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4
24. 일로 만난 사이 (4)
주르륵!
민준이 똥 씹은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사이.
테이블 위에서 갑자기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
그제서야 시선이 돌아갔다. 뭔가를 발견한 민준의 얼굴에 전과 결이 다른 당혹감이 번졌다.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른다.
“저기··· 캐시?”
캐시는 손님 잔에 홍차를 따르던 자세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문제는 이미 찻물이 흘러나오던 상태였다는 거다. 손의 각도를 그대로 유지한 채 무슨 이유에선지 손을 멈췄고, 그 결과는 범람하는 찻잔이었다.
“어, 넘친다. 넘쳐요!”
브래들리가 소리쳤지만 캐시는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결국 주전자가 빌 때까지 그 자세 그대로 얼어 있었다.
“······캐시?”
여전히 대답이 없다. 테이블 위는 옅은 주홍색 액체로 흥건하게 젖었다. 옅게 한숨을 쉬며 민준은 손가락을 튕겼다.
화앗!
젖었던 테이블과 바닥이 일순간에 뽀송뽀송해졌다. 브래들리의 얼굴에 이채가 감돈다. 마법 자체는 대단한 것이 아니지만 속도와 컨트롤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본 것이다. 차라리 티테이블 통째로 태워버리는 것이 쉽지 저렇게 깔끔하게 물기만 날리는 건 어려웠다.
“솜씨는 여전하구만.”
“됐고. 어쨌든 술이라도 사라 이 말이지? 좋아. 나가자고.”
브래들리가 옆을 가리킨다.
“이 아가씨는 이대로 놔둬도 돼?”
“캐시? 캐시? 캐시?”
세 번을 그렇게 부르자.
눈동자도 돌리지 않고 그녀가 답했다.
“······네.”
“우리는 나가서 따로 밀린 이야기 좀 해야할 것 같아. 오늘 수고 많았어. 그냥 이대로 퇴근하라고.”
“······네.”
“아··· 저기, 캐시? 진짜 괜찮지?”
“······네.”
민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쓱하게 말한다.
“나갈 때 문단속 잘 하고.”
“······네.”
마지막 대답을 할 때까지도 그녀는 주전자를 꼭 쥔 채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
비는 그친 상태였다. 두 사람은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한 길을 걸어 근처 바로 향했다. 들어가니 그들 외에 손님이라고는 없었다.
“썰렁한데? 아직 이른 시간이라서 그런가?”
그렇게 말하는 브래들리에게.
“여긴 원래 이래.”
이 썰렁함 또한 여길 고른 이유라고 민준이 답해 주었다.
바 테이블에 앉자 바텐더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를 보고 브래들리는 ‘과연’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민준이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술만 먹고 싶을 때 찾는 장소였다. 혼자 앉아 있으면 단골 관리 차원에서 바텐더가 한 두 마디 건넬 법도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럴 일이 없다. 심지어 몇 년 동안 여길 드나든 민준은 아직도 그의 이름조차 몰랐다.
간단한 이유가 있었다. 이 바의 단 하나뿐인 바텐더는 엔트(Ent)이기 때문이다.
“쿨릴라, 더블. 온더락으로.”
“나도 같은 걸로 주십시오.”
바텐더는 끄덕이더니 옆구리에서 나뭇가지와 덩굴 몇 개를 뻗어 얼음 바구니와, 술병과, 잔 두 개와, 안주 접시와, 냅킨을 동시에 집어 들었다. 느린 걸음과 달리 여러 개의 손이 움직이는 속도는 매우 빨랐다. 문어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는 효율적인 멀티태스킹.
잠시 후, 두 사람 앞에 세팅을 끝낸 바텐더는 다시 느릿한 걸음으로 구석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는 뿌리 한 줄기를 뻗어 약수통 안에 담근다. 갈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고객에 대한 관심을 일절 보이지 않는 그 옆얼굴을 확인한 뒤, 민준은 소리를 차단하는 결계를 만들었다.
“자, 이제 이야기를 좀 해 보자고.”
“지금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야. 여기, 이러고도 장사가 돼?”
묵언의 바텐더라니. 매상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지적하는 브래들리에게 민준은 말했다.
“이런 분위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지. 나 같은 사람. 그리고 주인이 좀 괴짜라서 애초에 매상은 신경도 안 쓸 걸. 자, 아무튼···.”
민준은 상대의 표정에 가득한 심술궂은 기운을 읽었다. 전처 이야기를 묻고 싶어서 안달 난 그를 좀 골려 주고 싶은 눈치다. 그 기대에 부응하기 싫었던 민준은 일부러 다른 이야기부터 꺼냈다.
“한국은 왜 온 거야?”
속셈을 간파 당한 브래들리는 약간 김빠진다는 투로 말했다.
“베르미 공주 호위 건 때문에. 사전답사 겸 일찍 입국했어.”
“뭐? 무슨 공주?”
다시 한번 이름을 들은 뒤 민준은 뿌연 기억속에서 누군가를 건져 올렸다.
“아, 겔랑코 차원의?”
그러고 보니 지구 방문 예정에 대한 뉴스를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데, 들를 나라 중 한국도 있었나?
“아, 잠깐만.”
생각을 좀 더 해보니 이상했다.
“겔랑코에서 한국에 오는 사절 호위를 왜 미국 이민국에서 맡아?”
브래들리도 민준과 비슷한 위장 신분을 가지고 있다. 활동 구역이 미국이라는 점만 빼면 일하는 패턴도 같았다.
“너도 알겠지만 베르미 공주 종족이 연합왕국 내에서 정치적 입김이 약하잖아. 그래서 충분한 호위 인력을 배정받지 못했고, 지구 쪽에 협조를 요청했다는 소문이야.”
“정치적 입지가 약하다고? 하지만 거기 차원 GDP에서 공주 종족이 기여하는 비율이 상당할 건데?”
“15% 정도 된다고 하더군. 그런데도 찬밥 신세라 이거야. 정치라는 게 참 희한하지, 이런 걸 보면.”
민준은 눈동자를 굴리다 말했다.
“어쨌든, 한국정부가 미국에 요원 파견을 요청했다는 건···.”
“그쪽에서 원하는 경호 규모가 비상식적 수준이라 외부 원조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더군.”
그러자 민준은 재차 의구심이 들었다.
‘이민국 자체 역량으로는 불가능한 수준을 요구했다고?’
그랬다면 민준에게 의뢰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그는 오늘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젠킨슨이 의도적으로 자기를 배제한 것인가?
‘아니면 캐시가 알아서 중간에서 쳐 냈을 수도 있겠군.’
몇 날 며칠 계속 따라붙어야 하는 경호 임무는 민준이 제일 기피하는 종류이므로 그럴 법도 했다.
그는 건성으로 몇 마디 더 물었다.
“갑자기 한국은 왜 온다는 거야? 금 팔아먹는 데 무슨 문제가 있나?”
과거와 달리 현대에서 황금이 차지하는 지위는 산업재에 가깝다. 가장 다양한 용도로 대량 소모되는 마법시료이기 때문이다. 마정석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는 공정부터 시작해서 각종 공업마법에 필수적으로 쓰이며 드래곤의 수요 역시 높다.
이토록 중요한 위치를 지닌 황금을 더 들여다보면, 그 시장은 연금술사들이 공급하는 마법연성금과 겔랑코 차원에서 수입해 오는 생체합성금으로 양분되어 있다.
전자는 연금술사를 갈아 넣는 방법으로 유연하게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고, 후자는 하루 생산량이 특정 종족 인구에 비례하고 ‘노력’한다고 증산할 수 없는 대신 마법시료로서의 품질이 우수하다.
민준은 이번 방문이 겔랑코 차원의 그 일등 수출품과 관련이 있으리라 예측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브래들리의 말은 조금 달랐다.
“공식적으로는 비즈니스를 위한 방문이지. 그런데 들어보니··· 이게 지구의 제8차 집단이민으로 이어질 포석이라는 말도 돌고 있어.”
“8차? 이제 와서?”
위원회가 승인한 가장 최근의 집단 이민이 1981년도에 있었으니, 만약 집행된다면 40년 만의 일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민준이 가장 먼저 궁금해한 것은 그들의 ‘사이즈’였다.
“잠깐만, 베르미 공주 종족 신장이···.”
“평균 3.5미터 정도.”
“에이, 그러면 당연히 부결 나겠지. 트롤 보다 더 크네.”
“쉬운 일이 아니긴 해. 그래서 위원회도 그만큼 솔깃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리고.”
“흐음.”
흥미로운 이야기이긴 했지만 현실로 다가올지 미정인 상황에서 계속 떠들고 싶은 주제는 아니다.
민준은 상대의 김을 충분히 뺐으니 이제 슬슬 듣고 싶은 이야기를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제 진짜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잠깐만, 목 좀 축이고.”
이야기에 집중해서 술잔을 잠시 방치했던 브래들리가 그제서야 잔을 잡았다.
한 모금 넘기더니 얼굴이 울상이 된다.
“켁! 넌 왜 하필 또 골라도 이런 소독약 같은 걸 주문한 거야?”
“옛날 생각 나지 않아? 우리가 같이 일했던 차원 말이야.”
그러자 브래들리는 잠시 과거를 떠올리고는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긴. 거기서 술이라고 파는 거에서 다 이런 냄새가 나긴 했지. 술인지 알코올인지 구분 안되는 독주들.”
옛 생각을 끊어내며 브래들리는 말했다.
“아무튼, 내가 아는 것은 이거야. 우리가 직전 차원에서 임무를 마무리하고, 퇴직금 못 채운 수형자들은 흩어졌잖아? 너와 나는 이쪽으로 파견되었지만 델은 혼자 다른 곳으로 찢어졌지.”
“다행히도, 그랬지.”
민준은 신을 모시지 않지만 그 순간에는 너무도 감사하고 은혜로운 나머지 종교를 가져볼까 잠깐 고민했을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보이지 않는 우주의 위대한 섭리가 그에게, 그래도 이 세상은 죽지 않고 살아볼 만하다고 격려를 해 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가 흑마법사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신앙생활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지만 50만 달란트가··· 아, 뭐 그 전에 모은 금액이 좀 있었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 많은 달란트를 어떻게 모았는지 자세한 이야기는 난 몰라. 하지만 이건 알지. 우리랑 찢어지고 그 차원에서 델이 엄청난 고평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뭐? 그 여자가? 일을 잘 한다고 평가받았다고?”
민준은 그곳에서 봤던 델의 행보를 떠올렸다.
우주 벌레 소탕 작전에서 잡으라는 벌레는 안 잡고 대피선을 공격해서 애꿎은 난민들만 잡을 뻔하질 않나, 숙청된 독재자의 비밀 금고 문을 열다가 대기 장막을 찢어 콜로니 하나를 몰살시킬 뻔하질 않나, 핵융합엔진과 무반동추진엔진의 정비방법을 혼동해서 탑승한 동료들을 전부 우주 공간으로 날려버려 일주일동안 미아로 만들지를 않나······.
하나 하나 되짚다 보니, 민준은 저도 모르게 다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얼어붙은 채 캄캄한 우주를 며칠 간 떠돌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뭐 우리랑 한 일은 적성에 잘 안 맞는 편이었나 보지.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델이 저지른 사고는 전부 의도치 않게 벌인 거였잖아?”
“그게 그 여자의 제일 무서운 부분이야. 남들은 의도를 가지고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할 수 없는 일을 걔는 의도하지도 않고 저지른다고!”
레이더에 잡히지도 않게 멀리 떨어진 대피선을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신기에 가까운 사격술이나, 소행성단과 충돌해도 버텨내는 대기 장막의 약점을 정확하게 타격하여 찢어버리는 절묘한 손재주나, 구닥다리 핵융합엔진을 가지고 4세대 앞선 무반동추진엔진의 효과를 재현하는 오버 테크놀로지적 마개조술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력해도 발휘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델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실수로!
그 모든 악몽을 회상하며 치를 떠는 민준에게 브래들리는 말했다.
“아무튼 내 추측은 이거야. 그곳에서 뭔가 기가 막힌 성과를 내서 특별사면을 받지 않았을까.”
“텔레시아처럼?”
저도 모르게 그 이름을 뱉은 순간, 민준도 당황하여 얼굴을 굳혔고.
“······.”
브래들리도 감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지금 나온 그 이름 역시 둘과 함께 ‘그 차원’에서 함께 복역했던 이의 것이다.
‘음?’
잠시 어색한 침묵을 흘리던 민준의 생각이 무언가에 닿았다.
“잠깐만.”
텔레시아의 이름을 읊었기 때문인지 자연스레 연상이 되었다.
“그럼 델도 기억을 되찾았다는 거잖아?”
“그렇겠지.”
노동교화형 복역 중에 가해지는 제한적 기억소거는 수형자로 하여금 자신이 누군지, 붙잡히기 전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전혀 떠올릴 수 없게 만든다.
“······그럼, 걔 지금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브래들리가 피식 웃었다.
“왜? 그래도 옛날에 같이 살던 여자라고 걱정되나?”
“당연히 걱정되지!”
민준이 욱 하는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걱정이 되지, 안 되냐? 내가! 내가 걱정이 된다고! 그 여자가 범죄자의 기억을 되찾고 아예 회까닥 돌아버렸을까봐, 그럴 경우에 내 안위에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이 되는 거라고!”
그러자 브래들리가 심히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말했다.
“에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옛 추억에 기대면 그나마 마실 만한지, 다시 한 모금 들이켜며.
“미친 여자가 어떻게 또 한 번 미쳐?”
“그래서 더 무서운 거야. 상태가 더 나빠졌을까봐.”
깊은 한숨을 내쉰다. 브래들리가 머리를 긁적였다.
“걔가 좋다고 결혼한 건 너잖아.”
“난 걔가 그런 앤 줄 몰랐지.”
“낌새가 없었어?”
민준은 우울하게 읊조린다.
“같이 살던 처음 80년은 걔도 멀쩡했어.”
“어쨌거나 준비는 해야 할 거다. 나, 아까 네가 ‘죽였다’고 말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민준은 ‘드래곤을 죽였다’고 말했지만 상대는 그것을 ‘전처를 죽였다’라는 의미로 오해했다.
브래들리가 말을 이었다.
“물론 너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오늘 마녀협동조합에서 만난 노인이 최고의 ‘인격자’라는 단어를 사용한 그 자리에, 브래들리는 다른 단어를 골라 채워 넣는다.
“······‘암살자’이긴 하지만 말이야. 델이 출소한지 이제 겨우 며칠 지났는데 벌써 죽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지. 그렇게 간단하게 죽일 수 있는 애가 아니니까.”
이혼한 많은 부부가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민준과 델은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물론 각자 이유는 달랐다.
한 사람은 상대가 너무 위험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다른 한 사람은 상대가 너무도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이고 싶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