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16
217.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14)
***
젠킨슨은 깨닫는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이 느낌, 처음이 아니다. 아주 오래전···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옛날에.’
이미 겪은 적 있다.
스며드는 온기. 몸을 감싸는 걸쭉한 액체. 보이는 것은 없지만, 단단한 벽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 깊은 안정감을 담은 그 울림.
‘그래, 이건.’
젠킨슨은 대략 2천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부화하기 전 알 속이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2천 살이나 먹은 고룡이 알껍데기 안에서 의식을 되찾은 사건.
경악한 그는 소리지르고 발버둥치고 싶었다. 하지만 심리적 동요와 상관없이 몸의 움직임은 느긋하기만 했다. 젠킨슨은 자신이 철저한 관찰자 입장임을 다시 실감한다. 고룡의 정신이 ‘갇힌’ 육신은 바깥의 목소리에 장난치듯 반응했다. 젠킨슨의 속내와는 달리 그 몸짓은 무척 태평하기만 했다.
고룡은 고뇌한다.
‘설마 환생이라도 했나?!’
드래곤 하트에 몇 겹으로 중첩된 정체 모를 마법이 그를 죽인 것인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기억을 고스란히 가진 채 윤회했나? 영화나 소설처럼?
곧 부정한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고룡은 좀 더 현실적으로 사고하기로 했다. 차라리 영혼이 강제로 몸에서 분리되어 엉뚱한 용에게 이식되었다는 가설이 그럴싸하게 여겨졌다.
‘한 몸을 두 영혼이 나눠 쓰는 상태?’
몸의 움직임에 그의 의지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지금 이 육신을 통제하는 주체는 젠킨슨이 아닌 다른 존재다.
배아의 영혼이 주도권을 가진 걸까?
그런 것 치고는 오감이 너무 생생했다. 심지어 몸 주인의 생각과 감정까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 아이는 부모로 여겨지는 남녀의 음성에 호기심을 느끼고, 그들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하고 있다. 반면에 젠킨슨이라는 관찰자의 존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상태.
원래 빙의라는 게 이런 것인가? 좀 이상하다.
‘그렇다면 이 몸 주인은 대체 누구지?’
젠킨슨은 머릿속 용족 목록을 살폈다. 정확히는 아직 알을 품고 있는 이들을.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아나이스, 그 독룡!’
그녀는 드래곤 로드의 아이를 품고 있다. 아직 부화하지 않은 배아. 그걸 깨달은 순간 정신이 부글거리며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로드의 자식한테 빙의 된 건가?!’
민준의 음모론이 떠오른다. 로드가 영혼 채로 옮겨 탈 몸을 제작하기 위해 자손을 많이 남겼다는 억측.
‘하지만 왜 로드 대신에 내가 빙의된 거지?!’
생각해 볼수록 이번 가설도 말이 되지 않았다. 로드의 아이라면, 껍질 밖에서 속삭이는 저 둘은 누구인가? 알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뿐이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는 아나이스의 것과 상이하다. 더군다나, 곁의 남자는 또 누구인가? 죽은 드래곤 로드가 난중(卵中) 대화를 시도할 리는 없다.
생각할수록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젠킨슨에게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남녀의 목소리였다.
무기력하게 시간이 계속 흘렀고 젠킨슨은 절망스러운 심정으로 나날을 견뎌냈다. 그럴수록 껍질 밖의 음성은 더 명료해졌다. 고룡은 비로소 그 의미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언어는?’
드래곤의 고유어는 맞지만.
‘요즘도 이런 단어와 문법을 구사하는 용이 있던가?’
젠킨슨이 어렸을 때도 접하기 힘들었던 예스러운 구어체다.
그의 할아버지뻘 되는 이들이나 쓰던 말투.
더군다나 계속 속삭이는 내용 역시 상식 밖이었다.
– 잊지 말아라. 우리는 특별한 드래곤이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고결한 피를 지켜야 해.
– 순수한 혈통을 보존하는 것이 네 의무다. 점차 우리 같은 이들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걱정하지 말아라. 너도 결국은 찾을 수 있을 테니.
– 네가 부화하는 날이 기대되는구나. 세상의 빛을 보는 그날 작은 눈망울에 우리를 담고, 더 나아가 네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렴. 그리고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용들 생김새를 보면 그제서야 실감하겠지.
– 그래, 우리가 얼마나 특별한 존재인지 알게 될 거야.
맹세하건대 젠킨슨은 저런 식으로 말하는 드래곤을 알지 못한다.
대다수의 용족이 알을 낳은 직후부터 태담(胎談)을 시도하는 건 맞다. 드래곤이 얼마나 위대한 종족인지, 아이가 부화하고 나서 얼마나 강인한 존재가 될 것인지 교육한다.
하지만 그들이 심어주는 자부심은 드래곤이라는 넓은 테두리, 종족의 가치에 집중하지 ‘남들보다 특별한 드래곤’같은 개념은 거론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
그렇게 중얼거리던 젠킨슨의 정신이 얼어붙었다.
방금 떠올린 문장을 되뇐다.
‘시대착오적인.’
잠깐, 설마?
그의 의혹에 방점을 찍는 목소리가 들렸다.
– 네 영광스러운 이름을 기억하렴. 아게르-피쉬코-코이스-할레키아-류브라이-···.
요즘은 누구도 저런 구시대적인 이름을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젠킨슨이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는 껍질 밖의 드래곤이 다음에 발음할 단어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젤-아젤-세크나트-코이스-아게르!’
그것은 드래곤 로드의 본명이다.
‘아아, 맙소사!’
이제서야 답을 찾는다.
젠킨슨은 지금 드래곤 로드의 오래전 기억을 보고 있었다. 아마도 마법이 그의 잠재 의식 밑바닥까지 스캔한 뒤 재구성한, 현실과 구분이 어려운 가상 현실.
이건 단순히 보는 걸 넘은 수준이다. 그때 로드가 떠올린 생각과 가슴에 품은 감정, 오감으로 인지한 모든 것을 고스란히 체험하고 있다.
그는 유언을 떠올린다.
‘당신은 다음 로드에게 심장을 넘기려고 했지요. 후대에게 이걸 보여주고 싶었던 겁니까?’
자신의 기억을.
굳이 말이나 설명을 덧붙일 필요도 없이, 과거의 자신이 되어 모든 걸 고스란히 느껴보라는 의도일까?
‘하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젠킨슨은 영혼이 으스러지는 공포를 느꼈다.
이해한다. 아마도 좋은 의도일 것이다.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기 때문일 터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시점부터입니까?!’
기억의 재생이 시작되고 얼마나 긴 시간이 지났는가? 적어도 수십 여일은 흐른 것 같다. 껍질 밖 목소리를 통해 대충이나마 추측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사이 생략된 기억은, 잘려 나간 시간은 전혀 없었다. 고룡의 의식은 연속성을 유지한다. 젠킨슨은 여태 겪은 시간 내내 배아의 정체 외 중요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불필요한 체험이다. 쓸데없이 긴 시간을 그의 정신은 이미 허비했다.
그럼 이 다음은? 젠킨슨은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고작’ 수십 여일 정도는 문제도 아닐 수 있다. 사고와 감정만 살아있는 상태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한 관찰자로 보낸 지난 수십 여일 정도는.
진정으로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의 나날이다.
‘설마··· 아, 이건 아닙니다. 이런 건 안 됩니다. 로드!’
그는 정신으로 절규했다.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사건만, 하이라이트만 추려 전달하면 될 것이다.
왜 지금처럼 리얼 타임이어야 하는가!
이 현상은 언제까지 지속되는가?!
젠킨슨은 뒤늦게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드래곤 하트의 마법은 아직 완성되기 전이었다.’
이게 의도된 시기가 오기 전에 드래곤 하트를 ‘관찰’한 부작용이라면? 편집이 끝나기도 전의 로우 데이터(Raw-data)를, 날 것의 영상 그대로 틀어버린 것이라면?
그래서 로드의 의도와는 달리 생애 최초의 순간부터 현실과 같은 감각으로 겪게 된 것이라면?
‘맙소사, 이건 안 된다. 이건 아니다!’
젠킨슨은 창백한 예감을 직시한다.
그리고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드래곤 로드가···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었지?!’
***
엘라후-프라가 교단의 반란은 밤이 끝나기도 전에 제압되었다.
펠릭스를 따르는 주교들은 전기와 통신을 복구했다. 구금되어 있던 사제들은 그 짧은 시간 사이 벌어진 어마어마한 기적을 전해 들었다. 풀려난 그들은 부활의 성당 앞 광경에 경악했다.
“세상에, 이게 다 무엇···!”
그곳에는 신의 징벌을 받은 죄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죄는 이미 사해졌으나 이미 집행된 신벌이 무(無)로 돌아가지는 않은 것이다.
성당 주변에는 괴로워하며 몸을 뒤틀고 발버둥치던 모습 그대로 소금 인형이 된 사제들이 늘어섰다. 고온의 불꽃 때문에 단단하게 구워진 그들은 불이 꺼지고 나서도 그 모습 그대로 남았다.
현장에 도착한 교황 대리는 성당 입구를 보았다. 문이 열려 있다. 화신께서는 홀로 저 안으로 들어가셨다고 한다. 동행을 명하지 않으셨기에 누구도 감히 따라 들어갈 수 없다.
따라서 교황 대리는 거기로 향하는 대신에 누군가를 찾았다. 몸 곳곳에 핏자국이 가득한 총대주교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가서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펠릭스 주교!”
짧은 시간 만에 재회한 배교자는 교황 대리를 포위할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바뀌지 않은 부분이라면, 자신의 믿음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는 강인한 눈빛 정도였다.
‘아니.’
교황 대리는 곧 판단을 수정한다.
‘오히려 믿음이 더 강해진 듯하군!’
펠릭스는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오셨습니까.”
“······이야기는 들었소.”
“오늘 사건에 대해 사과를 드리진 않겠습니다. 저는 회개했으니까요. 신께서 이미 사하신 죄를 다시금 이 자리에서 당신과 논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교황 대리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저 감탄한다. 신의 뜻이 행사되는 방식은 어찌나 오묘한지, 필멸자들의 얕은 셈으로는 측량이 불가함을 되새길 뿐이다. 신이 용서한 자를 교황 대리가 다시 용서할 필요도 없었다.
펠릭스는 구원받았다.
“그런데.”
교황 대리는 펠릭스의 목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을 본다.
“왜 치료하지 않은 것이오?”
신께서 직접 세례를 내린 상처는 깊었다. 하지만 펠릭스라면 얼마든지 직접 치료가 가능하다는 걸 그는 안다. 왜 방치했지?
회개한 배교자가 답했다.
“저는 신성력을 잃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교황 대리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잖소?”
“죄사함 받았다고 과거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소금이 되고 불에 먹힌 사제들이 다시 살지 못하듯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용서하셨으나 벌을 면제하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신의 저울은 그토록 철저합니다.”
펠릭스의 말 때문에 교황 대리는 혼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상념에 깊이 집중할 수가 없었다.
—!
부활의 성당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오오!”
“시작되었다!”
“화신께서 우리가 모은 신혈을 다시 거두어 가신다!”
감격한 주교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고 성당을 향해 기도를 시작했다.
이제 주변에 멀쩡하게 선 이들은 이방인들뿐이었다.
“공주님. 공주님도 느껴져요?”
드래곤이 불안한 눈빛으로 묻는다.
“그래, 나만 느낀 게 아니지?”
“네. 저 빛, 누군가를 부르고 있어요.”
저 안으로 민준이 들어간지 십여 분 만에 시작된 변화였다. 둘은 이미 민준이 달란트를 흡수하는 장면을 멀리서 관찰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또 달랐다.
화아아아!
부활의 성당은 이미 본래 외관을 찾아볼 수 없다. 그 안에서 터져 나온 압도적인 빛기둥이 건물 전체를 잠식한 뒤였다. 그것은 하늘 높이 치솟더니 구름을 뚫고 멀리까지 나아갔다.
그걸 보던 델은 어떤 구시대적 개념을 깨닫는다.
“저건 등대야.”
델뿐만이 아니라 성당 주변의 모두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빛은 부르고 있다. 여기 있는 필멸자들이 아니라 더 멀리 머물고 있는 존재를. 혹은, ‘존재들’을.
그녀가 중얼거린다.
“다른 태초의 종족을 부르는 건가?”
하지만 그들은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서 바로, 이렇게 쉽게 깨울 수 있다면 다른 차원에 안배를 남길 필요도 없었을 터다.
그때.
“어?”
드래곤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엔델리온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울림을 그는 해석할 수 있었다. 등대가 뿜는 파동은 유령들의 소통방식, 즉 영파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지한 대로, 민준은 멀리 있는 누군가를 여기로 호출하고 있다.
심지어 하은성은 한 발짝 더 나아가 그가 상대를 어떻게 호칭하는지까지 들었다.
“헉?!”
바로 그 호칭이 문제였다.
하은성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한 개념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민준이?
유령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저기, 공주님.”
“어?”
그는 몇 번을 주저하다가 말했다. 돌려 말하려고 해도 적합한 문장을 찾을 수 없었다.
“혹시 요원님한테, 숨겨 놓은 ‘아들’이 있었나요?”
그 즉시 하은성은 자기가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펑!
펑! 퍼펑!
무표정하게 굳어버린 델의 등에서 굵직한 촉수가 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걸 본 사제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신을 울부짖었는데 그 외침 중 일부가 델의 말과 의미적으로 겹쳤다.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로 공주는 드래곤에게 묻는다.
“지금, 신이시여,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