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17
318. 업(業) (23)
***
아시프-1이 마른침을 삼켰다.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기다렸다. 거절할 것인가? 아니면, 수락할 것인가?
이어진 창조주의 말은 예상치 못한 내용을 전한다.
“···나는, 이 녀석 의견을 먼저 물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준이 가리킨 사람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네? 또··· 저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방법대로 실행할 경우 가장 큰 리스크를 짊어질 사람은 동철, 너니까.”
“······아?”
아시프-1은 그제서야 이해하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랬다. 당연히 고블린의 의중을 물어봐야 하는 일이었다.
그가 그러지 않은 이유는, 후라이팬 시절 습관이 배어 자연스레 동철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동철은 당시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경우가 드물었고,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가는 일이 잦았다.
이번에도 그러리라 으레 짐작한 것이다.
‘실수했군.’
그가 반성하는 사이 민준이 더 자세히 설명했다.
“저기 빛을 뿜고 있는 녀석, 그래. ‘넷째’는 위험에 빠질 염려가 없어. 지금 하는 대로 신성력을 계속 방출하면 되니까. 여기, 내 아들도 남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은 질리도록 해 왔으니 새로울 게 없지. 그리고 나는 여차하면 정신적 연결을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민준이 기억을 잃었던 시절, 후라이팬에게 약간이나마 영향을 받은 것은 확실하게 의지를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와서 아시프-1이 그의 마음을 조작할 수는 없다.
“결국, 제일 위험한 건 너야. 설명대로라면 넌 데모닉 고블린이 최후의 순간에 보이는 힘을 흉내내는 거다. 비록 내가 널 돕고 지구인들이 품은 파편에 의존해도 위험이 전무하진 않지.”
동철은 잔뜩 긴장했다.
안색이 파리해진 건 아시프-1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창조주가 울타리 안 사람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잊고 있었다. 누군가는, 고작 고블린 한 명에게 왜 저리 신경을 쓰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민준이라는 사람을 전혀 모르기에 가능한 발언이었다.
불안 속에서 자문한다. 결국, 창조주는 고블린을 만류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그럼에도, 난 네가 이 실험에 참여해 봤으면 한다.”
“아··· 그래요?”
동철이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려고 하기에 민준은 만류했다. 이유를 마저 들으라는 손짓을 하며.
“다시 만난 뒤, 난 네가 데모닉 고블린임을 예측했다. 말하지 않은 이유는 각성 전까지만이라도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미 네가 알았기에 이야기하겠다.”
대해처럼 깊고 고요한 눈빛으로 말한다.
“지금으로서는 네 수백 년 뒤 미래가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야. 데모닉 고블린으로서의 불가피한 희생 말이다. 그건 분명 고귀한 일이지만···.”
오래전, 백성들을 위해 스스로 희생을 자처한 왕은 말한다.
“다른 방법이 있다면,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라.”
아시프-1의 방법이 통한다면 동철의 영육이 붕괴하는 미래가 바뀔 수도 있다.
민준은 희생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다. 대안을 위한 노력을 권유하는 것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기 때문이다.
삶에 스스로 지운 의무가 얼마나 괴로운지 그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네.”
어차피 승낙할 생각이었던 고블린은, 두려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싱글벙글 웃던 아시프-1이 끼어들었다.
“아, 참.”
동철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발언을 뒤늦게 꺼낸다.
그는 이미 결심을 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정신세계에서 그의 영혼이 했던 이야기인데 말입니다···.”
눈 한쪽을 찡긋하며.
“이 실험으로 아버지가 동철 씨 소원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다는군요.”
“···아, 그래요?!”
고블린의 얼굴은 환해졌지만.
민준은 쓸데없는 소리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때도 이야기했지만, 네 소원은 모든 일이 끝나면 어차피 이루어질 거야.”
그는 다소 경색된 목소리로 아시프-1에게 말한다.
“이게 네 소원대로 모든 계획을 바꾸겠다는 승낙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실험을 해보자는 거야. 신성력을 내가 얼마나 다룰 수 있는지, 파악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아시프-1은 씩 웃었다.
사람의 아들은, 그가 이 실험을 허한 또 하나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철을 위한 배려 외에도.
하지만 굳이 입에 담지는 않았다. 민준의 성격을 잘 아니까.
“그럼, 시작합니다.”
파아앗!
전함을 둘러싼 결계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아시프-1은 네 명의 정신을 엮었다.
그 순간 모두가 보고 있던 풍경이 바뀌었다.
***
잠시 후.
민준은 걷잡을 수 없는 부글거림과 마주했다.
망자의 것이 아닌, 산 사람의 정신세계를 이렇게 직접 들여다볼 기회가 적었던 그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와 넷째, 아시프-1과 동철의 정신이 겹쳐진 장소.
다른 사람들은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준은 타인과 자아가 섞이는 엉망진창의 상태를 피했다. 그들의 심적 상징을 풍경처럼 관찰할 뿐.
‘저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시프-1의 정신세계였다.
세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조각이 뭉쳐, 혼란스러운 조화를 만들어낸다.
파편이 모여 한 명의 사람이 된 아시프-1의 심저(心底)를 비추는 것 같았다.
‘어지럽군.’
계속 보면 현기증이 느껴질 것 같아, 민준은 의지를 표했다.
눈을 돌리거나 어깨를 뒤트는 등 제스처를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풍경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주변이 완전히 바뀌고.
다시 펼쳐진 광경은, 아시프-1이 이미 봤던 그것이었다.
‘으음.’
방금 전의 정신세계와는 영 딴판이다.
헤어진 혈육에 대한 애탄 그리움과, 칠일간 굶은 덕분에 생겨난 음식에 대한 열망이 보인다.
민준은 그것이 넷째의 정신세계임을 알 수 있었다. 의식이 흐름이 강렬한 선처럼 곳곳을 스친다.
‘···꽤나 직선적인 정신세계인데.’
표면 의식 아래에는 본능에 가까운 영역이 보였다.
아시프-1과도 엮여 있기 때문인지, 민준은 어려움 없이 해석할 수 있었다.
넷째의 정신을 구성하는 요소 중, 드래곤과 엘프의 유전자에 영향을 받은 조각들이 제일 먼저 보였다.
그들은 절대 신성력을 각성할 수 없다고 알려진 종족이다. 아시프-1의 설명대로라면, 드래곤과 엘프는 자기 초월의 영역에 닿을 수 없다. 드래곤은 지나친 이기주의 때문에, 엘프는 타인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 벽을 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은 신성력을 각성했다.’
무의식에 부유하는 파편 중에, 민준은 그 원인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낸다.
그것은 길잡이 용의 유전자를 받은 자들이 지니는 심적 성향이었다.
특별한 골드 드래곤의 후예들은, 먼 옛날 태초의 종족을 섬긴 충실한 성격을 이어받은 것이다.
다만, 길잡이 용의 피를 이어받은 다른 드래곤들이 신성력을 각성한 적은 없다. 그 성향은 용의 오만함 및 자존감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넷째가 그럴 수 있었던 다른 이유는?
‘저것이군.’
민준이 시선을 둔 곳에는, 인간과 오베르 거미의 유전자가 남긴 파편들이 떠다녔다.
신비로운 힘과 권력을 숭상하는, 집단주의 경향이 큰 인간.
모친을 완벽하고도 완전한 존재로 숭상하며, 평생 그녀를 그리워하고 충성을 다하는 수컷 병정 거미.
‘저것이 드래곤과 엘프가 두른 철벽 같은 자아의 벽을 넘게 도왔다.’
그만큼 견고한 자아였기에 초월했을 때 파장은 컸다. 민준은 넷째가 강력한 능력자가 된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그리고 그의 미래가 어찌 흘러갈지도 알 것 같았다.
‘오베르 거미의 수컷은 1년 내 단명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젠킨슨 휘하 능력자들도 과거에는 그리 확신했지만.
민준은 달리 생각한다.
‘이 정도라면, 무너지는 육체를 스스로 복원할 정도는 되겠어.’
민준은 그에게 우주 역사상 최강의 신성력 능력자라는 타이틀 외에도, 역사상 가장 장수한 수컷 오베르 거미(혼종)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다음으로.
화르르!
이번에는 시선을 돌리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지만.
민준은 저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응시한다. 마치 꿈속처럼 그는 스스로를 볼 수 있었다.
화륵! 화르르!
그곳에는 어둠을 연료로 타오르는 핏빛의 불꽃이 있었다.
‘왜 이런?’
잠시 후, 자연스레 마음속에서 답이 떠올랐다.
‘아. 동철, 그 녀석의 심상(心想)이야.’
바다와 같이 펼쳐진 그림자는 얼핏 보면 짐승 같기도 했고, 다시 확인하면 사람 같은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표면은, 정유 누출 사고가 벌어진 해수면 위에 불을 붙인 듯했다. 검은 일렁임 위로 쉴 새 없이 타오르는 적색 불꽃.
이건 그 고블린의 자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네, 동철이 형 눈에는 요원님이 그렇게 보여요.”
민준은 이번에도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넷째와 동철, 아시프-1의 심상이 엉겨 붙은 틈 사이로 빛 한줄기가 피어난다.
그것은 곧 사방으로 퍼지는 강렬한 흐름이 되었다. 격류는 다른 이들 심상에 균열을 내며 길을 열었다. 금싸라기가 융단처럼 펼쳐져 방향을 인도했다.
민준은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그곳을 향했다.
금빛 은하수 한가운데가 부글거리더니, 거품처럼 사람의 형상이 솟구쳤다. 융기한 금빛은 인간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민준은 첫 마디를 내뱉기 전까지, 자신이 이곳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이런 식인가?”
“네, 이런 식이에요.”
상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시프-1이 접촉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민준의 아들은 그와 조우한 당시 좌표는 없고 방향만 존재하는 차원을 인지하는 데 그쳤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민준은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차림새의 청년이다. 그의 기억에 남은, 우스꽝스러운 펭귄 코스튬은 없다. 목에 박혀 있던 단검도 사라진 상태.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하은성이 웃으며 어떤 방향을 가리켰다.
“좀 걸을까요?”
의지를 발한 순간, 민준은 그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이 상황이 왜 어색한지 알게 되었다. 하은성이 유령이었을 때, 민준은 항상 그의 영체 뒤에서 움직였다. 육신을 지닌 사람에 비해 훨씬 자유롭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그를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하은성이 용체에 빙의했을 때는, 반대로 민준이 항상 앞장서서 걸었고 상대는 뒤에서 따라왔다. 아니면 민준의 그의 등에 올라타거나.
다시 말해, 이렇게 나란히 서서 한 방향으로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비록, 심적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두 사람이 발길을 딛는 곳마다 환한 아지랑이가 파문을 만들며 일렁였다. 민준이 어떤 생각을 떠올린 찰나 하은성이 바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눈을 떴더니 칠일이 지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의 아들은··· 제가 이레 동안 묶어 놓을 이유가 있었어요. 그는 넷째가 씨앗을 충분히 뿌리는 사이, 계속 나와 엮여 있어야 했죠.”
“내가 다시 눈을 뜨면···.”
“현실에서는 일초의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는 민준의 몸을 감싼 불길을 보며 말한다.
“당신은 아드키엘에게 거짓말을 했군요. 이 불꽃을 보니 알 것 같아요.”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했다. 이렇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아시프-1의 정신이 함께 엮여 있기 때문일 터다.
또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상대는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그렇기에 가장 중요한 질문부터 했다.
“너는 지금 ‘누구’와 섞여 있지?”
하은성이 웃었다.
민준은 적지 않게 당황했다. 마음을 통해 전해진, 웃음에 섞인 온기 때문이었다. 상대에겐 자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이유가 충분했음에도.
아마도, 그는 이미 인간 청년으로 살다가 죽은 유령 이상의 존재가 된 것 같다. 아시프-1이 증언한 대로 말이다. 이미 수많은 존재와 섞여버렸기에.
하은성은 즉답하는 대신 말했다.
“당신은, 참으로 사랑받는 왕이었지요.”
“······!”
하은성은 길이 이어지는 방향을 보았다.
“백성들이 당신에게 보낸 감정은 단순한 존경과 숭배 이상이었어요. 심지어 그들은 잠에 들고 나서 행복한 꿈을 꾸며, 서로의 살갗 아래에서 서로의 삶을 걸으면서, 당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알게 되었지요. 그들이 왕을 사랑한 것처럼 왕도 백성을 사랑했음을.”
하은성은 예민준이라는 사람이, 그 요원이, 그 수형자가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기억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반동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일까?
태초의 종족으로서의 예민준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수형자의 인연조차 그렇게 소중히 여긴 사람이었는데, 태초의 종족 시절 인연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왕의 백성들 말이에요.”
시선이 마주친다.
“한 명의 시선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지요. 하지만 모두의 기억이 섞이면서, ‘우리’는 서로의 경험을 교차 검증할 수 있었어요. 모두의 기억 속에 남겨진 왕의 행적을 되짚어 나가다 알게 되었지요. 긴 잠에 빠져들기 전에는 발견하지 못한 정답을. 왜냐면··· 당시의 우리는 정상이 아니었거든요. 기억하시죠?”
민준은 자신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도 자각하지 못한 채 답했다.
“자유 의지를 잃은 기계장치 같은 상태에서 빠져나온 후였지.”
“네, 우리에겐 그 영향이 남아있었지요. 그래서 당연한 진실을 알지 못했어요. 답이 좀 늦었네요. 우리는 ‘모두’가 조금씩 섞여 있어요.”
“······!”
“그렇기에 굳이 당신에게, 누구누구가 섞여 있다고 말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게 뭔지 아나요? 내가 지금 내 안에 있는 모두의 이름을 말해도··· 당신은 그들 전부를 기억할 거라는 거예요. 평범한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죠. 당신이 우리 종족 역사상 손꼽히는 천재임을 감안해도··· 보통은 그 정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요. 하지만 당신은 천문학적인 수에 달하는, 모든 백성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하지요?”
민준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다. 그는 쉽게 읊을 수 있었다. 민준은 모든 백성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했다. 개중 동명 이인이 몇 명인지, 그리고 각각의 특징이 무엇인지도 말할 수 있었다. 사람의 한계를 넘은 초인(招人)에게만 가능한 일이었다.
불꽃과 어둠에 휩싸인 그는, 자신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존재였어요. 쉽게 잘못된 선택을 내리고 끔찍한 죄를 종종 범했지요. 그럼에도 왕은 우리를 사랑했어요. 그러고 보면, 당신은 지구의 드래곤 로드를 참 많이 닮았지요. 그 용은 동족이 끔찍한 족속이라고 생각했지만 끝내 그들을 포기하지 못했어요. 그렇기에 젠킨슨도 희생을 택했지요. 고난의 길을요. 당신처럼.”
하은성은 두 사람이 걷는 길을 내려다본다. 아름다운 빛이 멀리 펼쳐졌다.
“이제, 당신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해요.”
민준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몸과, 이곳에 고정된 정신이 동시에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계산에서 어긋났지요.”
“···그래, 본래 나의 백성들은 이보다 훨씬 일찍 깨어나야 했다. 드래곤이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하기 전에. 고대 종족이 헛된 수작을 부릴 정도로 발전하기 전에. 내가 아사 상태에 가까울 정도로 용혈을 모두 소모하기 전에.”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깰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서로 섞이는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고요.”
하은성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진심이 민준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당신에게 또 한 번의 큰 고통을 줘서 미안해요. 하지만 우린,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것은 하은성의 말인 동시에 그와 섞인 모든 백성들의 말이었다.
민준은 진실을 묻는다.
“설마··· 진행이 느려진 이유가?”
“네. 우리 스스로 결정했어요. 우리는 우주의 혈액으로서 완성되기 전에 한 번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미완성인 상태로.”
“왜?”
“당신은 아드키엘에게 거짓말을 했지요.”
하은성이, 민준의 백성들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거짓말을 했어요. 그 사실을 뒤늦게 안 뒤에, 그러기로 결심했어요.”
왕이 그들에게 숨기려고 했던 비밀을.
“우리는 당신을 이곳에 홀로 남겨두고 갈 수 없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