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07
그리고 그 백옥병과 사도환은 한제와 백의의 여인이 있는 곳으로 점점 다가왔다.
그때, 한제의 두 눈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살짝 번득였다.
그 백옥병은 매우 빨라, 눈 깜짝할 사이 백의의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작은 병은 느릿하게 여인의 손으로 들어가는 듯하더니 이번에도 펑 하고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갈라져 곧장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이 모습을 본 사도환은 몸을 훌쩍 날리며 크게 외쳤다.
“한제야, 가자!”
한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청상과 선옥탑을 챙겨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사도환은 뒤로 물러나면서 두 손으로 결인을 그리더니 아래쪽으로 손을 뻗었다.
“선술, 공렬(空裂)!”
사도환의 외침에 전방의 허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펑! 펑!
요란한 소리가 이어지면서 허공에 나타난 수많은 회오리가 곧장 백의의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그 틈을 타 사도환은 뒤로 내달리며 한제와 함께 선부의 출구로 향했다.
그 무렵, 백옥병의 조각들은 여인의 얼굴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하지만 여인의 눈길이 닿자 우뚝 멈춰버렸다.
여인은 여전히 덤덤한 얼굴로 가볍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도환의 선술로 소환된 수많은 회오리들은 기이하게도 그 여인의 몸을 곧장 관통할 뿐, 그녀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너,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이냐?”
백의의 여인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며 차게 물었다. 냉랭한 목소리이긴 했지만 살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던 한제는 아주 짧은 고민을 끝내고는 이내 결심한 듯 몸을 멈추고 여인을 응시했다.
사도환 역시 긴장한 얼굴로 멈춰 섰다. 혼자서 보물을 찾던 그는 곧 한제가 있는 곳에서 강력한 위기감을 느꼈다. 특히 부풍자 등이 패배하여 사라졌을 때에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한제를 두고 도망칠 수 없었던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계획을 세운 후 한 번의 기회를 기다려왔다.
“저희가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다는 겁니까?”
한제가 포권을 하며 조심스레 묻자 백의의 여인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렸다.
“따라와라.”
말을 마친 그녀는 몸을 살짝 띄우더니 대전 쪽으로 향했다.
사도환이 한제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조금 이상한 사람이구나!”
“오지 않을 생각인가?”
벌써 대전 앞에 이른 여인이 안쪽의 어둠으로 스며들며 말했다.
한제는 선뜻 따라 나서지 못하고 잠시 망설였으나, 청상의 시체를 봤을 때 여인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결심을 굳혔다.
“선배님, 저 혼자 가보겠습니다!”
사도환은 자신까지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방법이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한제의 말에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와 한제 사이에는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었다.
한제 역시 그 말을 끝으로 곧장 대전으로 들어섰다.
대전 안은 어두웠다. 육안은 물론 신식에도 영향을 미치는 어둠이라 신식을 펼쳐도 반경 수십 척 너머는 살필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도 대전 곳곳에서 거대한 검은 그림자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조각상 같기도 했지만 어둠 때문에 확실하게는 살필 수가 없었다.
대전 안은 무척 고요해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미약한 발소리뿐이었다. 그 발소리를 통해 백의의 여인이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때, 발소리가 우뚝 멈추더니 흐릿한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이름이 무엇이냐?”
“이한제입니다.”
한제가 답했다.
“이 씨라⋯⋯.”
여인이 중얼거렸다.
“정말 이 씨였군.”
의미를 알 수 없는 그 말을 끝으로 대전은 다시 적막에 휩싸였다.
화비(花妃)
한제는 내심 경계심을 잔뜩 드높인 상태였다. 체내의 원력도 전부 가동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반격할 준비를 마쳤다. 심지어 미간의 세 번째 눈에 담긴 본원의 힘을 곧장 방출할 수 있도록 해두었다.
평소라면 이렇게 경계심을 발동해야 할 정도의 위험은 피하는 것이 한제의 성격이었지만 위험하더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피하지 않는 것 또한 한제의 모습이었다.
그때, 여인이 오른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빛이 나타나더니 마치 어둠 속의 반딧불처럼 순식간에 사방을 뿌옇게 밝혔다.
‘헛!’
그제야 대전 내부를 확인한 한제는 찬 숨을 들이마셨다.
대전의 광경은 마치 도교 사원 같았다. 거대한 아홉 개의 조각상이 있었는데 그중 여덟 개는 사방에 나머지 하나는 중앙에 놓여 있었다.
중앙의 조각상은 무엇으로 조각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은은한 금빛을 발산했다. 다만 그 빛은 매우 옅어서 어둠에 그대로 흡수되어 버려 조각상 안에만 온전히 남아 있었다. 덕분에 조각상에서는 기이한 느낌이 풍겼다.
자세히 보니 한 중년 사내를 본뜬 조각상이었다. 용맹하고 당당한 외모의 사내는 두 눈이 깊었고 그가 입은 황의(黃衣)에서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귀태(貴態)가 흘렀다. 그 옷에는 아홉 마리 용이 보라색으로 수놓아져 있었는데 용들은 하나같이 사납고 매서워 보였다.
그의 아래로는 뭉게뭉게 피어오른 구름이 조각이 되어 있었다. 다만 그 구름의 검은색으로 이를 밟고 선 사내의 위엄을 한층 더 드높여주었다.
그 조각상의 두 눈을 본 순간, 한제는 머릿속에서 쾅 하고 터져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상상할 수도 없는 기운이 그에게 훅 끼쳐오는 것만 같았다.
생을 통틀어 느껴본 가장 강한 기운이었다. 청수도 염뇌자도 천운자도 이런 기운을 풍기지는 못했다. 심지어 나천성역에서 마주쳤던, 세 번째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이는 노인의 기운 역시 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력한 기운이 가진 무형의 충격에 몸을 바르르 떨던 한제는 피를 왈칵 토해냈고 몇 걸음을 뒤로 떠밀려갔다.
체내의 원력을 가동하려 했지만 놀랍게도 원력은 오히려 수축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압력이 체내의 원력을 억누르고 있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세상의 원력도 이 조각상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한제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고 자신의 심장이 쿵쾅대는 요란한 박동소리 밖에 들을 수 없었다. 온몸의 피는 흐름을 멈춘 것 같다가 다음 순간 발작하듯 한제의 심장으로 몰려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이 한제를 바닥에 꿇리고 이 조각상의 위엄에 굴복하게 하려는 것만 같았다.
허나 한제는 이를 악물고는 붉은 눈빛을 번득였고 체내에서는 고신의 힘이 솟아올랐다.
고신은 하늘을 존경하지도 도의 법칙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거스르는 것이 그들의 습성이었다. 하물며 조각상이 어떻게 고신을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고신의 힘이 온몸으로 퍼져나간 순간, 한제는 꼿꼿이 선 채 두 눈을 번득이면서 다시 한 번 그 조각상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마음속에서 콰르릉 하고 울려 퍼진 진동이 온몸으로 전달되었다. 한제는 바르르 떨면서도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이 세상에 고신을 굴복시킬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천도도 규칙도 그럴 수 없다. 당연히 네게도 굴복하지 않겠다!’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급속도로 회전하면서 그의 체내에서 펑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 퍼졌다 비록 진정한 고신처럼 불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육신의 강도는 끊임없이 압축되면서 증폭됐다.
한제는 산봉우리처럼 우뚝 서서 불굴의 의지를 남김없이 뿜어냈다. 그리고 그 불굴의 의지는 조각상에서 흘러나오는 위압감에 대항했다.
어느새 나타난 파문이 대전 안에 퍼져나가면서 한 차례 폭풍을 형성했고 대전을 휩쓰는 폭풍의 기세에 한제의 몸은 다시 뒤로 밀려나갔다.
‘굴하지 않겠다!’
속으로 기합을 내지른 한제는 밀려나던 몸을 가까스로 멈춘 뒤 다시 한 번 조각상을 바라보았다. 순간, 그는 조각상이 살아 있는 것처럼 자신을 냉랭하게 쳐다보고 있다는 착각을 느꼈다.
“크아아아!”
한제는 맹렬히 고개를 쳐들고 고신의 성난 고함을 내질렀다. 고신의 고함은 하늘과 땅을 놀라게 했으며 일체의 생령(生靈)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 어느 것도 그 앞에서 버틸 자격을 갖지는 못했다.
한제는 매섭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단 한 걸음이었지만 한제에게는 매우 힘겨운 걸음이었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난 위압과 기운에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처럼 느껴졌지만 물러나는 것은 곧 굴복을 의미했다. 끝내 상황을 역전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완벽한 굴복이다.
‘고작 조각상에 굴복해버린다면 진정한 고신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이다!’
한 발 앞으로 내딛은 한제는 심지어 체내의 무언가가 갈라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내딛는 한 걸음은 조각상의 위압감에 대한 직접적인 저항이었으며 타협할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다는 의지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한제 체내에 존재하는 고신의 유산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한 걸음을 내딛자 조각상에서 느껴지던 위엄이 순식간에 증폭됐다. 마치 수없이 많은 거대한 산들이 감히 자신들에게 저항한 자를 벌하는 것 같았다.
펑!
불길한 소리와 함께 한제의 모공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한제는 여전히 꼿꼿이 선 채 다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그 순간, 더욱 강력해진 위엄이 짓눌러왔다.
‘도를 구하는 자는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죽지만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저항심을 가진 채 불굴의 의지로 살아간다. 그런 자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온몸의 모공에서 뿜어져 나온 피 때문에 한제는 마치 혈인(血人) 같았다. 하지만 그는 껄껄 웃었다. 그 웃음에는 고고한 기운을 품은 불굴의 의지가 배어 있었다.
지금 한제의 머릿속에는 오직 ‘역(逆)’이라는 글자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당시 그는 문정기에 이르기 위해 이 요령의 땅에서 하늘에 거역한 바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그는 마찬가지로 요령의 땅에서 끔찍한 위압감에 저항하고 있었다. 나천성역에서부터 봉인되어 있던 한제의 역심이 이 순간 다시 한 번 방출되었다.
모든 것이 인과(因果) 같았다.
한제는 세 번째 걸음을 내딛었다. 한데 그 순간, 대전을 가득 메웠던 위압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조각상 아래에 선 백의의 여인은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았는데 그 표정이 미묘하고 복잡해 보였다.
사실 한제는 조각상을 본 순간 그 중년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외모가 청상과 닮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조각상에 불과한 상태로 이렇게 강력한 위압감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이다.
‘선제(仙帝) 청림!’
한제는 서늘한 눈빛을 번득이며 백의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넌 시험에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