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19
320. 업(業) (25)
***
백성을 충분하게 아끼려면 사람의 능력으로 부족하다고 느꼈기에.
왕의 자리로도 완전치 않다고 여겨서 신위(神位)에 오르기로 결심한 남자.
그 남자에게 하은성은 다시 묻는다.
“우린 오랫동안 연결되지 않았어요. 따라서 당신이 그간 겪은 아픔을, 희망이 꺾이는 좌절을 우리가 온전히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백성들은 그 이상을 아우르려 한다.
“그 이유로, 공감하려는 시도조차 포기해야 할까요? 노력을 그쳐야 할까요? 우리는 묻고 싶어요. 누군가를 도우려면 그 사람의 뜻을 먼저 알아야 하니까.”
무척이나 슬퍼 보이는 하은성을 향해, 민준은 묻는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 그대로 잠들어 있으면··· 너희는 안전하게 초월할 수 있었다. 나만 배제하면, 미리 준비한 대로 우주의 혈액이 될 수 있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완성되어 있었을 거야!”
“받았던 것을 그대로 돌려 드릴 뿐이에요. 왕으로서 당신에게 제일 소중한 게 뭔지는 이미 알기에.”
그리고 덧붙인다.
“당신이 전대 드래곤 로드의 기억을 보지 않은 이유도.”
“······!”
“젠킨슨만큼이나, 전대 로드도 당신과 너무 닮은 사람이에요. 그는 지구의 용을 위해 기원하는 것을 넘어, 드래곤이라는 종족 전체를 위해 삶을 바쳤죠. 그런 기억을 당신이 본 순간··· 아마도 공감을 넘어 그의 삶을 그대로 흡수해버렸을 거예요. 그때부터 당신은 전 차원계의 드래곤들조차 우리처럼, 당신의 백성들처럼 지키려고 했을 거예요. 당신은 그런 왕이에요.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알았기에 일부러 보지 않은 것이죠?”
이번에도 민준은 부정하지 않았다. 하은성은 그의 심리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왕이 아닌 사람으로서의 당신은··· 이 삶에서 무엇을 원하나요?”
오랫동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하은성은 한 손을 들어올리며, 자신의 가슴에 얹는다.
“사람은 왜 살아갈까요? 우리는 왜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을까요? 왕은 백성들의 소망을 비춰, 우리에게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지요. 당신의 아들이 언젠가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생(生)의 의미 같은 것은 없을지도 몰라요. 그저 살아가면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거죠.”
어디선가 아시프-1이 동의하듯 꿀렁거렸다.
“우리는 섞이는 사이 오랫동안 생각했어요. 훗날 완전히 연결되고, 우주의 혈액이 되어 영위할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결론은 이것이었어요. 행복이에요. 아마도 사람은 행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 같아요.”
“···너희는 먼 옛날에 이미 그 소원을 빌었다. 그래서 전임자들이 너희 뇌에 특별한 장치를 심었지.”
“하지만 그것은 조립되어 생산된 행복이었죠. 앞으로는 다를 거예요. 우린 스스로의 의지로 서로 도우며 행복을 틔울 거에요. 다시 묻고 싶어요. 당신의, 사람으로서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요? 질문을 바꿀게요. 왕이라는 객관적 주체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주관적인 존재로서,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대상은 무엇인가요?”
나의 가장 소중한.
그 문장을 읊조린 순간, 민준의 머릿속에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
하은성이 보낸 따스한 파동과 함께.
심상세계가 또 한 번 바뀌었다.
부글부글!
이번에 솟아오른 것은 고블린의 형상을 띄었다.
민준이 그를 떠올렸기 때문은 아니다. 동철이 대화에 끼어든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하은성의 기억이 만든 환영이다.
“동철이 형의 소원을 기억하나요?”
“···저 녀석은 두 가지의 소원 때문에 고민했지.”
동철은 경중을 가리기 힘든 소원을 두 가지 가지고 있었다. 그 전에 캐시가 자신의 소원을 양도했기에, 그가 원한다면 두 소원을 전부 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블린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고민했다. 그리고 민준과, 차례를 기다리는 정팔을 번갈아서 바라보았다. 매우 불안한 눈길로.
하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자 그의 고민은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다시 길게 이어진 그 설명을 민준의 언어로 정제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그중 하나는, 친구들이 굶주림과 아픔에서 해방될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적어도, 현재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에게 그럴 수 있는 디딤돌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지.”
“당신은 그 소원은 빌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그 시점에서는, 어차피 지구 전체에 엘라후-프라가 교단 사제들이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물밑작업 중이었으니까요. 고블린도 구호 사업의 대상이었죠.”
나중에 아들이 세계를 쉽게 지배하기 위한 밑작업으로서, 민준은 이미 차원계 곳곳에 사제들을 배치하고 있었다. 시작은 지구였고, 교섭하는 데에는 우주 모함이라는 채찍과 마정석이라는 당근이 적절하게 쓰였다.
“그러자 녀석은 한 가지 소원만 빌면 된다고 좋아했지.”
화르륵!
민준은 핏빛의 불꽃을 인지한다. 하은성 역시 그것을 가리켰다.
“동철이 형은 당신의 그 모습이··· 몹시도 괴롭고 아파 보였던 것 같아요. 형은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랐어요. 우리와 비슷한 소원이었네요.”
그때, 동철의 형태가 무너지며 부글거렸다. 그것이 모습을 바꾸며 융기했고, 곧 민준과 비슷한 불덩어리를 만들었다.
화륵!
화르르륵!
이제 빛가루가 만든 길 위에는, 어둠을 연료로 타오르는 불꽃과, 오크를 재료로 삼킨 불꽃이 마주 보며 대치했다.
민준이 그의 이름을 말했다.
“정팔.”
“네, 동철이 형 눈에는 당신도 정팔 아저씨도 불꽃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어요. 산 채로 마음이 타오르는 그 고통에서, 증오와 혐오에서 그 둘이 벗어나기를 형은 바랐어요.”
“난 그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지.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문제이니까.”
“누군가는 매우 긴 시간이, 또 누군가는 매우 짧은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건 말하지 않았죠.”
사실이었다.
“당신은, 정팔 아저씨의 증오가 빠르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에게 어떤 일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분노하게 만든 그 원흉에게 대신 복수를 해 주면 해결될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정팔과 둘이 이야기를 시작한 순간, 민준은 그것이 예상처럼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당시 둘의 대화가 재현된다. 정팔은 함께 있는 친구들이 그들의 대화를 듣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소원의 청취는 간단한 결계를 사이에 두고 진행되었다.
민준은 그날의 눅눅하고도 메마른 공기, 그 질감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처럼 느꼈다. 지구를 떠난 뒤 실로 오랜만에 재회한 정팔은 그가 잘 아는 눈빛을 뿜고 있었다.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눈.
그리고 정팔의 이야기가 시작된 순간.
민준은 극도로 분노했다.
“···네, 당신이 미처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였죠.”
그의 취임 축하 행사에서 벌어진 테러.
민준도 알고 지냈던, 정팔의 가족들 상당수가 심각한 부상을 입거나 세상을 떠났다.
비록 그 원흉은 젠킨슨이 진두지휘한 수사의 결과 체포되었으나.
정팔은 그 사건이 민준도 잘 아는 누군가의 의도적인 ‘방치’의 결과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당신이 돌아오기 전, 한동안 미래시가 정상으로 돌아온 덕분에 예언자는 테러를 미리 알았죠. 하지만 개입하지 않았어요. 아마도 그 오크의 마음속에 증오를 심고 이용하기 위해서.”
이제 정팔의 분노는 양쪽으로 타올랐다. 그들의 가족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인 인권연대와, 그것을 방치한 예언자 부녀.
오크가 물었다.
– 형님. 이제 저는 두 개의 소원을 빌 수 있는 겁니까?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팔이 말했다.
– 혹시라도··· 제 가족을 살려주실 수 있습니까?
정팔이 원하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들의 영혼은 이미 영계로 넘어간 뒤였으니.
민준은 다시금 자신이 전지전능하지 않음을, 그 근본은 사람에 불과함을 실감하며 고개를 저었던 것 같다.
애초에 정팔은 그쪽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은 듯, 질문을 바꿨다.
– 저는 예언자의 부친과··· 최판석 의원과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다른 친구들보다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레이크필드 사장님보다 더 형님에 대해 잘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최판석은 정팔에게 곧 다가올 세계의 질서를, 그 변화를 이끌 누군가에 대해 몇 번이고 강변했다.
그러던 중 민준이 돌아왔고, 위원회라는 범우주적 기관은 괴멸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평소에는 멀쩡한 사람처럼 보였던 최판석은 어느 순간부터 광신도처럼 굴기 시작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에게 세뇌를 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사실들로 퍼즐을 짜 맞추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 형님은 세상의 새로운 주인이 되실 겁니까? 적어도 그만한 힘을 가진 분이 되신 겁니까?
민준은 긍정하며, 정팔에게 물었다.
복수를 원하나?
오크의 답은 단호했다.
– 네, 복수를 원합니다.
화르르륵! 심상 세계에서, 그때 대화를 재현하듯 흉내내는 정팔의 형상의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지요.
민준은 이어질 그의 말을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권연대는 그들의 가족을 학살했다. 그렇다면, 정팔 역시 테러범들의 가족을 남녀노소 구별하지 않고 몰살시키기를 원할 것인가?
오크는 단단한 어조로 말했다.
– 그 테러의 원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애초에 그것은, 지구에서 오크라는 종족을 모두 지워버리기 위한 의도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혐오가 모든 것의 시발점이었습니다.
“놈들의 동기를, 의도를, 그 증오를 그대로 돌려주고 싶으냐?”
지구에서 인간이라는 종족을 완전히 지워버리기를 원할까?
이 별에서 그들을 멸종시키기를 바라는 것일까?
– ······.
공기가 모래처럼 까끌거리는 듯한 불편한 침묵 후에.
정팔은 이렇게 말했다.
– 전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민준은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던 것 같다.
오크는 이어서 말했다.
– 셀 수 없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저는 놈들이 왜 그런 동기를 왜 갖게 되었는지 생각했습니다. 이 별에는, 이 나라에는 쉽게 요약할 수 없는 복잡한 역사가 있습니다. 서로 업이 쌓이고 엮이며, 인간과 오크는 서로를 향해 원한을 불태워 왔습니다. 심지어 이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집단에는 죄를 물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괴멸되었으니까요.
마지막의 집단은 물론 위원회를 뜻하는 것이었다.
– 그래서 저는 생각해 봤습니다. 만약 인간과 오크의 입장이 뒤집혔다면, 우리가 인간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면, 오크가 지구의 지배종이었다면? 그렇다면 인간도 비슷한 테러를 당했을까?
결론은, 그렇다였다.
– 네, 그랬을 겁니다. 오크도 인간을 배척하여, 린치하고, 차별하며, 심지어 죽였겠지요. 이건 합리적인 추론입니다. 그게 사람의 본성이므로. 누구든 저지를 수 있는 짓이니까. 그렇다면 저는 인권연대를 비난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요? 비난할 필요가 없다면 복수도 필요 없어질텐데 말입니다.
민준은 그에게 답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 네, 망상입니다. 이 가정은 내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게 잘못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서만 정당화되니까요.
오크는 깊은 한숨 같은 불티를 토했다.
– 저는 폭력과 차별이 사람의 타고난 성향임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그 기울어진 마음을 영원히 고칠 수 없다는 명제는 부정합니다. 또한 입장을 바꾸면 같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가정에 매달리면, 우리는 세상의 모든 죄와 악 또한 용인해야 합니다.
타오르는 핏빛 불꽃 속에서, 오크는 이렇게 말했다.
– 나는 이 분노를 잊지 않겠습니다. 이 증오를 꺼트리지 않겠습니다. 용서는 없습니다. 용서는 피해자의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 다수는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나는 자신을 원망하고, 적들을 혐오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은 정팔의 힘이 될 터다.
– 되갚을 방법도 정했습니다. 다시는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게, 내 삶을 바침으로써 복수하겠습니다. 그들이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던 모욕적인 말이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수치스러워지는 세상을요.
오크의 두 눈에는 불길만큼이나 굳센 의지가 일렁였다.
– 신은 우리를 돕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을 바꾸지 못합니다. 변화는 사람들이 숨쉬고 말하는 세상의 공기 속에 있습니다. 내 적들 마음속 미움을 지울 수는 없어도, 그 주먹으로 폭력으로 행하고, 그 혀로 갈등을 유도하는 건 잘못이라는 인식을 공기 속에 퍼뜨리겠습니다. 물론 오크에게도 같은 잣대를 들이밀겠습니다.
정팔은 인권연대에 대해 생각한다.
– 그들이 회개하거나 마음을 바꿀 것이라고는 기대치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자신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내보일 수 없는 공기를 만들겠습니다. 이것이 제 복수입니다.
그리고 오크는 첫 번째 소원을 말했다.
– 형님, 형님은 최판석 의원의 정신에 뭔가를 하셨지요? 제게도 비슷한 것을 해 주십시오.
민준은 바로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 제가 원하는 것은 이 다짐과 의지가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지칩니다. 마모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은 고무줄과 같으니까요. 계속 잡아당기면 탄력을 잃고 늘어지겠지요. 전 그걸 바라지 않습니다. 번아웃(Burn-out)은 제게 사치스러운 단어입니다. 그러니 부디, 제가 원하는 바를, 제가 계속 원하게 해 주십시오.
정팔은 아직도 모른다. 민준이 그 소원을 어떤 방식으로 들어줬는지.
그리고 그의 두 번째 소원은 이것이었다.
– 형님은 저희에게 소원 하나씩만 말하라고 하셨지요. 하지만 서린이의 소원은 너무도 쉽게 양도되었고, 당신은 우리가 바라지 않은 많은 은혜 역시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아마도··· 우리를 계속 살펴보시겠지요. 당신은 그런 분이니까요.
정팔은 그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 혹여 나중에 다른 소원을 빌면, 형님은 그 개수와 상관없이 또 들어주실 분입니다. 당신은 그런 사람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가 이 분노와 증오를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쓰기로 결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찌 변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갑자기 가족에 대한 울분이 타올라서 테러범들의 가족에게 같은 짓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다.
아니면 인간이라는 종족 자체에 증오를 불태울 수도 있을 터다.
– 저는 사람입니다. 완벽하지 않습니다. 언제든 감정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형님처럼 위대한 존재가 제 뒤에 버티고 선 사실을 생각해 낼 겁니다. 어렵고 긴 길 대신 쉽고 빠른 길에 유혹을 느낄 겁니다. 그건 너무도 위험합니다.
오크는 강인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 그러니 앞선 첫 번째 소원을 제외하고, 앞으로 제가 형님께 어떤 탄원이나 부탁, 소원, 기원, 간청이나 기타 어떤 형태의 바람을 암시해도 그것을 들어주지 마십시오. 그것이 제 두 번째 소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