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35
136.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8) >
선수?
민준은 고개를 돌렸다. 하은성의 시선이 그를 따라갔다.
그곳에는 멍한 눈빛으로,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은성은 방금 전 그를 보자마자 드래곤임을 알 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미뤄 두었던 질문을 한다.
=대체 저 드래곤은 누구고 상태가 왜 이래요? 그리고 옆에 둔 상태에서 이런 이야기 해도 되는 거예요? 제 영파는 안 들려도 요원님 이야기는 들릴 텐데.=
민준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 상관없어.”
요원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이어서 후라이팬을 들어 올렸다.
그걸 본 하은성이 놀랐다.
=설마?!=
“네 생각대로야.”
자신이 한때 인류의 희망, 식생활의 혁명이라고 숭상했던 후라이팬이 얼마나 무서운 짓까지 할 수 있는지 깨닫게 된 하은성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넌 일단 몸으로 돌아가서, 내 결계 안에 숨어 있어.”
=···네, 알겠어요.=
하은성이 벽을 뚫고 사라진 뒤 민준은 켄티우스를 바라보았다.
“자, 내 말 잘 들어.”
잠시 후.
민준은 하은성보다 조금 늦게 두 개의 기척이 도착한 것을 느끼고 레지던스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거리 풍경을 눈에 담고는 한탄했다.
‘은밀하게 손을 쓰려면 좀 잘 하든가. 아무튼 이 새끼들은 제대로 하는 게 없어요.’
덫을 놓는답시고 준비를 해 놓았는데 영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덫에 일부러 걸려 줘야 하는 신세가 애석할 뿐이었다.
“예민준?”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고개를 돌렸다. 인파 속에서 낯선 엘프 여인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은성이 봤던 드래곤이었다.
그 순간, 주변의 마력이 폭풍처럼 요동쳤다.
‘빨리 좀 해라. 다른 놈들이 눈치채고 개입할라.’
나름 애썼지만 민준의 눈에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주문이 천천히 발동되었고.
엘프의 표정에 환희가 비쳤다. 해냈다는 얼굴. 사냥감을 낚아챈 포식자의 희열이 번뜩인다.
팟!
그 순간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펼쳐 놓은 마법진이 발동되었다.
빛이 사방을 감싼 뒤.
주변의 풍경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
텔레포트 마법진이 민준을 다시 토해 놓은 곳은 인적이 드문 숲이었다. 그들이 있던 뉴욕시 중심부에서 꽤 멀찍이 떨어진 뉴저지주의 국유림.
‘나름 용썼군.’
좁은 거리를 가득 메웠던 자동차 경적 소리와 1년 365일 멈추지 않는 뉴욕 시내의 공사장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숲속의 정적이 주변을 감싼다.
민준은 인근에 그들 외 누구도 감지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무슨 수작인지 뻔히 알면서도 당해 준 이유였다. 그 부분만큼은 양측 의견이 일치한 것이다. 뉴욕 한복판에서 난리를 벌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는 각각 엘프와 트롤 껍데기를 뒤집어쓴 남녀를 보았다.
드래곤들은 각자 평소에 즐겨 쓰는 의체와 선호하는 생김새가 있다. 하지만 둘은 민준이 아는 어떤 얼굴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다른 관찰자들을 의식한 행동이었다.
민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엘프 껍데기를 쓴 용이 비릿하게 웃었다.
“담담한 척하기는.”
민준이 평정심을 유지한 척, 오기를 부린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 그가 이 상황을 어떻게 인지하는지 그들로서는 상상도 못 할 터였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뒤에 선 남자, 보고르는 입을 닫고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대화는 할리스나임이 주도했다. 그녀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민준 앞에 던졌다. 그것은 코팅이라도 한 듯이 빳빳하게 펼쳐져 그의 코앞에 고정되었다.
건성으로 눈짓하던 민준이 말했다.
“설마 여기에 서명하라는 겁니까?”
“그래.”
한때 한국 교육계에 종사했던 민준이 조용히 읊조렸다.
“···을사조약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네.”
지독한 불공정 계약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민준이 로드에게 상속받은 유산 일체의 소유권을 계약서 하단에 서명한 두 드래곤에게 이전하는 불가역적 합의.
민준은 할리스나임을 보며 말했다.
“이거, 협박입니다.”
“눈치가 빠르군. 잘 아네. 그 눈치로, 네가 서명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이해했겠지.”
드래곤이 마력을 끌어 올렸다. 주변의 공기가 찌르르 울렸다. 적대적인 힘의 차이를 보이며 압도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민준은 같잖을 뿐이었다.
“이걸 서명 안 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죽이기라도 할 겁니까?”
“우릴 바보 취급하지 마. 네가 수형자라는 건 알아. 위원회 때문에 죽이면 안 되는 것도. 하지만 꼭 죽이지 않아도 괴롭힐 방법은 무궁무진한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군.”
“혹시, 재물손괴죄라고 들어 보···.”
“너희끼리도 서로 싸우고, 저주 걸고, 부상을 입혀도 숙청되는 대신 잘만 살아남더군. 간신히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딱 그 정도 선만 지킨 채 네 삶을 지옥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그리고··· 네 주변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쟤네들은 항상 레파토리가 똑같냐.
민준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에델리네스 때는 꼭지가 돌아 버릴 정도로 화가 났는데 이제는 짜증이 날 뿐이었다. 바뀐 것은 상황보다도 민준 자신이리라.
그는 다시 계약서를 본다.
사실 이런 법률적인 문서 따위 안 남기고 그냥 빼앗는 방법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질구레한 증거를 남기는 건, 저들도 눈치를 본다는 뜻이다.
“제 뒤에 누가 있는지 압니까?”
“젠킨슨? 자기 권속을 친구로 부르는 그 취향 고약한 고룡 말이지? 그는 지금 표 벌이에 바빠. 홍콩에 묶여 있다고. 너 같은 수형자 하나를 위해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올 거라고 생각해?”
할리스나임은 생각했다. 다른 경쟁자나 젠킨슨이 오기 전 강제로라도 서명하게 하면 그만이다. 유산이 공식적으로 넘어오는 것이다.
그들 행동을 제약하는 드래고닉 코드는 어디까지나 용족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진짜 종족이 뭔지도 모를 수형자 하나를 위해 이미 할리스나임의 소유물이 된 보물을 강탈하는 짓은 고룡이라도 할 수 없다.
그녀가 웃었다.
“너, 지금 시간을 끌고 있군.”
민준은 부인하지 않았다.
“네, 맞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이런다고 젠킨슨이 여기까지 올 것 같아?”
찌르르!
주변을 채운 마력의 파동이 더 격렬해졌다. 바늘처럼 사방을 찌르던 무형의 파편이 점차 더 굵게, 더 날카롭게 변한다. 보이지 않는 칼날이 사방을 난도질했다.
그것이 민준의 손목을 향해 감겨들었다. 억지로라도 서명하게 움직이려는 것.
드래곤의 시도를 하찮은 듯 바라보며, 민준이 말했다.
“오해를 하는군요. 누가 젠킨슨 회장을 기다린다고 했습니까?”
저 망나니 말처럼 그 친구는 지금 한창 바쁘다. 고작 이런 일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
그 순간.
“어?”
계속 침묵하던 보고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 할리···.”
할리스나임은 육성으로 답하는 대신 정신파를 울렸다.
=아, 또 왜?! 답답해도 잠깐만 기다려. 얘 죽이면 안 된다니까!=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보고르는 손가락을 펴서 하늘을 가리켰다. 그제서야 할리스나임은 위치 때문에 보지 못한 사각지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하늘에 작은 얼룩이 맺혀 있었다. 손톱보다 작았던 그것은 점차 부피를 불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뾰족한 윤곽선이 명확해지고 두드러졌다.
지평선 너머에서 무언가 몹시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 정체를 두 남매는 동시에 확인했다.
‘드래곤!’
할리스나임은 이를 악물었다.
‘젠장, 관찰하던 놈들이 벌써 도착했나? 어떻게? 며칠을 공들여 만든 마법진인데··· 교란은 완벽했어. 고룡이 아닌 이상 추적하려면 적어도 몇십 분은 더 걸려야···!’
하지만 드래곤 하트도 아니고, 이런 소소한 경쟁에 고룡이 끼어들 리가?
‘대체 누구지?’
잠시 후 할리스나임은 그 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켄티우스?!’
로드가 지구에 남긴 배다른 형제 중 최연장자였다.
그가 광폭한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드래곤의 본체를 드러낸 채로.
‘젠장!’
남매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인간 형태가 무너지고 용으로 화(化)한다.
할리스나임의 몸은 비취색 비늘로 덮이고 뱀처럼 길게 늘어난다. 그렇게 그녀는 뇌룡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한편 곁에 있던 보고르는 검은 비늘의 육중한 화룡이 되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거체였다.
둘의 생김새에서 부친, 로드의 흔적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용족은 보통 어미의 형태를 압도적으로 많이 가져온다. 할리스나임처럼 화룡을 부친으로, 뇌룡을 모친으로 둔 아이에겐 뇌룡의 특색이 두드러졌다.
지금 날아오는 화룡, 켄티우스의 경우 그나마 로드의 유전자가 조금이나마 보였다. 유려한 줄무늬를 그리며 색채가 구역별로 나뉜 비늘은 각각 황금색, 적갈색, 선홍색으로 반짝였다. 삼색룡(三色龍). 세 가지 색 고무찰흙을 겹친 뒤 용 모양으로 빚은 모습이었다.
할리스나임이 정신파를 울렸다.
=잠깐, 멈춰! 켄티우스. 이 수형자는 우리가 먼저 잡았다!=
켄티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명령받은 대로, 맹렬한 적개심을 두 눈에 띄운 채 허공을 가로지를 뿐.
달려드는 드래곤을 보며 민준은 살짝 착잡해졌다. 스승의 유지를 어겼기 때문이다.
‘투룡(鬪龍)꾼 놈들 하던 짓을 내가 하게 되다니.’
드래곤 애호가로서 그는 용 싸움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주의였다. 스승의 당부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명심해라, 말 못 하는 짐승이라고 장난감 취급하고 함부로 굴리면 못 쓴다.
그는 닿지 않을 말을 중얼거렸다. 이번만 용서하십시오.
그리고는 날아오는 켄티우스의 정신을 향해 의념을 쑤셔 박았다. 선명한 의미를 담은 두 음절의 명령어였다.
그것을 인지한 켄티우스가 입을 벌렸다.
그제서야 할리스나임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켄티우스가 이처럼 빠르게 몰아닥치는 이유가 저 수형자를 낚아채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궤도는···.
그녀가 절규했다.
=···이 미친 용이!=
뒤늦게 마법을 응사하려고 했지만 켄티우스가 더 빨랐다. 충분히 접근했다고 판단했는지 막판에 마력을 폭사한다. 켄티우스의 날개 뒤에서 공기가 폭발했다. 그리고.
“캬아아아악!”
켄티우스가 할리스나임의 목을 힘껏 물었다!
***
민준의 머리 위, 국유림 상공에서 세 마리의 드래곤이 얽힌 용 싸움이 펼쳐졌다.
“캬아아아아!”
눈 뜨고도 같은 편을 향한 선공을 허락한 보고르. 그는 늦게 정신 차리고 달려든다. 하지만 몸통을 들이박으려는 궤도는 너무 정직했다. 켄티우스는 할리스나임의 목을 물고 날아올랐다. 그 상태로 마법을 조형한다.
거대한 마법진이 펼쳐지고 백린탄이 운석처럼 쏟아져 내렸다.
쾅! 콰콰쾅!
치이익!
마법탄은 보고르의 흑색 비늘 위에서 차례로 폭발하며 불꽃과 연기를 튀겼다. 비늘 틈 사이로 파고든 화학 물질은 검은 용을 날뛰게 했다. 인간으로 치면 손톱 밑에 바늘 수천 개를 쑤셔 넣는 듯한 통증이었다. 그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사이 할리스나임을 전리품처럼 문 상태로 켄티우스는 거리를 벌렸다. 그 상태로 고도를 하강하더니 불타는 숲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젖은 수건을 후려치듯, 길쭉한 뇌룡을 바닥에 휘둘렀다. 매우 힘차게.
그러자 입으로 채찍질을 하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휘익!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
쾅!
나무를 조각내고 대지를 쪼개는 굉음이 이어졌다.
대지에 충돌한 뇌룡이 바둥거리는 와중에도 켄티우스는 목을 꽉 물고 놓지 않았다. 집요한 의지였고 무서운 악력이었다.
켄티우스는 몸과 머리를 연신 격하게 움직이며 대지를 드래곤으로 채찍질했다. 그렇게 죄 없는 땅과 숲을 수차례 두들긴 끝에야 그는 입을 벌렸다.
쿵!
바닥에 할리스나임의 머리가 힘없이 떨어진다.
···꿈틀!
만신창이가 된 뇌룡은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가뭄에 바닥이 드러난 논두렁의 뱀장어 같은 꿈틀거림이었다.
순간 사후 경직일까 의심했지만, 민준의 눈에는 사그라지지 않은 생명력이 보였다. 지시한 대로 켄티우스는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
그걸 확인한 순간.
“캬아아아아아!”
마법으로 만들어진 가스와 불꽃을 간신히 걷어낸 보고르가 켄티우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두 드래곤이 묵직한 충돌음을 내며 격돌했다. 비늘과 핏덩어리가 사방에 운석처럼 쏟아져 내렸다.
유전자를 반절 공유하는 형제는 막상막하 기세로 서로에게 입질을 하고, 몸으로 쳐내고, 꼬리를 휘둘렀다.
그 광경을 보던 민준은 상황이 예상과 조금 다름을 알아차렸다.
‘뭐야, 켄티우스 쟤··· 왜 저렇게 약해?’
이 상황을 용들 유산 싸움으로 정리하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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