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43
144.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16) >
***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레이먼드의 저택에서 일하던 이들은 공포에 질린 채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변을 가득 채운 먹구름 때문에 몇 미터 앞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하물며 저 높은 하늘 위에서 벌어지는 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방금 전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지붕이 날아간 뒤로 번개 구름 속에서는 이글거리는 푸른 섬광이 조금씩 비칠 뿐이었다.
고용인들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계에 막혀 벗어날 길이 없었다.
분진과 돌가루를 뒤집어 쓰고 공포에 떨던 중.
후둑!
“···어?!”
무언가 그들의 머리 위를 때렸다.
둑! 두둑!
검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지독한 비린내가 사방을 덮었다.
먹구름의 그늘 아래에서는 그저 까맣게 보였던 액체의 정체를 사람들이 곧 알아차렸다.
“피, 피다!”
후둑!
후두둑!
하늘에서 피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새하얗게 질렸다. 두려움에 익사당한 얼굴로 서로 어떻게 좀 해 줬으면 좋겠다는 듯 마주보았지만 답이 나올 리 없었다.
그들 모두 여기에 갇혔으니까.
“우웨엑!”
폴리모프 상태의 레이먼드 의상을 전담하는 테일러가 토했다. 그는 비위 좋기로 소문난 드워프였다.
혈우(血雨)가 품은 악취는 범상치 않았다. 평범한 피비린내와 다르게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는 역한 무엇이 있었다. 둔한 오크마저 바닥을 붙잡고 눈물 콧물을 쏟았고 후각이 민감한 엘프들은 일찌감치 기절한 상태였다.
그들은 알 수 없었다. 지금 그들이 맞고 있는 비가, 생명력과 마력을 그대로 품은 드래곤의 생혈(生血)임을.
***
“크르르··· 크으으!”
드래곤의 등 위를 달리던 민준은 결국 꽁지까지 도달했다. 그의 하반신에서 뻗은 그림자 꼬리는 단검을 움켜쥐고 끝까지 꼼꼼하게 그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질주한 길을 바라보았다. 비늘이 갈라지며 만든, 번들거리는 핏빛 궤적. 그곳에서 솟구치는 피가 비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아깝게.’
그리 생각하는 민준의 귀를 용의 비명이 때렸다.
“크아아! 캬아아아!”
레이먼드는 계속 몸부림치고 있었다. 민준은 그의 눈동자를 주목했다. 패닉 상태에서 발버둥 치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등 위의 민준을 향하던 적개감이 사라진 상태로 지금은 증오 대신 고통만 느껴진다.
단검으로 변한 후라이팬이 확인해 주었다.
=완전히 세뇌되었습니다.=
민준은 바로 소리쳤다.
“얌전히!”
우뚝!
레이먼드 웡은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
고룡은 아래턱이 날아가고 등이 따인 상태에서 너무도 차분하게 몸을 가눈다. 그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듯 맑은 눈으로 민준을 보았다.
피를 철철 흘리는 와중에도 얌전하다. 어떤 아픔도 못 느끼는 모습이었다.
민준은 그를 상대로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암시를 실험할 필요가 없다는 걸 확신했다. 저 모양새가 증거였다.
그때 켄티우스가 힘겹게 물었다.
“끝났나?”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답을 들은 켄티우스의 눈이 감기고 고개가 꺾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고꾸라지는 그를 보고 깜짝 놀란 민준이 팔을 뻗었다. 손끝에서 검은 채찍이 뻗어 나간다. 그리고 거미줄처럼 펼쳐져 삼색룡을 감쌌다. 덕분에 켄티우스는 엉킨 해먹에 감긴 것처럼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민준은 혀를 찼다.
“이미 한계를 초월한 상태였군.”
벼락에 몇 번이나 직격당한 그는 진작에 기절했어야 하나, 그때마다 민준이 머릿속에 정신파로 ‘암시’를 박아 넣었다.
지금 기절하면 안 된다고.
아직 버틸 수 있다고.
좀 더 시간을 끌고 고룡의 시선을 유인하라고.
민준이 그럴 수 있다고 장담하자 켄티우스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육신의 한계를 넘어 움직이다가 마침내 실이 끊어지듯 기절한 것이다.
‘일종의 버서크(Berserk) 상태였나.’
후라이팬의 능력이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지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일단, 치료부터.’
켄티우스도 문제고, 레이먼드 역시 아래턱이 박살 난 상태로 다른 이들 앞에 얼굴을 내밀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이 고룡은 죽일 수 없다. 로드 살해범을 찾기 위해서도 그렇지만, 창천과 달리 레이먼드는 아직 드래곤 기준에서 죽을죄를 짓지 않은 게 문제였다.
민준은 이 행성의 모든 용족을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레이먼드, 결계는 유지한 채 내가 지목하는 한 명만 들여보내.”
고룡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오랜만에 뵙나이다.=
남들 시선을 피해 한 외계인이 검은 구름을 뚫고 들어왔다. 그는 허공에 뜬 채 깊이 몸을 조아렸다.
“오느라 수고 많았어. 비행기 화물칸에 숨어 왔다며?”
=봉사할 수 있어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일행과는 다른 경로로 홍콩에 도달한 사제, 윰투스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웃었다.
=아아, 지금 이건···.=
민준을 섬기는 성직자는 기절한 어린 드래곤과 등이 벌어진 채 기다리는 늙은 용을 번갈아 보았다.
고개를 갸웃하더니 그 광경을 자신의 철학에 맞게 해석한 모양이었다.
종교적으로 말이다.
=공양 중이십니까?=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드림랜드 교단 식으로 기괴한 짓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윰투스가 그렇게 오해할 만한 장면임은 인정해야겠지만.
“이 녀석들 좀 치료해 줘. 신성력은 미리 채워 놨지?”
=네, 분부하신 대로.=
그는 신성력을 뿜었다. 탈진해서 쓰러진 켄티우스를 먼저 깨운다. 드래곤 특유의 강인한 생명력이 신성력에 자극되어 삼색룡의 몸을 채웠다.
“크으으···!”
켄티우스는 기절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 바로 다시 깨어났다. 다음은 레이먼드를 치료할 차례였다.
‘옛날 생각 나는군.’
턱이 날아간 상태에서도 고요한 눈빛으로 민준만 바라보는 고룡.
예전에도 발정기 같은 예민한 시기가 오면 수컷들끼리 싸워서 턱을 날려 먹거나 꼬리를 잘라 먹곤 했었다. 서로 난폭하게 물어뜯다가도 주인이 다가오면 저렇게 모든 행동을 멈추고 순한 짐승이 되었다. 두개골이 깨져서 뇌막이 보여도, 날개가 덜렁거리고 비늘이 다 타 버려도 아픔을 못 느끼는 것처럼 얌전히··· 말이다.
“가능하겠어?”
윰투스는 상처를 살피더니 말했다.
“턱이 많이 상하긴 했지만 신체 면적 대비 차지하는 부분이 작아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회복의 열쇠는 용의 생명력이니까요. 생명력 자체는 크게 손상되지 않았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는 드래곤의 등을 보며 감탄한다.
그쪽의 절개 상태는, 이대로 벌어진 양쪽 근육을 다시 잡아당겨 붙이면 잘린 자국이 감쪽같이 사라질 정도로 깨끗했다.
드래곤 해부학에는 조예가 없었음에도 윰투스는 그게 대단한 솜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사제는 그 절개 면에서 장인의 손길을 느꼈다.
드래곤을 이렇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종처럼 부리는 것을 보며, 윰투스는 다시 한번 화신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두터워지는 것을 느꼈다.
화아앗!
레이먼드가 완전히 회복된 뒤 민준은 말했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고룡은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멍한 눈동자로.
***
멀쩡한 모습으로 고용인들 앞에 나선 레이먼드는 사방에 뿌려진 자신의 신체 조각과 피를 깨끗하게 청소한 뒤, 이것이 ‘마법 실험 과정에서 벌어진 촉매의 폭주’ 때문에 벌어진 사고라고 공언했다. 누구도 믿지 않을 변명이었지만 따지고 들 사람 역시 없었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켄티우스는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꿈틀거리던 감각을 차분히 관찰하던 드래곤은 곧 그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러고 보니 레오는 어디 갔지?’
미친 걸 알기 전까지는 친구라고 생각했던 드래곤이 보이지 않았다. 레이먼드의 아들이기도 한 그 드래곤이.
같이 결계 안에 있었다면 싸우는 중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외면하기에는 너무 대대적인 난장판이었으니까.
레오가 결계 밖에 있었더라도 지금쯤 여기로 돌아왔어야 한다. 결계는 홍콩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부친이 손님을 받은 직후 왜 그런 걸 만들었는지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보이지 않는 건···.
‘아까 나랑 만난 직후 텔레포트로 떠났나? 그것도, 외국으로? 결계를 치기 직전이었다면 이동이 가능했겠지. 그런데, 뭐가 그리 급해서···.’
저택의 복구를 지시한 뒤 레이먼드는 방문자들과 함께 모처로 이동했다.
젠킨슨에게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린 다음, 민준은 레이먼드를 취조하기 시작했다. 남들 눈에 띌 필요가 없으므로 두 드래곤은 모두 인간 형태로 변한 상태였다.
질문은 민준이 맡기로 했고 켄티우스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긴장 속에서 켄티우스는 레오의 행방에 대한 의문을 잊었다.
“······.”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수형자는 가장 중요한 것부터 묻는다. 꿍꿍이가 있을 거라 의심하면서도 초대를 받아들인 이유. 풀어야 할 의혹.
“네가 드래곤 로드를 죽였나?”
켄티우스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고조된 기대감 속에서 고룡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이먼드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답은···.
“아니, 나는 그를 죽이지 않았다.”
“거짓말!”
그것은 비명 같기도 했고 호통 같기도 했다. 기대감이 산산이 무너진 얼굴로 켄티우스는 씩씩거렸다.
“감히··· 누구 앞이라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당신이 로드를 죽였잖아. 그렇지 않고서야 그 아티팩트가 사라진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고!”
드래곤 하트를 손에 넣기 직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기대를 배반당하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기세였다.
그는 연신 욕을 뱉으며 고룡에게 쏘아붙였다. 민준은 그를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헛된 희망은 버리고 당장 우리 앞에서 자백을···!”
민준이 툭 뱉었다.
“켄티우스, 저거 거짓말 아니다.”
“아, 그런가? 레이먼드 당신이 죽이지 않았군.”
순식간에 차분해진 목소리. 언제 난동을 부렸냐는 듯 켄티우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얌전히 다시 자리에 앉는다.
그렇게 젊은 드래곤에게 정신적 평화를 안겨준 뒤 민준은 취조를 계속했다.
“그럼 누가 죽였는지는 아나?”
고룡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답했다.
“모른다.”
이제는 민준 역시 짜증과 실망이 치미는 걸 느꼈다.
“그럼 로드의 유산은 왜 빼앗으려고 한 거야?”
“그 안에 고대 종족의 아티팩트가 있을 거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군.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아까워서 되살 계획이었다는 건 거짓말이었을 거고.”
고룡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고 민준의 추측을 긍정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왜 다시 회수하려 한 거지? 아티팩트에 장난질을 쳐 놓아서 그 증거를 인멸하려고 한 건가?”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나는 정말 그날 밤 로드가 그걸 달라고 말할 때까지 창고에 그런 게 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그럼, 대체 왜?
고룡이 그 답을 들려주었다.
“죽기 전날 로드가 그 아티팩트에 마법을 거는 걸 목격했기 때문이다.”
“···무슨 마법?”
“용혈에 반응하는 마법이었다.”
“드래곤 찾는 마법 말이야?”
예전에 젠킨슨이 장태준을 찾을 때 쓴 마법이다.
몸속에 용의 피가 흐르는 생물이 아니면 사용이 불가능한 주문.
“그걸 더욱 정밀하게 다듬은 스펠이지. 그것은 로드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에게만 반응하고, 그들에게만 아이템의 사용을 허락하며, 그 과정에 도움이 되도록··· 아이들의 위치를 검색하여 파악하는 마법이었다.”
민준의 표정이 살짝 바뀌었다.
쿵! 쿵!
그의 심장이 조금씩 뛴다.
로드의 자식을 찾을 수 있는 마법이라고?
그것은 원론적으로··· 드래곤 로드 본인밖에 구성할 수 없는 마법이긴 하다.
그와 피가 섞인 다른 드래곤도 비슷한 주문을 쓸 수는 있지만, 지구의 자식들 중 나이가 제일 많은 게 100살도 먹지 않은 켄티우스다. 유전자 단위로 개입하는 고급 주문까지 손댈 단계가 아니다.
외계에서 다른 자식을 찾아 데려오려면 당사자를 설득하기도 어렵고 위원회 승인을 거치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니, 이게 제일 현실적인 방법이긴 했다.
“그 주문이 걸린 아티팩트를 네가 필요로 하는 이유는?”
“나는 로드에게 숨긴 자식이 있다고 추측하기 때문이다.”
“······!”
민준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음 말을 재촉했다.
“더 자세히.”
그러자 그가 꺼낸 말은 민준이 전혀 예측 못 한 내용이었다.
“로드는 오래전 내게 말했다.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고 있다고.”
“······?!”
“드래곤 같은 고귀한 존재가 수명의 한계에 부딪혀 스러지는 것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당연히 관심을 기울일 만한 연구 과제지.”
과거를 회상하며 고룡은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을 들었을 때 내가 소스라치게 놀란 이유는, 나 역시 그 방법을 찾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꽤나 본격적으로 공을 들이던 중이었지.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서.”
드래곤 로드의 막역한 친우라는 건, 레이먼드 역시 나이를 많이 먹은 드래곤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난 그 사실을 티 내지 않고 교묘하게 로드에게 캐물었다. 어떤 방식으로 연구하는 중이냐고.”
“왜? 너 역시 같은 목적으로 연구 중인 사실을 굳이 숨길 이유가?”
“왜냐면 내가 연구를 위해 손잡은 조력자가··· 다른 이들에게 알리기 힘든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로드에게는.”
민준이 그 부분을 더 파고들려던 순간, 다시 이어진 레이먼드의 말 때문에 그는 귀를 기울였다.
“로드는 내게 비밀이라고 말했다. 절대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어. 그래서 난 조력자들에게 이 사실을 공유했다. 그러자 그들은··· 로드 역시 우리와 똑같은 방법으로 비슷한 연구를 진행 중이리라 추측했다. 그들과는 교류하지 않은 채, 아마도 로드 혼자서 말이야. 우연이라기보다는 그렇게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거였지. 그들은 확신했어. 드래곤처럼 오래 사는 종족이 수명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고.”
“그게 뭔데?”
고룡은 담담하게 말했다.
“거부 반응이 없도록 자신과 가장 유전적으로 흡사한 육신을 준비한 다음, 영혼을 그 몸에 옮기는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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