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18
319. 업(業) (24)
***
왕이 백성을 포기할 수 없어서 거짓말을 한 것처럼.
백성들 또한 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사람이 보통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두 가지죠. 상대를 속여 이익을 얻거나, 거짓으로 자신의 죄와 수치를 덮기 위해. 하지만 가끔씩은 다른 이유로 속이기도 해요. 상대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돕기 위해서.”
세상에는 이타적인 거짓말도 존재한다.
—!
주변 풍경 중 아시프-1을 상징하는 부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민준은 아들 또한 이 대화를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시프-1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는 창조주에게 세 번의 큰 거짓말을 하여 처벌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창조주도 그에게 거짓을 말한 모양이다.
아들은 그 사실에 분노하는 대신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과 염려를 느꼈다.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는군요.”
4차원적 모자이크가 조립된 풍경을 보며, 하은성은 기억을 읽는다.
“‘우리’는 우주의 혈액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히 지속되는 우주의 일부가, 그 생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민준이 했던 말이다.
아시프-1은 당연히 그 주체에 아버지가 포함되리라 생각했다.
“통상의 언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가져요. 청자(聽者)를 포함하는 우리와 포함하지 않는 우리. 지금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죠? 여기서 우리는 전자를 뜻하겠네요. 동시에 ‘우리’는 모든 시간과 공간에 흘러내리고 있어요. 여기서 말한 우리는 후자겠죠. 하지만···.”
민준은 이어질 말을 직감했다.
“화자(話者)를 포함하지 않는 ‘우리’는 어떨까요? 백성들이 우주의 혈액이 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왕은, 정작 자신마저 동참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러니 아들에게 한 말은 거짓이겠죠.”
왕은 백성들이 먼 곳까지 나아간 후에도, 정작 자신은 그 혈맥의 일부가 되지 않고 남는다.
그가 숨겼던 비밀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은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아니면, 당신은 그 선언으로 새 개념을 착안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나를 제외한 집단으로서의 우리. 자신을 소거함으로써 자신을 확장하는 거군요. 역설적이네요. 이 또한 자기 초월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럼에도 당신이 신성력을 쓸 수 없는 건··· 내가 당신에게 유래했지만 당신은 아니기 때문일까요?”
그 사이 아시프-1이 만든 소용돌이는 더욱 격해졌다. 그 울림 속에는 죄책감도 섞여 있었다.
자신이 지금까지 창조주를 위해 한 일이, 사실상 그의 희생을 도운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화르륵! 심상에 투영된 민준의 외면은 여전히 붉고 검게 타오른다. 그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알았지?”
“말씀드린 대로, 많은 사람들의 의식이 모이면 그 자체로 엄청난 정보가 되지요. 당신이 잠들기 전 우리 각각에게 보인 표정, 행동, 목소리, 하다못해 사소한 단어 선택까지··· 그 전부를 종합한 결과 확신했어요.”
민준 안에 똬리를 튼 어둠이 출렁였다. 하은성은 그것을 가리켰다.
“아드키엘. 당신은 언젠가 고행(苦行)을 그녀에게 떠넘길 것 같은 뉘앙스로 이야기했어요. 왕은 백성들과 함께 다시 잠들어 연결될 거라고요. 그 또한 거짓말이었죠. 지옥의 수문장이 된 아드키엘은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지옥 그 자체가 될 거예요.”
민준은 아드키엘에게 헛된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게 당신의 복수에요. 그녀가 ‘심장’을 직접 관리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데요? 아드키엘에게 그토록 중요한 영역을 맡길 리가 없죠. 그 일은 당신의 아들 몫이었어요. 신과 사람을 잇는 지배자는 훗날 천국의 문까지 지키는 것이죠?”
아시프-1의 심상은 연신 충격을 토한다. 하은성은 그쪽으로 연민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아시프-1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읽을 수 있었다.
– 하지만 아버지, 당신은 아드키엘에게 선언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와 스스로 완전히 자유로워졌다고요!
하은성은 부정한다.
“완벽한 해방이라고는 볼 수 없죠. 아드키엘을 향한 죄의식은 사라졌지만, 증오와 원한이 그대로 남았거든요.
시선은 다시 민준을 향했다.
“그리고 당신이 앞으로 행할 일에 대한 죄책감 역시 남았고, 이렇게 어둠을 불꽃이 태우고 있네요.”
민준은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았다.
“너희가 그걸 알아서는 안 됐다.”
“왕은 정말 철두철미했어요. 수형자가 된 뒤 ‘달란트’를 흡수해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았죠. 그러니 상처를 입어도 산란하는 광체 대신 사람의 붉은 피가 흐른 것이고요. 그걸 분리하여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만 내어 썼어요. 그 행동은··· 무의식중에라도 우리와 섞이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처럼 보였죠.”
“···맞아. 그랬다. 다시 깨어난 뒤에도 너희들과 섞여서는 안 됐어. 내가 조금이나마 흡수한 피가, 공간적 단절을 넘어 심장과 혼재되는 걸 두려워했지. 기억이 없어도 무의식적으로 알았다.”
“우리가 마지막까지 100%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동기예요.”
왜 그랬는가?
“왜 섞이지 않으려고 했죠? 먼 훗날 모든 백성이 영원의 혈관을 타고 흐를 동안, 왜 밖에서 홀로 남으려 했죠?”
긴 침묵 끝에.
왕은 이렇게 말했다.
“왜냐면, 계획의 어느 시점부터 뒤쳐진 쪽은 너희가 아니라 내가 되니까.”
공간이 요동쳤다. 아시프-1은 이 대화에 끼고 싶은 듯 계속 정신적 몸부림을 쳤지만, 그 이상의 영향은 끼치지 못했다.
하은성은 표정은 비교적 담담했다. 답을 어느 정도 예상했던 것처럼.
반면 민준을 감싼 불길은, 거센 바람 앞 촛불처럼 위태롭게 흔들리며 파직거렸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잠들지 않았죠. 별개의 장소에 쉘터를 마련했어요.”
“누군가는 계속 관찰하며 관리해야 했다. 행복한 꿈을 꾸는 대신, 얕은 잠을 자며 악몽에 시달려야 했어. 그 사이 너희는 아무런 장애물 없이 모두와 연결되며 각자의 삶을 이었다.”
“까마득하게 긴 시간이었죠.”
“그래, 너무도 길었다.”
어둠에 덮인 얼굴이었지만, 하은성은 깊은 피로감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사이 너희들은 계속 나아갔어. 방금 말했지. 이미 모두가 모두의 일부를 지니고 있다고. 덕분에 다시금 확신한다. 계획 자체는 성공적이었어. 하지만···.”
괴로운 울림.
“그동안 나는 정체되어 있었다. 밖에서 홀로 잠든 시간, 나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어. 너희는 함께 전진했지만 나는 멈춰섰다. 그 격차는 긴 시간과 비례했다.”
왕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러니, 나는 뒤에 두어도 좋다. 너희들은 나아가야 돼. 나 때문에 일부러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됐어. 이로써 우리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너희는 계속 영원과 완전의 길을 걸어라.”
“아뇨, 일부러 속도를 늦췄잖아요. 이제 격차는 시간에 비례할 정도는 아니에요.”
“나는 너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홀로 오랜 세월 존재했다. 내 자아는 타인과의 연결 없이 독립성을 유지했어.”
민준이 그들과 섞인다면 더 이상 대해에 떨어진 물 한 방울로 볼 수 없다.
그는 누구보다 무거운 자아와 방대한 기억의 응집체다.
왕은 백성의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들이 영원으로 나아가는 길목을 막을 것이다.
“결국 우주의 순환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더 느려질 거다. 아예 실패할지도 모르고.”
“다른 방법은요?”
어떻게든 왕이 자신들과 함께 걷는 길을 찾으려는 백성들은.
언젠가 민준이 카바이트에게 했던 제안을 거론한다.
“당신은 고대 종족에게 더 나은 존재가 될 길을 제안했지요. 비록 배신했지만요. 그 방법은··· 우리와 섞이는 게 아니라, 그들 종족이 또 하나의 심장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우주에 꼭 심장이 한 개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각자의 근원과 연결되는 두 부류의 혈관은 서로 이어지지는 않겠지만 함께 우주에 양분을 전하겠죠.”
“나는 불가능해. 내가 다른 종족과 섞여서 또 하나의 심장을 만들 수는 없다. 내가 너희에게 결점인 것처럼···.”
민준은 정신이 끓어오는 아픔을 느꼈다.
그가 백성들과 연결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끝내 말을 잇지 못하자, 하은성은 왕이 직전에 한 말을 그대로 되뇌었다.
“내가 너희들에게 ‘결점’인 것처럼···?”
이제야 답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이었군요.”
하은성은 왕이 애초에 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 이유를 상기한다.
낙원은 부활할 수 있을까?
사람이 사람을 더 이상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을 향해 내비치는 혐오를 영원히 멈출 수 있을까?”
“그래.”
민준은 긍정한다.
“다시 깨고 나서, 내가 연결되면 안 될 이유가 하나 더 생겼지. 그때부터 내 마음 속에는 이미 증오와 분노가 가득하다. 오랫동안 행복한 꿈을 꾸며 서로를 이해하고 다른 종족까지 이해할 준비가 된 너희와는 달리. 내 울타리는 더욱 높아지고 두터워졌어. 그 누구보다 무거워진 내가 말이야!”
그러니 난 섞이면 안 안된다고, 오랜 결심을 말한다.
“너희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난 모든 변수를 제거할 것이다. 땅을 파서 뿌리를 캐내고, 씨앗을 태우며, 그 토양에서 앞으로 어떤 싹도 틔울 수 없도록 더럽힐 생각이다.”
그때, 아시프-1이 기를 쓰고 끼어들려고 했다.
그는 민준이 언젠가 카바이트를 비난하며 한 말을 그대로 재현하여 울렸다.
– 하지만 그건 짐승의 방법이다. 사람의 방법이 아니야. 옆집 아이가 커서 날 목 졸라 죽일 근력을 얻을 거라고 해서 그 아이를 목매다는 사람은 없어.
자신이 한 말을 기억 못할 리가 없지만.
그는 무시했다.
“날 견인하는 것은 동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다. ‘우리’를 위해서라면 난 얼마든지 많은 피를 더 흘릴 수 있어. 그리고 책임은 온전히 내 것이야.”
민준은 자신의 손을 막대한 양의 피로 적실 생각이다.
모든 것을 홀로 감당하여, 모든 죄를 스스로 짊어질 것이다.
그 과정은 분명 끔찍한 고통이었고, 더 큰 고통을 낳을 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生)을 고난으로 칠하기로 스스로 결심했다.
“이런 내가 섞인 채 순환계가 완성되면 어떻게 될 것 같나? 내 증오가 너희를 오염시킬 거다. 우주의 혈관을 채운 피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격한다면? 우리에게 유래하지 않은 모든 것을 배척하는 면역계가 생긴다면?”
태초의 종족이 아닌 모든 것을 암세포나 세균으로 여긴다면?
“업은 계속 엮일 것이다. 우릴 제외한 종족은 멈추지 않고 죄를 지을 거야. 너희는 그들을 용서하고 용인하겠지. 사실 비유하자면 균 따위에 불과하므로 신경을 쓰지도 않을 테다. 하지만 나는? 난 장담할 수 없다. 내가 섞인 우주가 그들을 ‘내 몸’을 침범한 이물질로 간주한다면?”
민준은 자신이 백성 모두를 증오로 물들이는 걸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우주는 영원을 얻었으나 우리 말고 모두를 죽여버린다면? 그 속에 오로지 혈액만 남는다면? 난 우주의 유전자 설계를 망치는 오류가 될 것이다. 내가 결점이야.”
“잠시만.”
하은성은 만류했다.
“그럼에도, 우린 당신이 희생하지 않는 길을 찾기로 했어요.”
“너희에겐 이미 내가 준비한 쉽고 빠른 길이 있어. 거칠고 오래 걸리는 길을 돌아갈 필요가 없다.”
그때 하은성이 심상을 움직였다.
“당신이 분노하고 증오하게 된 건 우리 책임이기도 해요. 우리가 늦게 섞였기에 당신의 새로운 업이 쌓였지요. 그러니 그건 백성들의 업보에요. 우리가 함께 감당할 결과이고.”
말이 끝날 무렵, 움직이던 세계가 하나의 형태를 만들었다.
늙은 엘프의 모습. 민준이 수형자 시절에 인연을 맺은 그다.
하지만 엘프의 마음까지 엮인 것은 아니었다. 하은성이 그를 떠올린 것이다.
“이 엘프는 옮고 그름을 구분하는 사람이었죠. 그는 스스로 세운 규칙에 따랐어요. 자신의 양심이 곧 원칙이었죠.”
민준이 남자의 이름을 뇌까린다.
“레이크필드.”
“그는 왕과 많은 업을 쌓았어요. 주로 은혜를 받는 식으로. 당신은 요원 시절, 타국 정보 기관에서 일하던 그를 몇 번이나 구했죠. 그 시절 각국 정부와 쌓은 업 때문에 퇴직 후에도 쫓기던 그를 한국까지 데려와서 안전하게 보호해주었구요.”
심지어 나중엔 못쓰던 다리까지 치료해주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어요. 더이상 당신에게 어떤 것도 요구할 수 없다고. 오히려 반대로, 남아 있는 짧은 생은 당신에게 은혜를 갚는 데 써야겠다고.”
심상이 울렁이며 비교적 최근의 기억을 비춘다.
“하지만 레이크필드는 마지막에 그 원칙을 깼어요. 당신에게 가족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죠. 왜냐면, 그만큼 딸이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에요. 삶의 원칙을 버려야할 정도로. 그런 그의 심정에 공감하나요?”
“···공감한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당신도 레이크필드와 같은 선택을 내릴 건가요?”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우리에겐 왕이, 레이크필드의 딸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다른 원칙을 깨서라도 구해야 할. 다른 이유를 모두 잊어도 좋을 이유. 사람에게 사람은, 그런 존재가 되곤 해요.”
심상이 한 번 더 출렁이고, 레이크필드의 환영이 무너지더니 다른 사람을 만들었다.
민준이 중얼거린다.
“···캐시.”
“그녀는 당신에게 소원을 빌지 않았죠. 힘과 권능의 격차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끝까지 동등한 관계로 남고자 했어요. 지구인 중 마지막까지 당신을 신이 아닌 사람으로 대한 이는 손에 꼽히죠.”
“그래, 저 녀석은 소원을 말하지 않았어.”
“하지만 바람은 전했죠.”
그녀는 민준이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놓아버려야 할 의무도 있기 마련이라고.
“그녀는 당신이 가끔은 해야 할 일 대신, 하고 싶은 일에 눈을 돌리길 바랐어요.”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왕이 하고 싶은 일이죠. 백성을 지키기 위해, 당신은 왕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해요. 사람이 아닌 신으로 군림하려고 했죠? 하지만.”
하은성의 눈이 그에게 묻고 있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왕으로서 희생을 바라는 당신이.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