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50
151. 세상에 나쁜 용은 없다 (23) >
***
편지를 다 읽은 민준은 잠시 침묵했다.
“민준?”
젠킨슨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바스러졌다. 민준은 로드가 예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알아차렸음에 충격을 받았다.
‘당신은 이미 비밀을 깨우치고 혼자 고민하고 있었군요.’
민준은 로드가 겪었을 괴로움과 고독의 깊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어떤 종류의 고뇌는 사람의 마음속을 지옥으로 만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혹한 유혈 사태도, 타오르는 불씨도 없지만 피부 한 겹, 비늘 한 장 아래에서 벌어지는 밀실의 고문.
동시에 민준은 로드의 용기에 경의를 표했다.
뇌가 얼어붙을 정도의 공포였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고 동족과 공유하여 짐을 덜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생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며 희생했다.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타적 동기가 두드러졌다. 드래곤답지 않게. 참으로, 드래곤답지 않게.
“······.”
한편, 수형자로서의 민준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 사이 그의 다른 반쪽은, 존중과는 상반된 반응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오래된 자아는 무척이나 당혹스러워했다.
그럴 법했다.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는 알 수가 없었다.
과거 가축으로 부리고 먹던 동물이 지성을 갖추고, 자신을 먹지 말라고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오는 경우 대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가?
민준은 미루어 두었던 고민을 직시해야 할 때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내 복수가 실현된다면. 이 모든 일이 끝나는 그날이 오면.’
동족들이 깨어나고,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그날이 오면.
‘우리는 드래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을 선택의 영역, 기호의 영역으로 둘 수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민준의 기억과 그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절대 기호의 영역이 아니다. 민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목이 따갑고, 갈라질 듯이 아팠다.
“민준?”
젠킨슨이 다시 그를 불렀다. 민준은 고개를 돌리며 고룡과 눈을 마주쳤다. 폴리모프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친구의 눈동자에서 본체의 시선을 느꼈다. 현실의 시각과 기억 속의 장면이 뒤섞인 것이었다.
용의 맑은 눈빛.
그는 자문했다.
‘나는 젠킨슨을 먹을 수 있는가?’
가치가 없는 질문이었다. 먹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젠킨슨은 그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의 친구가 아닌 드래곤은 먹을 수 있는가?’
먹을 수 있는 드래곤과 먹을 수 없는 드래곤을 나누는 그 기준을, 자신의 감정에 두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그들의 생사 여부와 그들이 존엄성을 쟁취할 기회가 민준의 애착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맞는 일인가? 어떤 드래곤은 민준의 관심을 받았기에 살아남고, 어떤 드래곤은 그렇지 못하기에 먹히는 것이 옳은 일인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결심했다.
로드의 편지를 읽지 않았다면 마음을 굳히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언어’를 빌린 호소가 민준을 움직였다. 편지에서 먹지 말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하나였다. 로드는 그가 느끼는 감정에 호소하고 있었다. 드래곤이 식량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렸을 때 마주했던 공포감. 그 자존심 강한 드래곤이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탄원했다. 용을 먹지 말아야 할 이유를 강변했다.
‘적어도, 방법을 찾아보기라도 해야겠어.’
기억을 더 되찾으면 실마리를 얻을지도 모른다.
태초의 종족이 잠들 당시와는 달리 용은 이미 지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편지를 읽은 민준은 로드로부터 어떤 가능성을 보았다. 젠킨슨에게서 느낀 가능성과 동일한 종류였다.
그렇기에 민준은 먼 미래에 닥칠 그 순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할지 원칙을 정했다.
그는 찾아볼 것이다.
용을 먹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
오크가 물었다.
“어떠니, 오늘 본 미래는 좀 바뀌었니?”
예언자가 답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어요. 여전히 같은 장면만 보여요.”
***
카바이트, 게드윅은 승진한 뒤에도 줄지 않는 업무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부관이 전달한 보고서를 검토 중이었다. 차원 #33-790에 대한 내용이다. 그 차원에 함께 살아가는 세 종의 초식 종족과 한 종의 육식 종족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보고였다.
“페이지를 넘겨 보게.”
육식 종족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초식 종족은 동물을 먹는 행위를 야만스러운 짓으로 치부하고 그들을 멸시하며 차별했다. 육식 종족이 지성체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지구로 치면 소나 돼지에 해당하는 짐승만 먹었음에도 초식 종족들은 그들의 식습관에 지독한 혐오를 느꼈다.
그 결과 육식 종족은 각 나라에서 이등 국민 취급을 당하고 노골적인 임금 격차에 시달렸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인들을 꾸준히 선출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했다. 사회의 균형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하지만 요 근래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케트마스족··· 그러니까 고기를 먹는 종족을 향한 린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초식종이 육식종보다 약하다는 건 편견이다.
“공공연한 살해가 일어나고, 그들의 주거지를 불태우고 있지요. 하지만 언론에서는 일절 보도를 하지 않고 있구요.”
“웃기는군. 먹기 위해 죽이는 건 안 되지만, 죽이고 안 먹는 건 정당하다는 건가?”
“그들을 죽여서 더 많은 동물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게 초식 종족 과격 집단의 주장입니다.”
그들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은 음모에 휘말려 경질되거나 구속되었다. 이제 그들은 고향에서 버틸 희망을 잃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망명을 갈 차원을 찾고 있었으며, 위원회는 그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우리에게 접촉을 해 왔군.”
“네, 최대한 빨리 이주를 희망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 차원의 주민들은 끝내 모를 것이다. 요즘 들어 육식 종족을 향해 과격 행위를 하는 그 단체에 대한 지원이 내려오는 경로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위원회가 나온다는 것을.
육식을 하는 종족들과 그들이 선출한 정치 집단은 반(反)위원회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어지간해서는 마음을 바꾸려 들지 않았다. 아마도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느낀 것 같았다. 그렇게 감이 유달리 좋은 종족이 종종 존재한다.
이유야 어쨌건 위원회에 적대적으로 나오는 집단을 처리하는 유서 깊은 방법을 게드윅은 알았다. 조각내서, 뿔뿔이 흩어 버린다. 연대를 끊고 집단으로서의 정체성을 묽게 흐린다.
현실적 제약이라는 핑계하에, 그들 모두가 한 차원으로 이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주는 시간을 들여 단계적으로 진행될 것이며 목적지도 여러 곳으로 쪼개질 터.
종족 청소라는 간단한 방법을 택할 수 없는 현실에서 그것이 가장 쓸 만한 패였다.
“그래서, 이들을 이주시킬 후보지는?”
“여기 있습니다.”
부관이 허공에 뜬 문자열을 넘겼다. 뒤이어 나타난 차원 목록을 보던 게드윅이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 차원 #93-111이 왜 여기 들어가 있어?”
부관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카바이트는 지구에 파견 보낸 도테스가 그리워졌다.
“그 차원 원주민들 종족 비중이 어떻게 되나?”
부관이 더듬거리면서 답했다. 카바이트는 자신의 의도를 파악 못 하는 부하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그걸 몰라서 물어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질문은 대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자성과 반성을 요구한다.
“문제점을 못 느끼겠나?”
“······.”
카바이트는 호통친다.
“인간이 없지 않나, 인간이!”
“네?!”
“기억을 잘 더듬어 보게. 우리가 대규모로 집단 이민을 주선할 때, 그들이 옮겨 가는 새로운 보금자리가 될 차원의 종족 구성이 어땠는지.”
“아!”
부관은 뒤늦게 이해했다.
“하지만 매뉴얼에 명시적으로 적혀 있지가 않아서···.”
“매뉴얼에 없어도 다들 그렇게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법일세. 후보지를 다시 정리해 오게.”
“네, 알겠습니다.”
풀이 죽은 부관이 사라지자 카바이트는 인간으로 치면 깊은 한숨에 해당하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그때였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군.”
그가 그리워하던 옛 부하로부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게드윅은 도테스를 지구로 파견 보냈다. 명목상으로는 그곳의 새로운 관리소장으로 취임한 엔델리온의 공주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게드윅은 그에게 비밀 임무를 하나 맡겼다. 그녀 곁에 자신의 사람 하나를 붙여 둘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내용을 살피던 게드윅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바로 보고를 드려야겠군.”
그는 바로 자신의 직속 상관인 동족 출신 대위원에게 대면을 요청했고, 그것은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급히 말씀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지구에서 온 소식입니다.”
잠시 후 게드윅은 카바이트 대위원 앞에 서 있었다.
“무슨 일인가? 게드윅.”
“엔델리온의 공주가 이상한 짓을 하는 중입니다.”
게드윅은 부하 도테스가 관찰한 내용을 그대로 대위원에게 전달했다.
지구의 드래곤 로드가 사망하고, 공주가 그의 시신 관리인으로 나서서 꽤나 깊숙하게 참여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구의 드래곤들은 구분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것은 위원회의 관리로서 나선 공무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개입한 것이었다. 상부에 따로 보고를 하지도 않았고.
그 말을 들은 대위원은, 혀를 차는 것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어조가 평소답지 않게 신랄하게 느껴져서 게드윅은 의아해했다.
“공주가 공식적으로 보고한 내용은?”
시신 관리인으로서의 활동은 개인사라지만, 지구를 담당하는 관리로서 상부에 보고서는 제출해야 했다.
카바이트는 그 내용을 공중에 띄웠다. 드래곤 로드의 사망과 관련된 지구 내 움직임이 기술되어 있었다. 대위원은 거기에서 고강도 세무 조사 타깃이 된 ‘아시프-666’과 관련된 정보도 확인했다. 지구의 드래곤들도 모두 알고 있는, 공공연한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 담담한 사실 위주의 문장이었다.
“죽은 드래곤이 아시프-666에게도 유산을 남겼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드래곤 로드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용은···.”
“지구에서 젠킨슨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화룡입니다.”
그 부분에 대한 공주의 분석은 꽤나 신빙성이 있었다. 대위원은 젠킨슨의 프로필과 그간 행적을 유심히 읽더니 문득 묻는다.
“혹시, 저 드래곤의 피를 확보해 놓은 것이 있나?”
게드윅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바로 데이터를 확인한 뒤 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 이미 죽은 전대 드래곤 로드의 혈액은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공주에게 연락하면···.”
“아니, 연락하지 말게. 어차피 그 드래곤의 피는 더 필요하지 않네.”
게드윅은 말에 함축된 의미를 이해했다.
더 필요하지 않다는 건 이미 손에 넣었다는 뜻이다.
위원회는 가상의 적인 그들을 견제하기 위해 연구 목적으로 용혈을 수집하고 있다. 하지만 카바이트들이 그 일부를 빼돌려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걸 게드윅은 알았다. 엔델리온 등 다른 종족에게는 물론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된다.
다만 정보를 흘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동족의 고위층들이 그리하고 있는 것은 알지만 이유까지는 몰랐으니까.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오래된 의문을 입에 올리자 대위원은 주저하지 않고 순순히 답해 주었다.
“그 피로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냐고?”
그는 끌끌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네도 이제 승진을 했으니, 위원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자신과 동족의 일원으로서의 자신을 명백하게 구분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고 보는데. 어떤가?”
위원회를 구성하는 다른 종족에게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는 종족의 비밀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볼 준비가 되었냐는 질문이었다.
카바이트는 확신을 담아 답했다.
“물론, 준비되어 있습니다.”
대위원이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아주 좋네. 왜냐면 지금부터 자네에게 한 가지 시킬 일이 있는데, 이건 대위원으로서의 지시가 아니라 카바이트라는 종족의 먼저 깨어난 자로서의 지시거든. 그리고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네도 한 가지를 알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군.”
그는 허공에 영상을 띄웠다.
“여길 보게.”
게드윅은 고개를 돌렸다. 대위원이 만든 영상은 차원계의 중심부, 그중에서도 가장 깊숙한 근원에 해당하는 위치를 비추고 있었다.
“아, 이건!”
카바이트가 감탄을 터뜨렸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도··· 아름답군요.”
검은 외공간 한복판에 균열이 생겨나 있었다. 그곳으로부터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이 물결치며 흘러나온다. 그것이 비산하며 증발하기 전 조폐국이 준비한 마도구가 그것을 끌어모았다. 속칭, 채굴기라고 불리는 장비였다.
카바이트는 찬란한 빛의 번뜩임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달란트.
“그래, 아름답지. 아름다운 동시에··· 너무도 값진 것이기도 하지.”
게드윅도 알고 있는 이유를 대위원이 입에 담았다.
“우리에게 영생에 가까운 삶을 담보하는 아름다운 피니까.”
가볍게 덧붙인다.
“저것을 우리 손에 넣어서 다행이지. 우리 같은 뛰어난 종족이··· 용족보다도 짧은 인생을 살다가 그냥 죽어 버리는 것은 너무도 아깝지 않은가?”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영생에 가까운 삶이지, 영생이 아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희생도 동반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진짜 영생을 누리는 자들을 알고 있지.”
게드윅이 동의했다.
“태초의 종족···.”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카바이트 외 다른 종족에게 절대 누설되어서는 안 되네.”
“알겠습니다.”
“게드윅, 생각해 보았는가? 그들이 누리는 진짜 영생의 비밀이 무엇일 것 같은가? 영구 기관 같은 건 존재할 수 없어. 달란트를 활용한 영생에도 한계가 있는 것처럼, 기계에는 끊임없이 연료를 쏟아부어야 해. 그렇다면 태초의 종족에게 마르지 않는 생명을 부여한 그 연료는 무엇일까?”
카바이트는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릿속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관이 답을 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이 과연 무엇을 먹고 살았는지에 주목했다네.”
대위원이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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