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5
25. 일로 만난 사이 (5)
***
델과의 관계가 정확하게 언제부터 틀어지기 시작했는지 민준은 기억하지 못한다.
델의 정신이 정확하게 언제부터 뒤틀렸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혼 초기에 민준은 막연하게 예감했다. 델이라면 앞으로 쭉 함께 갈 수 있을 거라고. 그녀와 함께 있으면 오랜 시간 마모된 자신의 정신이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서로 의지하고 의지 받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물론 슬프게도 그 예감 또한 틀렸지.”
민준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머릿속에서 가속했다.
“시작은 섬뜩한 시선이었어.”
밥을 먹다가, 옷을 입다가, 잠깐 졸다가, 책을 읽다가, 손을 씻다가··· 일상의 평범한 순간 속에서 문득 고개를 돌리면 델이 바라보고 있었다. 평온했던 지난 80여년 간 봤던 것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민준은 그 눈빛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살기였다.
결국 그녀가 민준을 죽이기 위해 장기적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물증을 잡은 날 비로소 결혼은 파국을 맞이했다. 끔찍한 하루였다.
“지금도 그날 생각을 하면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다니까.”
그녀의 정신이 왜 그렇게 빨리 망가졌는지 민준은 모른다. 그가 확인한 바로도 델은 처방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차원을 순회하며 수형자와 면담하는 의사가 주는 파란 알약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델은 미쳐버렸다. 둘의 관계가 끝난 그날 민준은 집요하게 추궁했다. 델은 확답을 피했지만 어떤 물음에는 침묵하며 간접적으로 긍정했다. 스무고개와 같았던 끔찍한 질의의 결과 민준은 세 줄의 문장을 도출할 수 있었다.
“하나, 델은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
단조로운 어투로 잔인한 말을 옮긴다. 이미 몇 번 했던 이야기일 수 있지만 상관없었다.
“둘, 그 이유는 나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내가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쳤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셋, 하지만 둘 다 수형자인 상태에서는 델이 날 죽일 수 없다. 수형자 살해, 즉 위원회의 자산을 손상시키는 행위는 재물손괴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수형자가 그런 위중한 범죄를 저지르면 기억소거 다음 단계의 형별을 받는다.
영혼소거.
그것은 델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현생의 연이 다음 생에도 이어진다는 미신을 신봉했기 때문이다. 가중 처벌을 받고 영혼이 소거되면 그녀는 윤회할 수 없다.
“맙소사.”
브래들리는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죽어야 자유로워진다는 발상은 결국 네가 달란트를 벌어서 석방된다는 가능성을 제로로 보는 거군.”
“더 기가 막힌 게 뭔지 알아?”
그녀는 자신이 먼저 퇴소하고 자유인이 된 다음 민준을 죽이겠다는 망상을 품었던 것이다.
그러면 잡혀서 처벌을 받더라도 영혼 소거는 면하고 다시 한번 수형 생활을 하면 되는 일이니까.
“아직도 마지막으로 봤던 날을 잊을 수가 없어.”
그 차원에서 임무가 종료되고 둘이 다른 세계로 찢어지도록 결정되었을 때, 민준은 다시는 델과 마주칠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퇴직금인 50만 달란트 역시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고 델이 일하는 방식으로는 저축이 불가능했다. 석방 후 민준의 살해를 계획한다는 사실도 위원회로 보고되었으니 앞날은 더욱 어두웠다.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몇 천 년은 걸리리라.
“이미 붕괴하기 시작한 정신인데, 그쯤이면 아예 생물로서 구실도 못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수형자들이 마지막으로 모여서 각자 인사를 나누고 갈 길을 떠나던 그 순간 민준은 무심코 델과 눈을 마주쳤다. 서로 말을 안 섞은 지 오래된 시점이었기에 그는 평소처럼 다시 외면하려 했다.
그런데 상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예전에 익숙하게 봤던 그 모습처럼 델은 수줍은 듯 웃으며 입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그저 망상장애 환자의 헛소리로 치부했던 문장을.
‘당신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먼저 다시 입을 연 것은 민준이었다.
“어쨌든 계획 일부는 이미 성공한 셈이지. 먼저 석방이 되었으니까.”
민준의 예상은 틀렸고 이제 남은 수순은 뻔했다. 하지만 브래들리는 희망을 잃지 말라는 듯 어떤 가능성을 꺼내 놓는다.
“우, 우리··· 긍정적인 면을 보자고.”
머리를 굴리며 위로할 말을 찾았다.
“범죄자로서 기억을 되찾는다고 해서 꼭 더 끔찍하고 난폭하게 미치지는 않을 거야.”
“미친 사람이 또 미치면 한 바퀴 돌아서 정상이 된다고? 아니면 50만 달란트짜리 범죄의 추억 덕분에 오히려 사람이 차분해질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지. 델이잖아.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망설이다가 다시 그 이름을 꺼냈다.
“텔레시아처럼 될 수도 있잖아.”
“······.”
“······.”
이번 침묵은 조금 더 길었다. 브래들리는 말실수를 한 것을 깨닫고 얼굴을 흐렸다.
민준은 소리 없는 말을 입 속에 머금고 있다가 결국 그 내용물을 바꿔 버렸다.
“지금 더 걱정되는 부분은 그 여자의 종족이 뭔지도 모른다는 거야.”
방금 전 사무실에서 서로 대화가 헛돌 때 브래들리는 델이 드래곤인 것으로 잠시 착각했었다.
민준은 차라리 그녀가 정말 용족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텔레시아 때 겨우 알게 되었지만 퇴소 순서는 두 단계로 나뉘어지잖아? 처음에는 기억을 돌려주고 그 다음에는 본래 몸을 돌려주고.”
이전 차원 원주민들도 인간종이었고 민준은 당시 지금과 같은 몸으로 활동했다. 델 역시 그때 본 외양은 인간이었지만 진짜로 어떤 존재인지는 모를 일이다.
“혹시라도 내가 손댈 수 없는 무서운 능력을 지닌 종족이면···.”
봉인되었던 그 힘을 100% 발휘할 수 있게 된 델은 더 강력한 광인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브래들리가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에이, 설마.”
둘은 그렇게 잠시 더 델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은 이야기의 방향을 선회했다. 이 이상 근심거리를 싸매고 한탄해 봤자 소용없다는 민준의 생각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넌 얼마나 남았어?”
그러자 브래들리가 씩 웃었다.
“앞으로 1만 달란트.”
순식간에 화제가 넘어갔다. 분위기도 바뀐다.
그의 답을 들은 민준은 느릿하게, 하지만 힘을 담아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퇴직금이 얼마였다고 했지?”
“7만 달란트.”
“중간에 엉뚱한 일 때문에 달란트 날려 먹은 일도 없었지?”
“당연하지. 내가 너냐?”
“그럼 잘 하면··· 나머지를 지구에서 다 채울 수도 있겠군?”
“그럴 생각이야. 너도 느끼겠지만 이 차원, 이상하게 밀입국자가 많다니까. 가만히 있어도 달란트가 주머니로 걸어 들어오는 꼴이야.”
민준도 동의하는 바였다. 그것이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 보다 이 차원에 오래 머무는 이유 중 하나였다.
둘은 그 뒤로는 계속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수형자는 바 입구 앞에서 짧게 인사를 나눈다. 민준이 등을 돌리려고 하는데 문득 브래들리가 물었다.
“저기, 아까 텔레시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야. 혹시 내가 이런 말 하면 기분이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그럼 하지마.”
그는 피식 웃더니 말했다.
“······넌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민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 정도라면 괜찮군.”
“자유를.”
“자유를.”
수형자들 간 오랜 습관처럼 덕담을 나누고 헤어졌다. 다음 만날 날이 언제가 될 지는 알 수 없었다.
민준은 상가까지 짧은 거리를 잠시 걷는다. 그리고 델에 대한 생각 대신에 브래들리가 마지막으로 한 말을 떠올렸다. 그 짧은 문장의 의미는 간단했다.
‘민준, 너는 퇴직금을 내고 석방이 되더라도 텔레시아처럼 되지는 않을 거다.’
먼 과거의 기억을 잃은 남자는, 찬 공기가 깔린 길을 걸으며 비교적 가까운 과거를 떠올린다.
***
그들이 활동을 함께 한 차원은 ‘아쉬탈’이라고 불렸으며, 그곳의 지성체가 거주하는 36개 행성과 145개의 우주기지를 영토로 삼은 공화국은 단 한 명의 독재자에 의해 오랜 시간 지배당했다.
독재자는 다른 차원까지 악명을 떨칠 정도로 지독한 자였다. 철저한 공포정치로 국민들을 억눌렀으며 반항하는 자는 처참하게 유린당하고 죽었다. 집권 기간 중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들 수는 아직까지 집계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수십억 명은 된다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당시 폭정 중 가장 유명하고 끔찍한 사례를 하나만 들자면 개척행성 XE-21의 비극이 있다.
그 기억을 떠올린 민준이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난 기록으로만 접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
그곳 시민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첩보를 입수한 독재자는 거기로 향하는 모든 식량운반선 운항을 예고 없이 정지시켰다. XE-21은 애초에 공업 행성으로 설계되었고 식량을 99% 외부에 의존하는 환경이었다.
행성민들은 굶주림에 지쳐 우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행성을 빼곡하게 둘러싼 위성에 의해 격추당했다. 비상 식량까지 모두 소모한 뒤 그곳에서 펼쳐진 지옥상을 제대로 파헤친 자료는 없다. 부모가 자식을 잡아먹고 인간이 인간을 사냥하는 지옥도조차 3년 이상 가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그 사건이 결정적이었어. 결국은 측근들조차 등을 돌렸다.’
쿠데타가 일어났다. 반역을 두려워한 독재자는 가장 가까운 부하도 모르는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다. 전쟁은 예상보다 오래 이어졌지만 많은 희생의 대가로 결국 승리는 혁명군의 손아귀에 떨어지고 말았다.
숙청을 목전에 둔 독재자는 겁에 질리거나 애원하기는커녕 조용히 웃음을 흘리며 스위치 하나를 눌렀다고 한다.
‘아무도 몰랐던 거지. 그 광기가 어디까지 닿아 있었는지.’
그 순간 공화국 내 전력발전시설과 집단농장, 통신기지, 정거장 등 기간시설의 90% 이상이 자폭하며 우주 먼지로 사라졌다. 그리고 행성 사이를 비행하며 모든 것을 공격하고 뜯어먹는 우주 벌레를 막아내던 방어막마저 부서져버렸다.
그제서야 혁명군은 오랜 시간 독재자가 품고 있던 추악한 계획과 직면했다. 이런 준비를 할 정도라면 아무도 모르게 행성핵에 자폭장치를 심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신을 거역한 국민들이 원시시대로 돌아가 오랫동안 야만과 굶주림에 시달리며, 우주 벌레에게 사냥 당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나가기를 기원한 것이다.
그야말로 지독한 악의였다.
그 와중에 독재자의 시체는 작은 조각조차 남지 않았다. 소문에 의하면 분노한 혁명군에 의해 분자 단위로 찢겨 소멸되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남은 것은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이 파괴된 황폐화된 땅과 오랜 전쟁 탓에 지치고 상처 입은 수백 억의 국민들이었다.
‘그제서야 위원회가 개입을 시작했다.’
위원회는 이민자를 그곳에 보내는 대신 망가진 사회와 경제 체계를 재건할 태스크를 구성하여 파견했다. 물론 전원 기억 소거를 당한 수형자들이었고 텔레시아도 그 중 한 명이었다.
3백년 넘게 진행된 재건 사업 도중 몇 차례나 인원이 보충되었고 민준도 후반에 참여하여 델을 그곳에서 만났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세운 수형자가 바로 텔레시아였다.
‘모든 이들의 어머니.’
아쉬탈의 원주민들이 그녀를 부르던 애칭이었다.
다른 수형자가 로테이션 될 때에도 그녀만큼은 끝까지 남아서 아쉬탈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원주민들은 그녀가 수형자라는 걸 몰랐지만 설사 알았다고 해도 뭔가 달라졌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 모두는 텔레시아를 사랑했으니까.’
그녀는 전투력도 딱히 뛰어나지 않았고 훌륭한 엔지니어도 아니었다. 그녀의 장점은 행정능력과 정치감각에 있었다.
내란으로 와해 직전이었던 혁명군을 대신하여 텔레시아는 직접 위원회와 담판 짓고 원조품 규모를 늘렸으며 몇 차례의 증원을 이끌었다. 전쟁 후 엉망진창이었던 아쉬탈의 경제를 빠른 속도로 복구한 것도 그녀의 업적이었다.
그녀가 아쉬탈 재건을 위해 보인 능력은 압도적이었고 차원민 모두를 가족처럼 여기는 태도는 많은 이를 감명시켰다. 그들은 텔레시아에게 진심 어린 애정과 존경을 보냈다.
‘텔레시아도 그들 모두를 사랑했지.’
그곳은 텔레시아가 수형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파견된 차원인 데다가 3백년 이상의 시간을 거주했으니 정이 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쉬탈 재건 작전이 공식 종료를 앞뒀을 때, 공로를 인정받은 텔레시아는 특별 사면 대상으로 선정되었다. 간단하게 말해 그동안 모은 달란트가 얼마든 상관없이 즉각 석방을 해주겠다는 뜻.
‘고마워, 다 너희들 덕분이야!’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동료들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들려주었다. 자유의 몸이 되고 나서도 아쉬탈로 돌아와서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는 수명을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다.
텔레시아의 퇴소식 날에는 함께 고생한 수형자 모두 한 자리에 모여 그녀를 축하했다.
다들 들떠서 떠들던 소리가 귓가에 선했다.
‘특별 사면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내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야.’
‘우리도 언젠가는 저렇게 될 수 있겠지?’
‘고마워 텔레시아. 당신은 이 차원민들 뿐만 아니라 함께했던 우리 수형자 모두에게도 희망을 줬어.’
다들 흥분한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본래의 몸을 되찾기 이전에 기억을 먼저 돌려주는 것이 순서.
긴장감 속에서 텔레시아가 호흡을 들이켠 순간 무언가 시작되었다.
지금 돌이켜 봐도 민준은 그때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법인지, 기술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의 인지를 벗어난 다른 무언가인지. 어떤 일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줄 단서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텔레시아의 몸 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두가 숨을 죽인 상태에서 몇 초가 지나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텔레시아?’
누군가가 나지막이 이름을 부른 그 순간.
텔레시아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동료들을 보았다. 다음은, 밤 하늘에 펼쳐진 무수한 별을 보았다. 저 우주 곳곳에 흩어져 있을 아쉬탈의 국민들. 그들이 살아가는 보금자리. 그녀가 재건한 그 드넓은 세계를 보았다.
그리고는 잔뜩 일그러지던 그녀의 얼굴.
모두가 당혹감을 느꼈다.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속삭임이 돌던 중.
텔레시아가 무너졌다. 무릎을 꿇고 몸을 떨었다. 공황 상태에서 고개를 젓고 거친 울음을 토해냈다. 꺽꺽거리는 소리에 섞여서 어떤 말을 쉴 새 없이 중얼거렸다.
민준이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었던 그 말은 이것이었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오직 그 말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던 그녀는 위원회에게 울부짖었다. 당장 자신을 이곳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위원회는 그녀의 기원에 응하여 문을 열어 주었고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다.남겨진 자들은 모두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3백년 동안 아쉬탈을 위해 자신을 바친 한 수형자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남은 죄수들까지 모두 아쉬탈을 떠나고 얼마 뒤, 그들은 텔레시아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
민준은 왁자지껄한 소리가 차오르는 거리를 잠시 더 걸었다.
되풀이되는 생각.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다.’
그것은 예감이라기 보다는 결심과 다짐에 가까웠다.
민준은 되뇌었다. 그가 잃은 기억이 어떤 것이든 되찾고 나서 자신을 갉아먹을 일은 없을 거라고.
그를 비롯한 수형자들은 당시 상황을 통해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매우 끔찍한 가정이었지만 그 이상 합당한 설명을 찾을 수가 없었다. 텔레시아가 되찾은 기억이 어떤 것일지, 그녀가 과연 무슨 죄를 짓고 수형 생활을 시작한 것인지.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알려주지 않았고 누구도 문의를 넣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직감했다.
그리고 텔레시아의 마지막에 대한 기억은 다른 누구보다도 민준에게 더 강렬하게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민준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언어를 읽는다.
-‘죄수식별번호: 아시프-666’님에게 책정된 퇴직금(즉시석방 보석금)은 5,124,990 달란트입니다.
민준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텔레시아에게 책정된 퇴직금은 120만 달란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