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81
한제는 조용히 병풍을 살폈다. 그냥 보기에는 너무도 평범해 일반인의 집에나 걸려 있을 법했다.
그 위에 붙은 산수화는 약간 흐릿했지만 오래 들여다볼수록 또렷해졌다. 다만 지금은 산과 강 사이에 왼쪽으로 기운 균열이 하나 있어서 눈에 상당히 거슬렸다.
병풍에 찍힌 신식의 낙인은 일찍이 고대 신의 손가락에 붕괴한 상태였다.
한제는 병풍에 손을 얹어 자신의 낙인을 남긴 후, 병풍을 한 줄기 하얀 빛으로 만들어 원신에 흡수해버렸다. 그리고는 원신이 가진 천둥번개의 힘으로 병풍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왕관을 살펴보았다. 고대 신의 손가락에 직접적인 공격을 당했음에도 왕관에는 흠 하나 남지 않았다.
한제는 왕관을 받쳐 들고 신식으로 살폈지만 어떤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일반인 황제가 쓸 법한 외관 외에 특별한 점은 없었다.
다만 왕관에 박힌 다섯 개의 구슬은 한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제는 그 구슬들을 본 순간, 그 안에 오행의 속성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오행의 속성은 홍접이 가지고 있던 오행의 영체와 비슷했지만 그보다는 더욱 또렷한 영성(靈性)을 가지고 있었다.
한동안 고민하던 한제는 왕관을 머리에 얹어 보았다.
그 순간, 기이한 힘이 정수리에서 솟아올라 한제의 몸을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정수리 안으로 돌아간 뒤로는 아무런 기척도 하지 않았다.
한제는 왕관을 벗고는 기이한 눈빛으로 다시 자세히 살폈다.
“방금 그 힘은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한데 체내를 맴돌 때, 마치 뭔가를 찾는 듯했지. 결국 무엇도 찾지 못하고 되돌아갔지만 대체 뭘 찾는 거지? 흠… 오행의 구슬이 찾는 것이라⋯⋯. 설마…?”
한제는 몸을 가늘게 떨었다.
“오행의 영체⋯⋯ 홍접!”
한제는 저물대에서 매우 아름다운 남색 장미 한 송이를 꺼내 들었다. 이 장미는 손에 쥐자마자 남색 빛을 부드럽게 발산했고 마치 장미가 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서늘한 기운도 발산됐는데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고고함도 배어 있었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느낌은 수련자들만이 원신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한제는 장미의 고고함을 또렷하게 느꼈고 그 장미로부터 피어오른 냉랭하고 도도한 누군가의 흐릿한 형상도 볼 수 있었다.
한제는 그 장미를 왕관 아래에 놓았다. 그리고 장미에 닿은 순간, 왕관에 박힌 구슬 다섯 개는 눈부신 빛을 발했다. 동시에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왕관에서 발산되어 장미에 흘러들었다. 이이서 장미가 서서히 흩어지더니 푸른 빛으로 부서져 왕관 안에 녹아들었다.
“이게 무슨…?”
한참 뒤, 왕관은 푸른 빛을 발산했는데 그 빛은 곧 수그러졌다.
한제는 말없이 왕관을 들어 자세히 살폈다. 그러던 중 무언가를 깨달은 듯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왕관의 영성(靈性)이 이전보다 더 늘어나 있었다. 또한 왕관 안에서 누군가가 칼춤을 추고 있었다.
“고대 신의 손가락을 통한 공격으로도 전혀 손상되지 않은 걸 보면 분명 범상치 않은 존재야. 그러나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탐랑은 일반인의 제왕 9999명을 죽여 통제할 수 있게 됐다고 했는데⋯⋯.”
한제는 다시 고민에 잠겼다.
“제왕의 혼과 오행의 영체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거지? 설마… 이 왕관의 옛 주인이 오행의 영체를 가지고 있던 제왕인가?”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답을 알아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사실 이 왕관을 만든 재료에 대해서도 용골염(龍骨炎) 외에는 알 수가 없었다. 용골염도 고대 신 서사의 기억 덕에 알아낸 것이었다.
확실한 것은, 이 왕관은 매우 오래된 물건임이 분명했다.
이내 한제는 왕관을 저물대에 집어넣은 뒤 다시 망월의 뼈로 시선을 돌렸다.
망월의 뼈는 천역주에 흡수되면서 금염의 광맥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
★ ★ ★
순식간에 세 달이 흘러갔다. 그동안 이곳에 접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망월의 뼈는 금염의 광맥을 모두 잃고 이제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한제의 우려와 달리 망월의 뼈 반쪽만으로도 천역주의 금속 속성은 가득 찼다.
천역주는 수정처럼 화려한 빛을 번득였고 태고의 기운을 가득 풍겼다. 그 표면에서는 오행의 힘이 서로 교차했고 그 힘에 천역주는 천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한제는 떨리는 눈빛으로 천역주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손가락 끝을 깨물어 신식의 낙인을 섞은 피 한 방울을 곧장 천역주 쪽으로 튕겨 보냈다. 그리고 피가 천역주에 흡수된 순간…
“헛! 이게 대체…?”
한제는 심장이 덜컥했다.
마치 원신 안에 뭔가가 하나 더 늘어난 듯한 느낌을 받았고 동시에 심신에서는 노련한 기운이 가득한 문양 하나가 떠올랐다.
가득 찬 천역주
허공에 둥실 떠오른 천역주를 바라보던 한제의 눈빛이 결연하게 변했다.
1천 년을 기다려온 끝에 마침내 천역주의 오행 속성을 가득 채운 순간이었지만 한제는 더욱 신중하고 냉랭해졌다. 천역주는 아주 오랜 시간 함께한 존재였지만 사실 그는 천역주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제는 결인을 그린 두 손을 합장하더니 방금 심신에 나타난 문양을 한 획씩 그려냈다. 문양은 상당히 복잡했고 획 하나하나마다 짙은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획이 더해짐에 따라 문양은 한제 앞에서 천천히 완성되어 갔다.
순간, 전에 없이 노련한 기운이 느껴졌다. 당시 산마가 한제의 몸을 빌려 천환성의 혼을 뽑아냈을 때 느껴졌던 노련한 기운도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기운이 퍼져나가면서 수련성의 생기는 제압됐고 대지는 균열과 함께 천천히 먼지로 변해갔다.
한제는 깊은 숨을 들이마시며 문양이 형성된 순간 두 손으로 문양을 내리쳤다. 문양은 앞으로 둥실 떠가더니 천역주 위로 떨어졌다. 그러자 한 줄기 보라색 빛이 천역주에서 발산됐다. 그 빛이 얼마나 짙은지 한제는 눈을 똑바로 뜰 수도 없을 정도였고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선위는 온몸에서 썩어가는 듯한 기운을 풍기며 육신이 빠르게 무너져 내렸다.
화들짝 놀란 한제는 선위를 자신의 그림자 안으로 거두었다. 그제야 선위는 붕괴를 멈추었지만 썩어가는 기운은 여전히 피어올랐다.
만약 한제가 주위를 맴돌던 세 개의 주요 혼백을 재빨리 존혼번 안으로 거두지 않았다면 그들 역기 순식간에 썩어서 무너져 내렸을 것이 분명했다.
보라색 빛은 느릿하게 퍼져나가면서 수련성 전역을 뒤덮었고 부패의 기운은 정점에 달했다. 수련성 전체가 이 부패의 기운 아래 느릿하게 와해되고 있었다.
보라색 빛은 계속해서 확산되어 심지어는 수련성 바깥을 두른 자갈층까지 감쌌다. 그러자 자갈들 또한 무너져 내리면서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마치 온 세상에는 한제와 천역주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끔찍한 보라색 빛에 영향을 받았다.
이 기이한 광경에 한제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천역주의 속성이 가득 찼을 때 어떤 효력을 발휘할지 여러 가지로 추측을 해보았지만 이런 변화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보라색 빛은 확산을 멈추었고 그 안에 드리운 오행의 힘은 대부분 흩어져 지난 1천 년 동안 모았던 힘 중 거의 반을 써버린 상태였다.
콰르릉!
그때, 하늘을 가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커다란 보라색 문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문이 어찌나 거대한지, 그 앞에선 한제가 개미와 같은 미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보라색 빛이 퍼져 있는 사방에서 한 줄기의 금제가 형성됐다. 그리고 한제는 이 금제를 보자마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금제 안쪽에는 어떤 생명도 진입할 수가 없었다.
이 보라색 빛이 미친 범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신통력으로 인해 나천성역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다른 곳과는 아예 분리된 것 같았다. 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문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 거대한 문을 바라본 한제는 심신이 진동하는 느낌과 동시에 경외심을 느꼈다. 이는 일종의 두려움이기도 했다.
한제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도념은 두려움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본능이었기에 억지로 잠재울 수도 없었고 차원이 다른 존재로부터 느껴지는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그로서는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었다. 망월과 마주했을 때에도 놀라기만 했을 뿐, 지금처럼 일말의 저항심도 생기지 못할 정도로 영혼이 떨리는 느낌까지는 받지 않았다. 지금 저 거대한 문을 바라보는 느낌은 마치 일반인 소년이었을 당시 대산 봉우리 아래에서 저 높은 곳에 우뚝 선 문파를 봤을 때 느낀 경외심과 같았다.
심지어 요령의 땅에 들어와 문정기 수준에 이르면서 천벌에 맞서야 했을 때조차 자신의 도와 집착으로 그 천벌에 꿋꿋이 저항했던 한제였건만 지금 어떤 위엄도 느껴지지 않는 저 문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요동쳤다.
‘절대 굴복할 수 없어!’
한제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몸이 덜덜 떨리면서도 한제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꼿꼿이 들었다. 대산파에 입문하기 위해 산에 오르는 과제를 받았을 때, 온몸이 피 칠갑이 되어서도 끝까지 포기 않았던 그때처럼…
한제는 영혼을 통해 밀물처럼 전해지는 두려움에 당장이라도 굴복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천역주 안에서 모완과 이평의 영혼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가 이 두 영혼을 해치는 것만큼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천역주, 내가 널 가득 채웠다. 하늘이 나를 해하려 한다면 나 역시 하늘을 소멸시킬 것이고 네가 내게 반항한다면 난 너를 부술 것이다.”
한제의 목소리는 마구 떨렸지만 그 안에는 불굴의 의지가 배어 있었다.
불굴의 의지를 담은 도가 태고의 뇌룡과 같은 한제의 원신을 이끌었다.
콰르릉!
천둥번개가 한제의 체내에서 미친 듯이 흘러나와 육신으로 퍼져나갔다.
한제의 몸에 흐르던 전광은 그의 두 발을 타고 고리 형태를 이루며 떠올랐다. 지금의 한제는 뇌선(雷仙)과도 같았다.
한제는 천둥번개의 힘을 장악하고 있었다. 천둥번개에 배어 있는 불굴의 의지 역시 한제가 가진 집착의 도였다.
대지가 무너져 내렸지만 한제는 꼿꼿이 서서, 영혼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불굴의 의지가 담긴 눈으로 거대한 문을 주시했다.
돌연 나타난 거대한 문은 보라색 빛으로 뒤덮여 있어 꼭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았다. 보라색 빛은 점점 짙어지면서 거대한 팔이 되더니 그 거대한 문밖에서 한제를 향해 손짓했다. 한제는 그 거대한 팔이 고대 신의 것이 아님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고대 신의 피부는 거칠고 세밀한 주름이 가득했다. 하지만 저 팔은 매끄러웠다. 노련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보아 신통력으로 만들어진 존재 같았다.
팔은 한제를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남편을 부르는 아내처럼 부드러운 그 손짓은 몇 번이고 반복됐다.
또한, 그 거대한 팔에서는 어떤 위험한 느낌도 없었다. 그저 문 안쪽으로 오라고 손짓할 뿐이었다.
하지만 한제는 온몸에서 털이 쭈뼛 섰다. 천역주의 오행 속성을 다 채웠을 때 이렇게 기이한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한제는 가만히 서서 서늘한 빛이 번득이는 눈으로 그 팔을 바라보았다.
손짓은 변함없이 묵묵하게 한제를 불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뒤쪽의 거대한 문이 금세 사라질 것처럼 천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다시는 그 안으로 들어갈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제길, 어쩔 수 없지.’
한제는 이를 악물고 몸을 날리면서 한 손으로는 망월의 뼈를 챙겼다. 비록 그 안에 들어 있던 금염의 광맥은 사라진 상태였지만 여전히 단단하고 튼튼했다.
“하앗!”
한제는 낮게 기합을 내지르며 온몸의 선력을 손에 응집시킨 뒤 하늘을 향해 팔을 세게 휘둘렀다.
산맥과도 같은 망월의 뼈가 곧장 대문을 향해 날아들었다. 그러자 한제를 부르던 거대한 팔이 살짝 방향을 틀어 망월의 뼈를 잡아챘다. 그러더니 엄청난 기운을 발산하며 뼈를 쥔 손에 힘을 주었고 그 힘에의해 그토록 단단했던 망월의 뼈는 끝에서부터 다른 쪽 끝까지 전부 무너져 내려버렸다. 그 모습에 한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콰르릉!
그 한 번의 손짓으로 일으킨 엄청난 힘에 하늘과 땅을 비롯한 주위의 우주가 갈라져 나갔다. 수련성 여기저기 셀 수 없이 많고 거대한 균열이 일었고 수련성 밖의 자갈층에서도 대대적인 균열이 일어났다. 보라색 빛으로 이루어진 금제 바깥쪽의 자갈 역시 그 힘에 이끌리듯 계속해서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