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45
146.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18) >
***
수형자로서 민준이 인식한 이 세상은 항상 악의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었다.
상호 합의 없이 세상에 던져지는 것이 폭력이라면, 수형자의 탄생은 가장 가혹한 상해치사에 해당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죄 때문에 노예로 고통받아야 하는 삶. 그 처지는 현생의 고난이 전생의 원죄 때문이라는 일부 종교의 가르침에 가깝기도 했다. 이 이상 불합리한 개념을 찾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기억을 조금이나마 되찾기 전, 민준이 세상을 향해 던졌던 시선은 냉소적이며 회의적이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 살짝 내비치는 온기 어린 순간, 그것이 그를 버티게 했다. 분노와 절망은 사라지지 않으나 작은 즐거움으로 덮어 둘 수 있었다. 한때는 델이 그 역할을 해 주었고, 지구에 온 후에는 종류가 조금 다르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과의 정서적 연대를 통해 그것을 얻었다.
그리고 드래곤 로드 역시 수형자인 민준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보내 온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의 시신을 목격했을 때 먼 옛날의 민준과 현대의 민준이 엇갈린 감정을 느끼고 그것에 죄의식마저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그의 친구였다. 민준은 그가 죽고 나서야 그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런 존재의 시신을 보고 머릿속에 도축법이나 그리고 있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민준은 또한 알고 있었다. 사람은 항상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살갗 한 장, 비늘 한 겹 아래 숨어 있는 사람의 본질을 밖에서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리도 어려울 줄은 몰랐다.
민준은 고뇌한다.
‘나는, 로드의 유지를 계속 이어 가야 하나? 애초에, 그의 복수에 일조한다는 개념 자체가 무너진 것이 아닌가?’
호텔방으로 돌아온 그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레이먼드의 가설이 맞다면 로드의 죽음은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
레이먼드는 그것이 영혼을 이전시키는 시도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성공했다면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은 열여덟 번째 자식에게 옮겨 갔으리라고. 이미 존재가 확인된 열일곱 명의 자식들은 아비를 충분히 닮지 않았거나 아직 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부활한 로드를 찾고 성공 비결을 캐려 했다.
‘그럼 그 유언은 뭘까?’
99일 후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앞으로 행동할 방향을 택하기 위한 고민이었기에, 민준은 제일 먼저 자신이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경우를 상상했다.
‘일단, 새로운 드래곤 로드는···.’
고룡들의 선거 물밑 작업은 묘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칼리에테르가 젠킨슨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녀에게 빚을 졌거나, 우의를 품었거나, 명령에 따라야 하는 드래곤들 역시 그녀와 함께했다. 그 수만 따져도 이미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거기에 더해 본래 드래곤 로드를 지지하던 용족도 있었다. 그들은 유언장이 공개된 순간부터 젠킨슨의 편이었다. 로드는 생전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어린 용들 중엔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던 자들이 있었다. 로드에게 사적으로 도움받은 적 있는 드래곤들로 추측되었다.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는 다른 용족과 달리 로드는 생전 종종 그런 ‘자선 활동’을 비밀리에 해 왔음을 민준은 알았다. 그래서 지금 더욱 혼란스러운 것이고 말이다. 여하튼 그들도 물밑에서 젠킨슨에게 지지 선언을 보내 왔다. 그러니 포기하여 기권하지 말고, 차기 로드가 되어 고인의 유지를 이어 달라고 말이다.
여기까지만 헤아려도 만만치 않은 표를 획득한 것이다.
더군다나···.
‘여기에 레이먼드까지 더한다면?’
그 역시 쟁쟁한 차기 로드 후보 중 하나다.
민준은 그런 후보자를 완벽한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가까운 나라의 종족차별주의자 국회의원 서른 남짓 세뇌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사건이었다.
‘레이먼드를 투표 직전 기권하게 만든 다음, 그가 영향력을 끼치는 다른 드래곤까지 모두 젠킨슨을 택하도록 입김을 넣는다면···.’
은둔 생활을 택하지 않은 이상 지구의 드래곤 다수는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면밀히 엮여 있다.
그 관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요소는 주로 ‘힘’이다.
레이먼드의 입김 한 번이면 가지고 있는 사업체가 부도날 수 있는 어린 용들은 그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을 터.
‘이 정도면 표는 이미 충분한 것 아닌가?’
민준은 자신이 지구의 차기 로드를 결정지을 수 있는, 일종의 킹 메이커(King Maker)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문제는 과연 그래야 할지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젠킨슨을 차기 로드로 만드는 것이 고인의 유지였지. 차기 로드에게 심장을 넘기는 것도 그의 뜻이었고. 처음엔 성향이 비슷한 드래곤에게 힘을 넘기는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일부 드래곤들은 로드의 심장이 시한폭탄이라고 생각한다. 시신을 관리하는 고대 종족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한 최후의 반격이라고.
민준은 그걸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치부했다. 엔델리온의 공주가 맹세를 어기고 드래곤 하트를 훔쳐 갈 리가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폭탄의 방향이 위원회가 아니라··· 심장을 실제로 넘겨받을 후계자를 겨냥한다면?
‘정말 드래곤 하트에 무슨 짓을 해 놓은 거라면 그걸 손에 넣는 젠킨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
민준은 다시 유언 내용에 집중한다.
‘직계 후손이 범인을 찾지 못한 경우 심장은 젠킨슨에게 넘어간다.’
왜 이런 조건을 걸었을까?
민준은 직계 자손이 범인을 찾은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사람들이 이미 아는 열일곱의 자식 중 하나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드래곤이 나타난다.
온몸이 황금 비늘로 덮인, 고인을 쏙 빼닮은 용 하나가 나타나 자신이 숨겨진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그녀가 범인을 단숨에 밝혀 드래곤 하트를 손쉽게 상속해 가는 광경을.
아마도 그 육신이 품은 영혼은 어린 용 자신의 것이 아닐 터다.
‘······!’
잠시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상상이었다.
아직은 전부 억측에 불과하지만···.
‘그럼 증거를 찾으면 되는 거잖아.’
민준은 문제의 본질에 집중하기로 했다.
로드가 자식을 죽이고 몸을 빼앗았다면, 민준은 그를 단죄할 자격이 있는가?
없다.
하지만 민준 역시 그가 짠 계획의 일부였고, 상속된 유산 역시 로드의 계획을 이루기 위한 발판이라면···. 고인이 민준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라면, 그는 여전히 민준의 친구인가?
그렇지 않다.
“······.”
그는 결단을 내렸다.
“켄티우스, 로드의 시신을 내가 직접 봐야겠어.”
홍콩에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했던 일인데 레이먼드 때문에 늦어졌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로드 살해범은 본인이잖아? 자살이니까. 어쨌거나 그 증거를 제시하고 입증하면 유언장은 효력을 발휘할 것이고 드래곤 하트는 네게 넘어오게 돼.”
“하지만, 정말 자살했다고? 우리가 봤던 그 마지막 광경은···.”
민준은 그가 왜 망설이는지 이유를 알았다.
둘은 홍콩 최고층 빌딩이 무너져 내리던 광경을 기억한다.
로드는 뉴욕 사설 금고 건물을 없앨 때 수도관 및 가스관까지 깔끔하게 봉인할 정도로 사소한 부분까지 신경 쓰던 드래곤이었다. 자기가 죽은 후의 일을 그만큼 열심히 준비한 것이다.
그런 그가 건물 하나를 통째로 붕괴시키는 계획을 짤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준이 말했다.
“로드가 한 일치고는 끝마무리가 너무 번잡하고 시원치 않았긴 해. 어쩌면 계획한 대로 완벽하게 실행되지는 않았을 수도 있지. 마지막 단계에서 사고가 벌어졌을 수도. 주변에는 증거가 남지 않았지만 시신에는 뭔가 남았을 수도 있어. 난 그날 로드의 몸을 가까이서 직접 조사할 수 없었거든.”
델은 떠나기 전 위원회가 관리하는 차원 도약 터미널 지하에 시신을 보관했다. 그리고 접촉은 할 수 없지만 원하는 드래곤 누구나 그것을 지켜볼 수 있도록 안배했다.
하지만 용족끼리 논의한 결과 거기에 몇 가지 조건이 붙었다.
“시신을 보기 위해서는 고룡을 증인으로 곁에 두고 가야 한다.”
“젠킨슨에게 연락해 보지.”
하지만 드래곤 중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친구는, 용의 인성을 민준이 계속 존중하도록 지켜 주는 마지막 보루는 회신이 없었다.
“···바쁜 모양이군. 흠, 레이먼드는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레이먼드는 취조를 마친 뒤 민준에게 허락을 구하고 레어로 돌아가서 그대로 뻗어 버렸다.
그와 켄티우스 둘 다 윰투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그 전까지 입은 부상의 크기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많은 생명력을 소모한 레이먼드는 쉬면서 회복할 시간이 필요했다. 예전 최선아가 나은 뒤에도 한동안 깨지 못했던 것처럼.
민준이 고민할 때였다.
“···어?”
창밖을 보던 레이먼드가 당황했다.
“왜?”
그 시선을 따라간 민준 역시 두 눈을 크게 떴다.
-딴! 딴딴딴!
밖에서 웅장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오늘도 그 시간이 왔다. 하루에 한 번 시정부에서 진행하는 레이저 쇼. ICC 빌딩의 참사를 빨리 사람들 뇌리에서 지우고 관광객들을 다시 끌어모으기 위해 조속히 재개한 것이었다. 물론 거기엔 홍콩을 지배하는 고룡의 의도가 반영되었다.
쇼를 구경 나왔다기보다는, 지나가다 그 장면을 우연히 본 듯한 몇몇 행인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들이 속삭였다.
“···어? 오랜만에 다시 나왔군?”
“역시 드래곤은 드래곤이군. 며칠 전 빌딩이 무너지고 사람이 그렇게 죽었는데 벌써 저러고 지랄을 할 생각이 드나? 사이코패스 같으니.”
그때 켄티우스는 이미 창 가까이 다가와 밖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레오!”
저택에서 만난 직후 사라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그가, 뇌룡의 본체로 돌아간 채 허공에서 춤추고 있었다. 레이저 가닥을 몸에 튕기고 부서뜨리며 쇼의 일부가 되어서. 긴 몸을 움직여 마천루 스카이라인 위를 장식한다.
켄티우스는 오늘 친구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본래 영혼이 소거된 몸을 대신 차지한 실험체. 예전 같았으면 저 행동을 달리 해석했겠지만 이제는 처참한 발악으로 보였다.
그때였다.
“어?”
하늘 위를 춤추던 레오의 궤도가 점차 묘하게 변했다.
그는 홍콩섬 위에서 흐느적거리다가, 이제 주변 시선을 충분히 끌었다고 판단한 듯 조금씩 북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빅토리아 하버를 관통하며 나아간다.
그 머리는 민준이 있는 물 건너 구룡 반도 쪽을 향했다. 하지만 호텔보다는 많이 동쪽으로 치우친 동선이었다.
민준은 그쪽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늠했다. 몇 개의 시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잠깐, 설마?!”
***
대한항공 KE681편 운항을 맡은 기장은 여느 때처럼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그가 조종간을 잡은 비행기는 정확하게 3시간 20분 전 인천 공항을 출발해 앞으로 약 5분 뒤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다.
손바닥에 살짝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기장은 속으로 욕을 삼켰다.
‘아무튼, 이 개떡 같은 공항!’
홍콩이 신흥 국가 광둥 연방에 수복당한 뒤, 영국이 계획 중이던 신공항 건설 계획은 백지화되었으며 그 유명한 카이탁 공항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해당 공항은 노후화된 시설과 복잡한 내부 때문에 이용객들에게도 욕을 먹었지만, 비행기 파일럿들에게는 다른 이유로 악명이 높았다.
기장은 화려한 불빛으로 물든 도심 너머, 물 위에 광선처럼 이어진 활주로를 바라보았다. 저곳에 닿기 위해 통과해야 할 시련이 하나 남았다. 비행기는 이미 고도를 내리는 중이다. KE681편은 구룡 성채를 비롯한 고층 건물들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날며 하강했다.
저 아래 사람들은 고개를 들면 지나치게 크게 보이는 비행기를 마주할 것이다. 저렇게 낮게 날아도 되는 것인지, 추락인지 착륙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저고도 비행.
그런 상황에서 기장은 급커브를 준비한다.
주변 지형 때문에 매번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가뜩이나 활주로 주변이 인구 밀집 지역이고 고층 건물도 가득한데, 가까운 산 때문에 곡예 비행에 가까운 묘기까지 부려야 한다.
마른 입술을 적시며 기장은 고도를 말했고, 부기장이 그것을 복창했다.
그때였다.
“······?!”
통신 장치에서 급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두 파일럿은 관제탑 교신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홍콩섬에서 바닷물을 건너 비인가 비행 물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 같았다. 공항이 있는 구룡 반도를 향해 너무도 빠른 속도로.
그것을 인지한 관제탑에서는 상식과 다른 교신을 보냈다. 비인가 비행체 쪽에 명령하는 대신, 주변의 모든 ‘정상적인’ 비행기를 향해 회항을 지시한 것이다. 막 착륙 준비 중이던 KE681편을 포함하여.
기장은 비명을 질렀다. ‘이제 와서?!’
“대체 어떤 개또라이가···!”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부기장이 비명을 질렀기 때문이다.
“저, 저기···!”
그제서야 육안으로 그것을 목격한 기장은 말문이 더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온몸을 푸른 번개로 두른 기다란 물체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레이저 쇼의 반경을 벗어난 그는 모든 홍콩 시민이 자신을 주시하기를 바라는 듯, 움직이는 네온 사인 간판이 되어 하늘을 달렸다. 바지직! 번개가 끊임없이 비늘 위를 지글거리고 있었다.
“드래곤!”
소리를 지른 직후, 기장은 더욱 공포스러운 광경을 보았다.
‘하··· 하강하잖아?!’
설마 저대로 비행기처럼 활주로에 내려앉을 작정인가?
하지만 궤도를 파악한 그는 곧 깨달았다.
드래곤은 공항이 아니라 그것과 같은 인접한 부지를 쓰는 다른 시설을 향하고 있었다.
“···차원 도약 터미널?!”
위원회는 외계로 이동할 수 있는 터미널을 설치할 때 항상 해당 지역의 우주 정거장이나 행성 내에서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교통수단의 허브를 택한다. 모든 외계인이 고대 종족 같은 원거리 텔레포트를 펼칠 수 없기에, 교통 연계가 가장 효과적인 위치를 지정하는 것이었다.
지구의 경우 그 역할을 수행하는 시설은 공항이었다.
그리하여 위원회는 공항 바로 옆에 인공섬 하나를 만든 다음 그곳에 시설을 지었다.
공항처럼 지명을 따서 카이탁 차원 도약 터미널로 부르는 그곳은 위원회의 사유 재산이다. 그리고 그곳을 향하는 레오는 알고 있었다. 위원회 사유지에 테러 행위를 꾀하는 범죄자에게, 그들이 얼마나 무거운 현상금을 부과하는지 말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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