 한제는 유일한 출구에서 그들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해놓을 생각이었다.
한제는 수정에 기록된 위치를 향해 나이술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그 기이한 공간에서 회색 인영과 합체되었던 장면이 떠올랐다.
회색 인영이 발휘하던 신통술은 살육 선결이었다. 그리고 그 인영과 합체된 순간, 한제는 마치 살육의 기운이 1백만 개에서 1천만 개로 늘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1천만 개에 달하는 살육의 기운은 곧장 생의 낙인이 되어 한데 모여들더니 하나의 기이한 결인을 이루었다.
허나 그 결인은 한제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곧장 그의 미간에 찍히더니 그대로 그의 육신으로 파고 들어가 원신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그리고 원신 안의 원기와 융합되어 기이한 전환을 일으켰고 곧장 원신과 한제의 육신 사이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그 후 한제의 원신은 잠시 동안 녹아내려 그 낙인에 모조리 흡수되었고 이어서 육신의 생기 또한 한 줄기 회색 기운이 되어 흡수되었다.
한제는 제삼자처럼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순간 한제가 바라보는 자신의 눈에는 짙은 한기와 하늘을 뒤덮을 듯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원신과 육신을 흡수한, 1천만 개의 살육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낙인은 마치 그의 육체에 기생하며 모든 양분을 빨아먹는 벌레 같았다.
모든 흡수를 마친 낙인은 피비린내를 풍기며 느릿하게 한제의 육체로부터 빠져나오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살육의 기운이 되었다.
그야말로 진정한 살육의 기운이었다.
한참 지난 일임에도 한제는 아직까지 그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한제는 당시 일의 진위 여부를 판단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절대 거짓은 아닐 것 같았다. 당시 어떤 신통력에 큰 성공을 거두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만약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난 사람이었다면 그 깨달음을 기반으로 많은 연구와 수정을 통해 자신만의 신통력을 창조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은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한제의 자질은 근 8백 년에 이르는 수련과 신체의 탈변을 통해 많이 늘어난 상태였지만 고요가 자신이 본 최고의 자질이었다고 평한 허은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한제는 비록 자신만의 신통력을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예리한 관찰을 통해 짧은 시간에 그 기이한 공간 안에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과감하게도 막 사라지려 했던 회색 인영과 빠르게 합체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