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44
145.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17) >
***
무언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최판석 의원은 여느 때처럼 예언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는 읽던 서류에서 눈을 뗐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초점 안경을 벗는다. 이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주변을 보았다. 침대에 편한 자세로 누운 딸은 아직 미래를 보는지 눈을 감은 상태다.
‘뭐가 달라진 거지?’
비유하자면, 그의 내면을 채우던 두 종류의 축 중 하나가 사라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불확실했다.
신기루 같은 어색함을 더듬다가 의원은 결국 더 이상의 분석을 포기했다.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린다. 거기에는 다가오는 재보선에 당에서 내보낼 오크 후보의 필승 전략이 적혀 있었다.
그가 점 찍은 형사는 결국 제안을 승낙했다.
형사는 얼마 전 의원을 찾아와 포부를 밝혔다. 종족 커뮤니티에 좀 더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싶다는 말에, 최판석은 이 이상 적합한 직업이 없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이제 남은 건 최선을 다해서 이기는 일뿐이다.
생각에 잠긴 의원의 눈이 이번엔 시계에 멎었다.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기 직전이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
의식을 미래에 고정한 딸은 주변 소음이나 냄새에 반응하지 않는다. 그걸 아는 최판석은 문을 열어 놓은 채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고 얼려 둔 무언가를 꺼낸다.
그것을 전자레인지로 가열하며 최판석은 기대감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최판석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방금 전 그가 받은 느낌의 정체는 단검에 찔렸을 때 걸린 세뇌가 풀리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오크는 여전히 민준의 지시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었다. 예언 중인 딸 옆을 지키는 것도, 시간 맞춰 저것을 먹는 것도 모두 그가 명령한 대로였다.
민준은 상대를 상처 입히는 형태로 발동되는 세뇌가 매우 강력하지만, 그 방식으로는 한 번에 딱 한 명만 조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아냈다. 그런 세뇌를 계속 최판석만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원에게 대량의 (유사) 요리를 선물했다.
띵!
해동이 끝났다.
접시를 식탁으로 옮기며 웃는다. 그는 짐작할 수 없었다. 방금 전 외국의 고룡이 마도구에 등이 갈려 정신 조작을 당했으며 자신도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다만 그의 경우 찔려서 걸린 세뇌는 사라졌으나 먹어서 걸린 세뇌는 유지되고 있음을.
최판석은 환한 얼굴로 스푼을 든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유기물을 가득 떠 입에 넣었다.
“······!”
자유롭게 생각할 권리를 박탈당한 이 늙은 오크는 그 순간,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다.
***
“이게 뭐야!”
주인이 자리를 비운 레이먼드 웡의 저택에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 몸이 이상해!”
고용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뒤집어썼던 것이 드래곤의 생혈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마법적으로 조작한 무언가의 피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레이먼드 웡이 사라지기 전 그것을 깨끗하게 청소한 이유도 견딜 수 없는 악취 때문이라고 여겼다.
용족의 피는 무척 엄격하게 관리되며 양지에서는 매매가 불가능한 물질이다. 그런 것을 싱싱한 상태로 온몸에 뒤집어쓰는 경험을 한 지구인은 여태 없었으며 그 피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아는 이들도 드물다.
그런데 그들이 몰랐던 용혈(龍血)의 특성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으, 으아아악!”
이번에는 트롤 정원사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피부에 종기가 일어나고 있었다. 용의 피를 뒤집어쓴 바로 그 부위였다. 피부 질환을 태어나서 처음 경험하는 트롤은 비현실적인 공포감에 휩싸였다.
트롤이 그 정도일진대 다른 종족은 더욱 심했다. 혈우가 묻었던 부위가 갈라지고, 이번엔 자신의 피로 그 자리를 적시는 이들도 있었다. 이 방면에서 최악의 상성을 자랑하는 카바이트였다면 방사능 낙진을 뒤집어쓴 것처럼 되었겠으나, 여기 모인 고용인들은 그 정도에서 그쳤다.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반응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겨우 수습되었던 현장이 다시 혼란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려 난리를 친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나는, 왜?”
동양계 남자 한 명이 멍하니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그의 몸은 멀쩡했다. 또한 남자는 조금 전 다른 고용인들이 악취를 느끼고 구토할 때도 평범한 피비린내 외의 무언가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민준과 켄티우스에게 초대장을 전달했던 집사였다. 집사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자신같이 별 반응이 없는 몇몇 동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군.”
남자는 그들의 공통점을 알아차린다.
피의 비를 맞고도 멀쩡한 고용인들.
그들은 모두, 인간이었다.
***
레이먼드가 비밀을 털어놓은 순간 켄티우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참을 수 없어서 대화에 끼어든다.
“유전적으로 비슷한 몸이라고?”
한편 레이먼드의 그 말을 듣고 민준은 창천을 떠올렸다.
사망한 전남편과 최대한 비슷하게 생긴 드래곤을 납치해서 그 몸에 전남편 영혼을 빙의시키려고 했던 고룡.
하지만 그 실험은 실패를 거듭했다. 망령이 된 류호의 영혼을 용체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창천은 망령을 유령으로 바꾸는 작업을 선행하려 했다. 그녀는 다수의 고블린을 희생시켜 그 난관을 극복하려다가 민준에게 걸려 대가리가 깨졌다.
그리고 레이먼드의 실험 역시 순탄치 않았던 것 같았다.
“우리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로드의 실험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었다면 그걸 훔쳐 내고 싶었다. 나와 조력자들의 실험은 실패를 거듭하던 중이었거든. 그래서 로드에게서 정보를 빼내려고 시도했지만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
민준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이미 실험을 하던 중이었다고?”
“그렇다. 아무도 모르게, 오래전부터 이미 진행 중이었지.”
켄티우스는 멍하니 그 대화를 듣고 있었다. 도무지 그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레이먼드가 이미 그걸 실행에 옮기던 중이었고 로드 역시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니.
“자신과 유전적으로 가장 흡사한 육신이라면, 설마 자기 몸을 복제라도···.”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닫는다.
그 순간 켄티우스는 온몸을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복제보다 훨씬 간단하고 쉬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로드가 몇 번이고 반복한 일이었다. 정확히는 지구에서만 열일곱 번을 한 그 일 말이다.
“자, 잠깐만.”
켄티우스는 어떤 드래곤의 이름을 떠올렸다.
방금 전까지 그 행방을 궁금해하던 상대를.
“설마?!”
“드래곤의 몸을 복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게는 더 간편한 방법이 있었지.”
드래곤 로드만큼은 아니지만 레이먼드도 자식을 꽤 여럿 둔 편이다.
그중 단 한 명만 성인이 되고 나서도 홍콩에 레어를 꾸리고 레이먼드 가까이에 살고 있다. 부친이 그렇게 권유했기 때문이다. 고룡 하나가 살기에도 좁은 이 도시에 말이다.
그리고 그는 레이먼드의 자녀 중 아버지를 제일 많이 닮은 뇌룡이었다.
켄티우스가 부들거리는 입술로 말했다.
“···레오?”
고룡은 평이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오늘 본 그 아이는 레오가 아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인다.
“그 알맹이는 말이지.”
켄티우스는 비명을 질렀다.
그는 경악과 공포, 혐오를 담아 레이먼드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 택한 방법이 그런 것이라니. 켄티우스 역시 드래곤이었지만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짓거리였다.
대체 드래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
“진짜 레오의 영혼은?!”
“그 아이는 지금까지 그나마 가장 성공에 근접한 실험체다. 진짜 레오의 영혼은 부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 밖으로 ‘적출’되었지. 그 애 모친이 모르는 사이에 처리하느라 애를 먹었···.”
“그럼 레오를 죽인 거잖아!”
켄티우스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영혼이 자신의 육신을 떠난 걸 죽음으로 정의한다면, 진짜 레오는 레이먼드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자식을 잡아먹은 부친을 보고 있었다.
레이먼드는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내 영혼을 이식하기 전, 다른 영혼을 이식하는 실험이 선행될 필요가 있었다. 이게 모두 드래곤의 육신이 지니는 특성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달란트를 소모해도 용의 몸은 자신의 것이 아닌 영혼을 강렬하게 거부했거든. 이식의 성공 확률이 매우 낮았다. 용들 몸에 누군가 록(Lock)을 걸어 놓은 것 같다고 조력자들이 평할 정도였지. 그래서 일단은 용이 아닌 다른 종족 영혼을 뽑아서 그 몸에 집어넣는 프로세스를 반복했다. 드래곤 영혼을 구하는 것보다 그게 더 쉬웠으니까. 그 과정에서 용체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른 개체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지도록···.”
“미친 새끼!”
레이먼드는 무엇이 잘못되었냐는 듯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아니면 애초에 창조될 수 없었던 생명을, 내가 의도한 대로 사용했을 뿐이다. 대체 뭐가 문제지?”
켄티우스는 토할 것 같았다.
그가 이토록 분노하는 것은 고룡의 천인공노할 행동이 역겹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레이먼드와 자신의 부친이 겹쳐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 역시 하마터면 레오 같은 신세가 될 수 있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었다.
켄티우스는 로드에게 특별한 애착은 없었으나, 형제 중 그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물려받은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면 그만큼 강력한 드래곤이 되리라 확신하면서.
하지만 레이먼드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로드 역시 그 방법으로 수명 연장을 노렸던 거라면.
이 정도로만 닮은 것이 천만다행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몸을 채색한 색상이 좀 더 단조로웠다면 로드가 아이를 더 낳는 대신 그의 몸을 노렸을 수도···.
‘로드는 지금까지 아이를 낳은 것이 아니야. 자기가 쓸 새 몸을 생산하고 있었던 거야!’
씨를 뿌리기만 하고 부화 후의 육아에는 관심이 없던 로드.
부정하고 싶었지만 모든 정황이 추측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켄티우스가 공황에 빠진 사이 민준 역시 작지 않은 충격을 받고 고뇌하는 중이었다.
그는 그나마 켄티우스보다는 냉철한 정신으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었다. 레이먼드의 진술에는 민준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것과 비교하여 상이한 부분이 있었다.
‘용체가 다른 영혼을 배척한다고? 하지만 하은성 그 녀석은 약간의 달란트만 소모하고 이름 모를 드래곤 몸을 자기 것처럼 쓰고 있는데.’
그가 레이먼드에게 물었다.
“거부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지?”
“이미 말한 대로 몸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깐 빙의되었다가 쫓겨났지. 성공 확률이 극도로 낮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어. 드래곤의 육신을 받는 수형자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단번에 이해할 정도였다. 달란트 소모량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승산 낮은 게임이고, 위원회 입장에서도 생산성 때문에 시도하지 않겠지.”
민준은 생각한다. 하은성은 운 좋게 그 확률을 한 번에 통과한 것인가?
아니면, 그 유령이 지니는 특수성이 확률까지 개입했을까?
“그리고 수백 번의 시도 끝에 운 좋게 빙의시킨 다음도 문제였다. 수형자들이 겪는 문제를 몇백 배 확대한 반응이 이식된 영혼에 나타났다. 영혼 역시 용체를 좀처럼 자기 몸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은 스스로를 혐오하거나 더 나아가서 모든 드래곤을 혐오하게 되더군. 드래곤 영혼으로 실험을 많이 해 보면 달라질지 모르지만, 적당한 드래곤을 그만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민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일단 레이먼드가 창천과 비슷한 짓을 하고 있던 것은 알았다.
하지만 로드 역시 그랬을지는 확실치 않았다. 대치되는 정황 증거도 있었다. 민준은 로드의 행동에서 모순과 이해하기 힘든 점을 발견한 것이다.
로드가 새 몸으로 부활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숨겨 놓은 자식의 존재를 왜 민준에게 노출시켰고, 그 앞으로 유산은 왜 남겼는가?
그리고 유언을 통해 자식들끼리 경쟁은 왜 시켰고, 조건을 충족 못 하면 심장을 차기 드래곤 로드에게 넘기는 복잡한 판을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까지 감안할 때 민준은 로드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 그런 끔찍한 이유 때문에 열여덟이나 되는 아이를 낳았던 거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 믿기 싫기도 했다.
‘내가 아는 로드는 그럴 드래곤이 아니다.’
로드는 젠킨슨 다음으로 민준이 오랫동안 교류한 용이다.
그는 독선적인 다른 드래곤들과는 달리, 용이 아닌 종족에게까지 호의를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다. 또한 동족들 역시 진심으로 사랑하는 드래곤이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이 추측이 사실이라면?’
민준이 목격한 로드의 모습이 그를 구성하는 파편에 불과했다면?
사실은 로드 역시 수명 연장을 위해 자식을 생산하고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있는 용이었다면?
만약 그랬다면, 민준은 자신이 사랑하여 마지않는 저 종족에게 극심한 실망을 느낄 것 같았다.
‘드래곤은 드래곤인가? 삶을 남과 나눌 줄 모르는, 오로지 탐욕으로 불타는 독선적인 종족이라는 걸까?’
민준은 생각했다.
이 가설이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 그는 확신하게 되리라.
먼 옛날 두개골 속에 무려 여섯 개나 되는 뇌를 품도록 개량한 저 짐승에게, 생각할 권리와 사유(思惟)할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선택은 실로 옳지 않았는가?
***
눈을 뜬 순간 최선아는 방 안에 가득한 아름다운 향을 느꼈다.
그것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하며 그녀는 곁에 앉아 지켜보는 오크에게 말했다.
“여전히 똑같은 미래만 보았어요.”
식사를 마치고 영혼까지 살찐 듯한 표정으로 흐뭇해하던 오크는 다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또 그 장면이었니?”
“네.”
내용의 차이는 없었지만 예지의 형태가 좀 달라지기는 했다.
“장면이 더 선명해졌어요. 너무 생생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예요.”
최선아는 몸을 옅게 떤다. 이런 현상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였다.
“그 장면이 현실화될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어요. 아마 오늘 어딘가에서 그 미래를 실현시킬 재료가 될 사건이 벌어졌을 거예요.”
“그럼···.”
“네. 궤도를 이탈할 가능성이 희박한, 고정된 미래가 될 것 같아요.”
예언자가 오크에게 장담한다.
꿈속에서 행렬을 이루고 나아가던 존재들. 그들이 꿈에서 본 그대로의 종족이든, 은유적으로 암시된 일부 계층이든 간에.
“드래곤들은 뇌를 잃을 거예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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