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08
109. Shock and Terror (7) >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
정신을 차린 의원의 딸, 최선아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뭘 물어봐도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답만 반복되었다. 민준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다시 질문한다.
“그럼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장면은요?”
“매일 집에만 있어서 떠오르는 게 다 비슷비슷해요. 그래서 딱히 집어서 말하기가···.”
그녀는 곽도출 앞에 다시 나타나기 며칠 전부터 실종 상태였는데, 자신이 행적을 감췄다는 기억조차 없다고 했다.
“곽도출 씨는 최선아 씨가 실종되기 전 전화로 살해 협박을 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럴 리가. 기억나지 않아요.”
고개를 젓더니 흔들리는 눈빛으로 묻는다.
“그런데··· 정말 그 사람이 죽었나요?”
자기 손으로 목을 날려 놓고도 기억이 없다며, 믿기 힘든 표정을 짓는다.
“설마, 그럴 리가 없어요. 내가 어떻게···!”
그러더니 오열하기 시작했다. 무릎에 얼굴을 묻고 꺽꺽거리며 운다. 민준은 골치가 아파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편리한걸?’
흉기인 검을 어떻게 구했는지도 기억 안 난단다. 마찬가지로 검에 조종당한 트롤의 경우 검을 손에 쥔 이후 시점부터 기억이 소실되었다. 그에 비하면 훨씬 많은 부분이 삭제된 것이다.
‘트롤과 이 여자 사이 나타나는 차이점··· 이유가 뭘까?’
최선아는 그렇게 한참을 울더니 호흡이 힘들다며 부친에게 호소했다. 그러자 의원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선아가 너무 힘들어하는군요.”
의원은 딸을 토닥인다. 그사이 민준과 정팔은 멀찍이 떨어져 속삭였다.
“어때 보이냐?”
나름 강력계 짬밥을 먹을 만큼 먹은 정팔이 말한다.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
증언을 들으며 민준도 그녀를 주의 깊게 살폈다. 아무리 감추려고 노력해도 거짓말할 때 드러나는 제스처라는 게 있기 마련이니. 몸을 감싸는 듯한 행동을 하거나, 입을 살짝 벌리거나, 눈매가 긴장되거나, 동공이 아주 잠깐 축소되는 것 같은.
그런데 최선아에게서는 그런 것이 발견되지 않았다. 단 하나도.
오히려 그래서 더 수상했다.
거짓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모범적인 표본 같은 대응이었기에.
“너무 완벽하단 말이지.”
민준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무언가에 생각이 미친 듯 끄덕였다. 그리곤 정팔에게 속삭인다.
“잠깐 여기서 보고 있어 봐. 나 차에 잠깐 다녀올게.”
정팔은 자동차를 지하주차장에 대 놨다.
“뭐 또 가져올 거 있으세요? 제가 갔다 올게요.”
“아니, 내가 직접 가서 가져와야 돼.”
“필요하신 게 뭔데요?”
“후라이팬.”
정팔은 옅게 탄성을 질렀다.
“아, 그 녀석이 있었죠!”
스스로 주장하기를, 주변 지성체의 표면 의식보다 조금 더 깊은 영역까지 스캔할 수 있는 마도구.
민준은 그것으로 최선아의 내면을 살필 생각이었다. 그 말고 다른 누가 손대지 못하게 조치를 해 둔 상태였기에 정팔을 대신 보낼 수도 없었다.
“다녀오십시오.”
민준이 나간 직후, 의원은 결국 전화기를 들어 의료진을 불렀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의사가 들어온다. 조금 전 의사와 간호사 여럿이 함께 뛰어 들어온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담당의로 보이는 남자 한 명뿐이었다. 응급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의사가 동공에 라이트를 비추며 확인한다. 그러더니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고, 모니터를 확인하며 들고 있는 차트에 뭔가 적는 시늉을 했다. 그걸 보면서 정팔은 의아해했다.
‘여긴 전임의가 차팅(Charting)을 직접 하나? 특이한 병원이군.’
딸의 상태를 묻는 의원의 말에 의사는 짧게 답했다. 심리적인 문제이니 안정을 취하면 될 거라고.
누구나 할 수 있을 답변이었다. 그런데···.
‘왜 혼자 들어왔지?’
정팔이 위화감을 느낀 이유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특히 VIP 병실이라면 의사가 혼자 들어오는 일은 잘 없다. 더군다나 그는 계속 기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마치 뭔가를 기다리듯이.
‘저게 저렇게 오랫동안 들여다보는 기계였나?’ 일의 특성상 경찰 병원에 몇 달씩 입원한 경험이 많은 정팔은 지금 상황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였다.
파지직!
“뭐, 뭐야?!”
최판석이 당황했다. 소리를 지른 그의 가슴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
정팔은 이 현상을 알았다. 아티팩트가 저항력을 잃고 망가질 때 저렇게 된다. 최판석 정도 되는 상류층이라면 몸 곳곳에 장신구 형태의 방어구를 장비하기 마련. 암살이나 테러를 막기 위한 기본적인 신변 보호였다.
그것이 깨졌다는 건···.
“너!”
정팔이 벌떡 일어난 순간, 의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팟!
그의 옷깃에서 흰색의 연기가 터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방 전체에 퍼졌다.
“안 돼···!”
털썩, 의원이 무릎을 꿇는다. 해독 아티팩트는 이미 기능을 멈췄다. 의사 가운을 입은 남자는 차가운 시선으로 살폈다. 최판석은 눈이 반쯤 감기고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 정팔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소파에 기댄 채 몸을 못 가누는 중이었다.
“크으으!”
최판석은 필사적으로 꿈틀거린다. 그의 눈이 지독한 감정을 담아 남자를 노려보았다. 무언의 저주를 온몸으로 받는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방해꾼들이 완전히 무력화된 걸 확인한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할 일에 착수했다.
오크 둘은 간신히 의식만 붙잡은 수준이었지만, 인간인 최선아는 이미 완전히 기절했다. 남자는 그녀의 몸에 연결된 선을 제거한다.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정신을 집중하며 마나를 응집한다. 그러자 허공에 금빛의 마법진이 형성된다. 텔레포트였다.
이대로 마법진이 완성되면 최선아를 데리고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목표 달성까지 앞으로 단 몇 초 남은 그 순간.
“크아아아!”
번개와 같은 속도로, 정팔이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
복잡한 마법진을 짜던 남자는 경악했다. 두 눈을 부릅뜬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쯤 마비되어 있던 형사가 전력을 다해 돌진해 왔다. 마법으로 만든 가스가 전혀 통하지 않는 모습.
쿵!
“크아아악!”
정팔은 남자에게 몸통 박치기를 날렸다. 마법사는 피를 토했다. 완성 직전까지 갔던 주문이 산산이 깨졌다. 끌어모았던 마력은 체내에서 조각나서 유리 파편처럼 온몸을 찔렀다.
마법사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가 간신히 붙잡고 버텼다.
‘대체 어떻게?!’
그는 조금 전 방에 들어오자마자 주변 모든 아티팩트를 무력화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의원이 지닌 호부(護符)는 마녀협동조합에서 VVIP를 대상으로만 판매하는 귀한 물건이었는데, 그런 값비싼 마도구까지 무용지물로 만드는 철저한 준비를 해 온 것이다.
그런데 저 오크 경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대체 몸에 뭘 걸치고 있기에!’
마법사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정팔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방 안에 가스가 퍼지고 의원이 흐느적거리던 순간, 정팔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멀쩡하다는 걸 깨달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대로 마법사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상대는 가스를 터뜨린 순간 오크 둘의 상태부터 살폈기 때문이다. 주문쟁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뻔했다. 잔뜩 긴장한 그때 공격했다가는 준비하고 있던 다른 공격 주문이 날아왔으리라.
그래서 정팔은 더 좋은 타이밍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비 가스가 먹힌 척 시간을 끌다가, 마법사가 텔레포트를 준비하던 순간 몸을 날린 것.
“으윽! 이 새끼가···!”
마법사와 오크가 엉켜서 바닥에 뒹군다. 일단 몸싸움이 시작되면 금방 제압할 수 있으리라는 정팔의 예상은 빗나갔다. 인간은 오크의 완력을 못 당해 내기 마련.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놈이다!’
독기를 품고 저항하는 그는 평범한 마법사가 아니었다. 엎치락뒤치락, 공세가 이어진다.
그러던 중.
콰앙!
“크아악!”
난전 중에서도 주문을 외운 것인지 오크와 마법사 사이 충격파가 터졌다. 형사는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간다. 그리고 바닥을 뒹굴며 신음을 흘렸다. 그 모습을 본 마법사의 얼굴이 일그러뜨렸다.
‘죽이려고 날렸는데!’
급하게 외운 주문이라 위력은 크지 않았지만 평범한 오크 하나 해치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것.
하지만 마법사는 더 이상 여기 매달려 있을 수 없었다. 이미 지나치게 큰 소음이 발생했거니와, 마력이 엉켜서 엉망진창이라 텔레포트도 다시 펼칠 수 없었다.
계획 변경이다.
“치잇!”
마법사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진다. 탄탄한 몸이 드러났다. 그대로 의원의 딸을 둘러업었다. 또 한 번 주문을 외운다.
쨍그랑!
VIP 병실의 창문이 깨져 나간다. 최선아를 든 채 남자는 밖으로 몸을 날렸다.
***
이미 민준이 인정한 바와 같이 윰투스는 지구에서 비교할 이를 찾기 힘든 우수한 사제다.
독보적인 능력을 입증하듯, 그는 최선아를 회복시킬 때 요하임처럼 기괴한 준비물과 지저분한 의식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다. 행복감을 유도하는 뇌 내 물질을 폭주시켜 명상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신성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 그는 옥상에 앉아 민준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본래 죽었어야 할 사람을 살려낸, 기적에 가까운 신성력을 펼친 직후였지만 탈진하거나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가 좀 남은 상태였다.
쨍그랑!
‘음?!’
화신의 명령을 기쁜 마음으로 기대하던 그의 귀에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무슨 일이지?’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러자 병원 건물 밖으로 인간이 날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가 짊어진 여자가 눈에 익는다.
‘저 여인은!’
화신이 직접 살려 내라고 명한 환자였다.
영문을 알 수 없지만 화신께서 그리 명령하셨으니 매우 중요한 여식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상황은 절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둘 수 없는 노릇!’
빠른 판단의 결과, 윰투스는 신성력을 날렸다.
화아앗!
그의 손에서 힘이 뿜어져 나온다. 이런 순간에도 철저하게 성스러운 광채를 감춘 채였다.
그 파동은 도망치는 남자를 직격했다.
갈기갈기 찢긴 장기를 봉합하는 수술은 하루가 꼬박 걸리기도 하지만, 장기를 찢어 놓는 데에는 1초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신성력이 적용하는 방식에도 비슷한 부분이 있다. 흉포한 의지를 담은 힘이 즉시 마법사를 타격했다. 목적성과 정교함을 잃은 회복력. 그것은 세포 분열을 기형적으로 가속화했고, 그 결과는···.
“크억!”
마법사는 자신의 몸에서 거대한 종양 덩어리가 피어나는 걸 느꼈다. 무게 균형이 깨졌다.
전신에서 부푸는 살덩이는 묵직하게 그를 끌어내린다.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통증을 참는 훈련을 받은 그는 버티려 애쓴다. 하지만 의식을 잃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국 주문은 깨졌다. 남자가 대지를 향해 고꾸라진다.
쿵!
퍽!
종양을 아래로 두고 떨어진 덕분에, 추락한 지표면에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피로 가득 채운 풍선을 떨어뜨려 터뜨린 듯한 모습.
“크으읍!”
마법사는 임무 실패를 깨달았다. 그는 주저 없이 죽음을 결심했다. 통증 때문에 자폭 마법을 외울 새도 없었다. 숨겨 놓은 독약을 깨물려는 순간.
“······!”
그는 엉망이 된 육신에 감기는 채찍을 느꼈다. 그것은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묶어 버렸다. 마법사는 몸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아, 안 돼···!’
쓰러진 각도에 맞춰 기울어진 세상 속, 전방을 가득 채운 그림자가 보였다. 거대했다. 의지를 가진 것처럼 파도치며 들끓는 어둠.
그것은 덩굴처럼 뻗어 최선아를 휘감고 있었다. 그와 같이 추락하기 직전 낚아챘으리라.
그런 그림자를 등지고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
한 손에는 단검을, 다른 한 손에는 후라이팬을 든 남자였다.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마법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후라이팬···?’
의미와 목적을 찾기 힘든 조합.
하지만 상대가 충분히 가까이 온 순간 마법사는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남자의 두 눈에 들끓는 분노. 그걸 본 마법사는 참으로 오랜만에 공포를 느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 눈은 자신과 같은 부류만 보일 수 있는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분노를 아주 잔혹하고 예리하게 표현할 준비를 끝낸 자의 시선. 휘말리는 순간 죽음을 애원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는 예감이 머릿속을 채웠다.
어둠을 휘감고 걸어오는 사신과 같은 남자가 말했다.
“···감히, 내 증거물에 손을 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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