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877
주작성종 어느 도시 안, 한 노인이 끊임없이 술만 마시고 있었다.
“둘째야, 셋째야, 내가 미안하다. 내가⋯⋯.”
입가로 흘러내린 술과 눈물이 섞여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술과 눈물을 함께 마시는 셈이었다. 눈물이 녹아 들어간 술은 지독히도 썼다.
그때, 노인의 뒤편 허공에서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한제와 영이가 나타났다. 영이는 노인의 모습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노인의 술주전자를 빼앗으려 했지만 한제의 저지에 부딪혀 다가가지도 못했다.
한제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노인 곁으로 다가가 성벽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은 듯 뻗은 손으로 곁에 있는 술 주전자를 들어 그 안의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 ★
거대한 흡혈마수 수십 마리가 연맹성역 중앙 구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눈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들은 오직 흡혈마수만이 맡을 수 있는 냄새를 쫓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들 전방에는 기이한 향을 하나씩 손에 쥔 황의(黃衣)의 청년 세 명의 있었다.
“연맹성역에 이렇게 큰 흡혈마수들이 있을 줄은 몰랐군! 이놈들을 데려가면 우리는 큰 상을 받게 될 거야.”
한 사람이 탐욕에 번들거리는 눈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한데 그 말투는 분명 연맹성역 수련자들과는 어딘가 다른 느낌이었다.
한제와 진도자는 성벽 위에 앉아 묵묵히 술주전자를 기울였다. 이따금 고개를 들면 저 멀리 붉은 하늘과 땅에서 뜨거운 열기가 휙 스쳐갔다.
“죽었다. 셋째는 죽고 둘째의 원신은 결국 흩어져 버렸어⋯⋯.”
진도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비워버린 술주전자를 옆으로 내던졌다.
“진도삼자였는데 이제는 나 혼자만 남은 것이다.”
침묵하던 한제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켠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네들을 데려가는 것이 아니었는데⋯⋯.”
한제의 목소리에 진도자는 몸을 홱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서 깊은 한과 원망을 읽어낼 수 있었다. 한제는 말없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이 지난 후, 진도자는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더니 그 자리에 씁쓸함이 들어찼다.
“영이야, 술 가져오너라!”
이어서 진도자는 하늘과 땅이 붉게 물든 먼 곳을 바라보았다.
“수련자는 하늘에 거역하는 길을 걷는 자들이지. 이 돌아갈 수 없는 길에 오른 이상 언젠가 소멸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이는 나도 잘 알고 있네. 당시 자네는 우리를 요령의 땅으로 초청한 것이지 강요한 것은 아니었어. 우리 셋이 자원했지. 이 역시 잘 알고 있네.”
한제는 묵묵히 자신의 술주전자를 진도자에게 건넸다. 진도자는 말없이 술주전자를 받아들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내가 원통해하는 것은 내 부족한 능력일세. 둘째와 셋째를 부활시키지 못할까봐, 복수하지 못할까봐! 그 두 녀석의 망령에게 부끄러운 것이지.”
그때 영이가 다가와 술주전자 몇 개를 옆에 놔두었다.
한제는 그중 하나를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 일에는 분명 내 책임도 있지. 어쨌든 동행을 권한 것은 나니까. 대신 내 약속하지. 언젠가 반드시 자네의 두 형제를 죽인 타지아를 자네가 직접 복수할 수 있도록 해주겠네.”
진도자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다소 감격한 얼굴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정말인가?”
“약속하겠네.”
한제는 술주전자를 내려놓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람의 생과 사를 꿰뚫어볼 수 있다면 그것 자체를 꿰뚫을 수 있지. 자네는 여전히 두 동생을 생각하고 그리워하고 있지 않나. 그것이면 충분해. 우리 같은 수련자들의 생과 사는 명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지. 드넓은 성역에서 죽어가는 수련자가 하루에도 얼마나 많겠는가? 그들 중 죽어서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기억될 자는 얼마 안 될 걸세.”
한제는 다시 진도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수련자의 길에 오른 이상 우리는 생과 사를 관철해야 하고 스스로의 생사와 다른 이들의 생사를 꿰뚫어야 하네. 난 일찍이 알고 지내던 옛사람의 뼛가루를 고향에 묻어주러 갔다가 한 아이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지.”
한제는 기억을 더듬고는 천천히 노랫가락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살구나무에 하얀 꽃들이 피면 아가씨들은 도사 집안에 시집가지 마세요. 작년에는 둘째 남편이 산으로 올라가고 그다음 해에는 첫째 남편이 백골이 되었지요. 아가씨는 울며 죽은 사람을 묻고 그 관을 제 집으로 삼았대요. 살구나무에 하얀 꽃들이 피면 아이들을 도사들에게서 숨기세요. 나이를 묻는다면 도에는 연이 없다 답하세요. 개는 짖고 고양이는 할퀴어 도사는 집으로 돌아갔대요.”
노래가 끝났을 때, 한제도 진도자도 잠시 침묵을 지켰다.
“한낱 어린아이의 동요가 내 마음의 비통함과 슬픔을 집어내더군. 진도자 꿰뚫어보게. 꿰뚫어보면 자네가 느끼는 고통도 줄어들 거야.”
한제의 목소리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말을 마친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에는 진도자보다 더 짙은 쓸쓸함과 고독이 어린 상태였다.
멀어져가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도자의 귓가에 좀 전에 한제가 한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저 멀리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한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도자는 벌떡 일어난 큰 소리로 물었다.
“자네는 관철했는가?”
그 목소리에 한제는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나는… 관철하지 못했네.”
씁쓸한 기색이 어린 말을 남긴 그는 한 줄기 빛이 되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대지의 진동
화산의 분화구로 돌아온 한제는 말없이 가부좌를 튼 채 묵묵히 화산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과거 기억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말없이 앉은 한제의 앞에는 관이 하나 있었다. 수정처럼 빛나는 그 관 안에는 한 여인이 얌전히 누워 있었는데 마치 단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경국지색의 미인은 아니었으나, 한제에게는 세상 그 어느 여인보다도 아름답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모완⋯⋯.”
한제는 조심스레 관을 쓰다듬으며 따뜻한 눈으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주작성으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제는 모든 것을 잊은 듯 그저 가만히 그 여인을 바라보고 있기만 했다.
“네가 깨어나면⋯⋯ 우리 누구도 찾지 못했던 도원경으로 가서 평온하게 살자.”
한제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꿈일지도 모르겠으나 그에게는 가장 큰 바람이었다.
“이전의 나는 알지 못했지만⋯⋯ 이제 안다.”
그의 중얼거림에는 깊은 슬픔이 묻어났다.
예전에는 주일과 청상 사이의 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1천 년이 넘도록 수련을 해오고 그 끝없는 고독에 시달리는 사이 어느덧 깨달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집착이요 몸부림이었고 또한 저항이었다.
“모완아, 내 일찍이 했던 말을 기억하느냐. 세상이 너를 데려가려 한다면 나는 하늘에게서 다시 너를 빼앗아올 것이다!”
한제의 눈에 하늘에 대한 저항심이 담긴 순간, 화산 안에서 먹먹한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지며 점점 격렬해졌다. 그러더니 한 마리 거대한 마수의 포효처럼 울려 퍼지며 대지가 진동했고 짙은 검은색 연기가 분화구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을 뒤덮더니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대지는 어둠에 뒤덮였다.
다음 순간, 붉은 빛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고 한 줄기 용암 기둥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사방의 바위가 진동하면서 떨어져 내렸고 뜨거운 용암은 바위를 휘감았다. 한제는 하늘로 솟구쳐 오른 용암에서 10척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캬오오오!”
뜨거운 열기를 품은 용암은 화산에서 승천한 한 마리 화룡(火龍)처럼 온 세상을 뒤흔들 법한 포효를 내질렀고 하늘에서는 불의 비가 내렸다. 이 순간, 마치 온 세상이 한제의 눈앞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제는 고개를 들기는커녕 눈앞의 관에 시선이 못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대지에 한 줄기 한 줄기의 균열이 일어났지만 그 균열은 곧장 흐르는 용암에 뒤덮였다.
대지가 진동하면서 더욱 많은 용암이 분출됐고 분화구에서 흐른 용암이 강을 이루고 흘러내려 눈 깜짝할 사이 화산을 뒤덮고 널리 퍼져 나갔다.
하늘에서는 불비가 떨어졌고 대지는 용암으로 뒤덮여 온 세상이 검은 연기와 붉은 용암으로 이루어진 듯한 모습이었다.
“아름다운가?”
한제가 작게 입을 열었다.
“이것이 산붕(山崩)의 힘이다. 모완아, 내가 백범의 선술 중 네 번째 선술인 산붕을 깨닫는 것을 보아라!”
한제는 작게 중얼거린 뒤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용암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화산이 크게 진동하며 다시 폭발할 조짐을 보였다.
대지의 진동은 갈수록 넓게 퍼져 나갔고 점차 멀리 떨어져 있는 또 다른 화산을 흔들기에 이르렀다.
한제의 눈길이 닿자 멀리 떨어진 화산에서 돌연 짙은 연기와 용암이 분출되었다.
콰콰쾅!
차분히 두 눈을 감은 한제의 머릿속에 당시의 살역계와, 오른손을 든 청수와, 산붕 선술의 위력이 떠올랐다.
사실 요령의 땅에서 한제는 화산이 폭발하는 가운데 산붕의 느낌을 어느 정도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느낌은 너무 약했고 당시는 생사가 걸린 상황이었기에 깨달음을 얻을 틈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흔하디흔한 화산을 매일 지켜보면서 한제는 불 속성 원력을 깨달은 상태였다. 덕분에 청수가 그의 심신에 남겨준 산붕 선술도 조금씩 또렷해져갔다.
★ ★ ★
호풍(呼風), 환우(喚雨), 살두성병(撒豆成兵), 산붕(山崩), 지열(地裂), 음월유청(陰月有晴).
선제 백범의 육대선술 중 세 개는 이미 깨달음을 얻었으나, 청수는 그 뒤의 세 신통력이야말로 강력하기가 이를 데 없다고 했다.
산붕은 남은 세 개 중 하나로 산을 무너지게 하는 힘이다. 한데 그 과정은 매우 복잡했다.
만약 산혼(山魂)이 아닌 산 자체만을 붕괴시킬 때의 위력은 크게 떨어진다. 산혼과 산 자체를 동시에 무너뜨려야만 진정한 산붕의 위력이 발휘되는 셈이었다. 또한 실재(實在)하는 산을 이용하는 것은 산붕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진정한 산붕은 청수처럼 산이 없는 곳에서도 허상의 산을 만들어 붕괴시킬 때 발휘된다. 그때의 산혼은 선력을 신념에 녹여내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선력과 신념을 동시에 붕괴시키는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