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20
321. 업(業) (26)
***
기억의 재생은 거기까지였다.
어둠 속에 환영처럼 서린 정팔이 움직임을 멈췄다. 민준이 지구로 돌아온 날 만났을 때 모습 그대로.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준이 기억을 찾기 전, 앞으로도 계속 같이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인간 하은성은, 지구에서 태어났지만 이 별의 역사를 잘 몰랐어요. 하지만 정팔 아저씨는 달랐죠.”
정팔의 소원을 이뤄주기 위해서는 아시프-1이 그의 정신을 관찰해야 했다.
그 결과 교황은 오크가 두 번째 소원을 빈 이유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증오에 휩쓸려 인간이라는 종족 전체에 폭력을 휘두를까봐 무섭다고 했죠. 하지만 말하지 않은 속내를 보면, 그건 단순히 감정의 통제 문제만은 아니었어요. 아저씨는 앞으로 쉽지 않은 싸움이 기다리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세월이 결국에는 사람을 바꾸고, 신념이 잘못된 방향으로 꺾일까 우려했어요. 그때는 자신이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도 이성적 판단으로, 차분하게 ‘공리주의적 학살’에 기여할까 겁이 났던 거예요.”
“최판석처럼.”
“네. 다수의 우리를 위해 소수의 타인을 희생시키는 일은, 이 별에서 몇 번이고 되풀이된 일이었으니까요. 열 명을 위해 한 명을, 만 명을 위해 천 명을··· 그러다가 종국에는 7천만을 위해 7백만을 학살했죠. 정팔 아저씨는 자신이 그런 악마가 될까봐 무서워했어요.”
“그럴 가능성이 0%에 가까운 걸 알면서도, 일말의 씨앗조차 없애려 했지.”
모든 변수를 없애려는 동기는 민준과 같았다.
다만, 그 변수가 의미하는 바는 서로 극과 극이었지만.
스으으!
마지막으로 정팔의 형태 역시 어둠 속에 스러졌다.
민준과 하은성은 그때까지도 암흑을 가로지르는 빛의 융단을 걷고 있었다. 환한 파동 위에 발을 딛는 민준은, 왜 그 넷의 환영을 봐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렇군.’
가장 소중한 사람을 위해 자신의 오랜 원칙마저 깨 버린 레이크필드.
아끼는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기를 바란 캐시.
증오의 불길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그것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 동철.
신념을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그 신념 때문에 자신이 사람을 해치는 걸 경계한 정팔.
“당신은 흑마법의 시조이지요. 현재엔 다들 잘못된 방법으로 쓰고 있지만, 본래 그건 자기희생에서 비롯된 마법 체계였죠. 당신이 지금 우릴 위해 하려는 일도 크게 보면 흑마법의 개념이고요.”
홀로 죄를 뒤집어쓰고, 다른 이들을 초월시키는 일.
“난 그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소수의 희생을 통해 다수가 행복을 얻는다면.”
“결과가 최대 다수의 행복에 기여한다면, 어떤 선택이든 정당화할 수 있다는 건가요?”
“선업과 악업 사이의 선택이라면 그래서는 안 되지. 하지만 지금까지 내 선택은 악업과 악업의 갈림길에 놓여 있었어.”
어느 쪽도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하지 않기에 차악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은성에게 그 말은, 민준이 스스로 희생하기로 한 선택 외에도 여러 가지 결정에 대한 답을 함의한 것처럼 들렸다. 행위 주체가 자신이 되는 희생을 악업으로 치부하는 건 모순이니까.
“하지만 당신은 예전에 아드키엘을 비난했어요. 그녀는 동족의 번영을 위해 당신을 실험체로 썼지요. 그 역시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이었고요. 그런데도 당신은 다시금 스스로에게 가혹한 일을 재현하려고 해요. 우린 이것 역시, 아드키엘이 당신에게 남긴 나쁜 영향이 아닐까 두려워요.”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질문을,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스스로 되풀이하고 있었으리라 하은성은 짐작했다.
빛에 휩싸인 유령은, 그리고 그와 연결된 백성들은 왕을 돕고자 한다. 왕이 사람으로서 원하는 것. 이룰 수 없는 소원이라고 생각하여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게 무엇인지 그들은 이제 안다.
“너희는 내게 뭘 제안하려는 것이지?”
“당신의 백성들은 함께 얽히며 방법을 생각하고 서로의 뜻을 확인했어요. 아마도 우리가 당신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민준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 한 것은 하은성의 말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두 사람이 걷던 길이 거기에서 끊겨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광도(光道)의 절단면 너머, 먼 곳에 무언가 신기루처럼 아른거린다. 지금까지 온 만큼 더 가면 닿을 듯도 싶었다.
또한 민준은 알 수 있었다. 하은성은 지금부터라도 홀로 걸어가며 길을 이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백성들과 섞인 그가 저 어둠을 향해 발을 딛으면, 그 속도에 맞춰서 다시 빛이 직선으로 뿌려질 것이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불가능하다. 이제 그는 하은성과 보폭을 맞출 수 없다.
사실 지금까지도 그가 정말로 나아온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여태 겪은 과정을 축소하여 체험한 것일 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민준은 이 심상세계의 상징을··· 백성들의 계획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중간에 너희가 늦추지 않았다면, 이 길은 이미 목적지에 닿았겠군.”
“네, 우리는 완전히 섞여서 이미 우주의 혈액이 되었을 거예요.”
“하지만 아직 반밖에 오지 못했어.”
“그리고 앞으로도 한동안 이쯤에서 머물 생각입니다.”
상대의 말투가 바뀐 것도 모른 채, 민준은 호통친다.
“아니 된다!”
“당신은 기나긴 삶을 우리를 위해 바쳤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은 결심한 바를 말했다.
“이제 당신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칠 차례입니다.”
“터무니없어. 이미 말했잖느냐? 너희에겐 안전하고 빠른 길이 보장되어 있다!”
“당신을 채운 혐오와 분노가 우리를 오염시킬까 두려운 것이지요? 걱정 마십시오. 곧 당신이 심장의 문을 열고 백성들을 깨우시면, 그 후로 우린 완벽한 각성이 아니라 예전의 당신처럼 얕은 잠에 얽히려 합니다. 간단한 말로 비몽사몽한 상태로 남겠지요. 그리고 우리가 꿀 꿈은 과거처럼 마냥 행복한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
“당신이 사람으로서 품은 소망을 알았습니다. 우려하신 대로 왕의 자아는 무겁고 깊겠지요. 그래서 당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 우린 연결을 시작할 겁니다. 당신 홀로 감당해야 했던 고통을, 악몽에 비견될 기억을 나눠 짊어지려 합니다. 우리가 앞서 얻은 것은 당신에게 드리고, 당신이 홀로 견뎌야 했던 것은 우리가 가져가겠습니다.”
백성들은 의식이 절반 정도만 깬 상태에서, 홀로 뒤쳐진 민준이 따라오게 돕는 계획.
왕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당신은 앞으로도 현실에서 깨어 행동하고 삶을 영위하는 동시에, 밤이 되면 우리를 비추는 행복한 꿈을 꾸십시오. 우리는 옅은 의식 속에서, 당신의 삶을 반추하는 악몽을 꾸며 연결을 점차 깊이 새기겠습니다. 너무도 긴 시간 홀로 떨어져 있었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서로 섞일 수 없을 테니까요.”
민준도 이론상으로는 떠올려 보았지만, 실행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방안이었다.
“그 길은 완벽하지 않아.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되고, 성공률도 100%가 아니다!”
“본래 계획도 성공률이 100%는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극단적일 수밖에 없지요. 예를 들어 세상에서 악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람의 자유 의지를 없애거나 세상에서 사람을 없애는 것이겠지요? 당신께서는 이미 그 중 하나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은성이 웃었다.
“걱정 마십시오. 지난 시간은 절대 헛되지 않았습니다. 왕의 희생 덕에 우리는 이만큼이나 연결되었고, 앞으로 비슷한 일을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당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지금 생각하시는 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예상보다 너무 빨라서 놀라실 수도 있겠군요.”
이제 백성들이 왕을 이끌 것이다.
민준이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했다. ‘너희는···.’
하지만 결국 문장을 끝맺지 못했고, 성스러운 영혼이 먼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불가능합니다. 일단 우리를 깨워주십시오. 그래야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셨지요? 나머지 동족을 일단 모두 각성시켜, 문제를 파악하고 개선하여 계획을 속행하는 것.”
그때.
아시프-1의 정신이 저 멀리서, 시간이 되었다는 듯 요동쳤다.
그러자 심계에 투영된 민준의 몸이 길에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당신께 보은할 기회를 주십시오. 저희를 깨워 주십시오. 그리고 그 방법은··· 오로지 왕께서 선택할 문제이겠지요. 흑마법과 신성력, 양쪽 모두 당신에게서 유래한 힘이니까요.”
어떤 마법으로 깨울 것인가?
“사람인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선택을 부탁합니다. 다스리는 자가 말했지요. 왕을 넘어 신이 된 당신이라도 근본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반쪽짜리 신과 반쪽짜리 인간의 결합체는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완전한 신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민준이 무언가를 급하게 말하려는 순간, 하은성이 이해한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네 명이 모여 정신을 얽는다는, 평소엔 절대 응하지 않았을 요구를 당신께서 허하신 이유도 압니다. 이곳에는 백성들의 정신이 남긴 파편이나마 존재하기 때문이지요?”
민준이 여기서 영혼과 대면하자마자 한 질문은 ‘누구’와 섞여있냐는 것이었다.
그들이 왕을 그리워했던 것처럼, 왕 또한 그들을 그리워한 것이다.
왕은 드디어 백성과 불완전하게나마 재회할 수 있었다.
“다시···.”
“지금 같은 방법이면 우리는 앞으로도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비몽사몽한 상태라도요. ···물론, 매번 꽤나 거창한 준비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하긴 하겠군요.”
민준의 시야에서 빛의 길이 멀어지고 더 아득해지다가, 가느다란 금빛 선처럼 변했다. 그러다 나중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거품처럼 솟아올랐던 하은성과 백성들의 정신이, 다시 모든 시간과 공간으로 흐르는 걸 느꼈다. 의지에 수반된 순수한 ‘힘’만 한정된 시공간에 남긴 채.
그의 심상에 하은성이 남긴 마지막 말이 울렸다.
“기쁘고 영광된 마음으로, 모든 때와 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우리의 왕이여.”
***
민준은 정신의 닻을 현실로 되돌린다.
—!
넷째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했고, 그의 곁에 선 아시프-1은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성령과 창조주 간 대화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사람은 그뿐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민준을 보았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놀란 고블린이 한 명 있었다. 동철은 방금 전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완벽하게 인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성을 초월하는 감각의 여파가 몸에 그대로 남았다.
‘방금 전··· 분명 전부 내게로 모였어!’
그 범위는 저 장발의 남자가 어려운 말로 설명한 것처럼, 행성 전체였던 것 같다.
나머지 이야기도 전부 맞았다. 동철은 안테나 역할을 했고, 그가 끌어모은 사람들의 총의(總意)는 고블린이라는 종족에 국한되지 않았다.
동철은 결국 아시프-1이 무의식을 자극한, 지구인 대부분의 소망과 그들이 품은 신성력의 씨앗을 수확하는 데 성공했다.
걱정과는 달리 아프지 않았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 대신, 몸속에 무언가 가득 차오르는 느낌만 받았을 뿐.
그리고 그대로 시간이 좀 지나서, 약간 벅차다고 생각한 순간···.
‘주인님이··· 도와주셨어.’
아시프-1이 인도하는 대로, 얽힌 마음이 민준을 향해 기울어 흘렀던 것 같다.
그 결과.
‘와······!’
핵(核)에 비유할 만한 어둠과, 그것을 덮은 핏빛 불꽃.
하지만 전보다 위세가 훨씬 약해져 보인다.
또한 그 위에는.
‘‘넷째’라는 사람이 힘을 보여줬을 때랑 비슷해. 아니, 그때보다 훨씬 환해. 그런데도 눈이 아프지는 않아.’
민준을 감싼 것은 실로 압도적인 섬광이었다.
그런데도, 예전에 느꼈던 안구가 탈 것 같은 아픔은 없다.
빛은 따스하고도 부드럽고, 편안했다. 상징화된 다른 요소보다 훨씬 크게 그를 감쌌기에, 아래에 묻힌 어둠과 불꽃은 종종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
“······.”
민준은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은성이 말한 대로, 시간은 1초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눈앞 풍경과 공기의 질감, 마력의 움직임을 통해 알 수 있었다.
하늘을 가득 덮은 드래곤의 행렬.
침략자를 막던 용족, 세뇌된 그들은 이미 대부분 바다로 추락하거나 산화되어 사라졌고 적들의 차원 도약은 거의 끝나가는 중이었다.
아시프-1은 긴장 속에서 창조주의 말을 기다린다. 아버지의 몸에 신성력이 들끓어 오르는 것은, 꼭 동철처럼 특별한 능력을 가지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창조주는 저 힘을 어떻게 쓸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실험할 것인가?
그렇게 자문한 순간.
민준이 무언가를 지시했다.
“···네, 알겠습니다!”
아시프-1은 잠깐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그 명령을 전 함대에 전파했다.
전함들을 둘러싼 결계가 사라지고.
콰아아아아!
하늘을 가득 덮은 드래곤들은 포위진을 더욱 두텁게 유지하며 민준의 전함과 대치했다.
예전에 지구에서 벌어진 사건을 아는 그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남은 용들이 전부 넘어온 다음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하지만 민준은 그때까지 기다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
그를 중심으로 빛이 연기처럼 이글거리며 흐른다.
민준은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넷째가 별 전체에 뿌린 빛의 포자에, 아시프-1이 방향성을 심고, 동철이 다시 수확했다.
그것을 건네어 받은 민준이 뇌까린다.
‘애초에, 신성력의 발현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소망’이지.’
하지만, 이 소망은 민준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민준은 이 힘을 쓸 때, 그들 대다수의 공통된 기원과 희망을 거스르면 안 된다는 걸 알았다. 그것에서 멀어질수록 힘은 약해지고 분산될 것이다.
민준은 계속 생각한다.
예전 동해안에서 두 명의 용과 민준이 전투를 벌였을 때, 그 여파는 중부지방 전체를 덮었다.
창천을 죽일 때는, 나중에 알았지만 한국 전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을 정도였다.
그리고 최근 민준이 수천 마리의 용 사냥을 한 뒤에는, 교단 사제들이 많은 신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간 온 지구의 일상이 멈췄었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많은 용들이 지구에 등장한 지금, 지구인들은 본능적인 적개감을 느낄 것이다. 따라서 민준이 이 힘으로 용들을 공격하는 것에는 어떤 저항도 없을 터.
그러니 이 자리에서 저들의 피를 전부 쥐어짜는 방안도 있겠지만.
“······.”
민준이 바로 그러하지 않은 것은, 그의 내면을 떠도는 빛 덩어리 중 하나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아시프-1은 이렇게 말했다. 신성력의 포자가 드래곤에게는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따라서 용들의 소망은 이곳에 침공한 외계인이든 지구에 거주 중인 드래곤이든 신성력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녀석.’
민준은 동철이 수확한 열매 중에 아주 익숙한 이의 파편을 발견한다.
입술이 열리고 이름이 흘러나왔다.
“···젠킨슨.”
민준이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던 상황이었다.
어떤 종족의 마음에, 그 파편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
사실 민준의 본래 계획은 저 많은 드래곤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고 전투를 벌인 후, 살아남은 이들을 수거하여 피를 쥐어짜는 것이었다. 수가 수인지라 저번처럼 깔끔한 사냥은 불가능하겠지만.
“······.”
잠시 주저하던 민준이 아들에게 묻는다.
“넌, 저 모든 드래곤을 한꺼번에 세뇌할 수 있겠나? 마음을 완전히 지배하거나, 거동이 힘들 정도의 타격을 입힐 수 있겠어?”
아시프-1은 고개를 젓는다.
“아··· 아니요,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들은 이미 만 단위에 이르렀습니다.”
모인 신성력으로 어떤 주문을 만들 것인지, 민준이 결정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더니 멀리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곤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골치가 아픈 것 같기도 한 여러 표정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는 마침내 무언가를 확인한 듯 말했다.
“젠킨슨 그 녀석··· 결국 심장을 흡수하지 않았어. 그대로 남아있잖아?”
“네?!”
아시프-1은 그 말을 알아듣고 놀랐다.
창조주는 방금 젠킨슨과 원거리 교신을 주고받은 것 같다.
“전대 드래곤 로드의 심장 말씀이십니까?”
“그래.”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젠킨슨이 그것을 흡수하지 않은 이유를 덧붙인다.
“아니, 그대로 남아있다는 말은 잘못되었군. 심지어 거기에 ‘자기 것’을 덧씌우기까지 했으니.”
“······?!”
“지금 이야기가 끝났다. 줬다 뺐는 것 같긴 한데, 잠시 다시 빌리기로.”
팟!
그 순간, 민준의 앞에 붉은 색의 거대한 결정이 나타났다.
먼 거리를 뛰어 넘은 텔레포트.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어떤 드래곤이 보관하던 물건이었다.
아시프-1이 입을 쩍 벌렸다.
“드래곤 하트?!”
“너무 자세히 들여다보지 마라. 지금 여기엔 고룡 두 명의 기억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거든. 뭐, 너라면 완전히 매몰되진 않겠지만.”
민준은 유산으로 상속받은 전대 드래곤 로드의 심장을 젠킨슨에게 선물했다. 그의 수명 연장과 마력 성장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건 아시프-1도 아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도 몰랐던 부분이 있다. 일단, 엄청난 용량의 기억을 저장하는 그 마법이 드래곤 하트에 여전히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심장을 손에 넣은 레드 드래곤이··· 그걸 흡수하는 대신 거기에 자신의 기억까지 덧입힌 사실도.
민준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그 녀석은 자신이 외계 드래곤들 사이 암살 1순위에 오른 걸 예상했지. 내가 보호해 줄 걸 알면서도 만약을 위해 자기 기억까지 덧입혀 기록한 거다. 어려울 것도 없지. 애초에 스펠을 만든 드래곤의 모든 걸 이어받았으니.”
전승이 끊겨서는 안 될 의지가 있다.
전대의 기억만큼이나, 젠킨슨은 자신의 기억과 진심 역시 후세에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민준에게 심장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후에도, 그걸 여전히 저장 장치처럼 사용하여 훗날 뜻이 맞는 동족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죽기 전 그런 용을 한 명이라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민준은 심장을 내려다보며 그 위에 황금색 빛을 덮었다.
그리고 자기합리화를 하듯 중얼거린다. 지금 하려는 일을 평가하며.
“···뭐, 일종의 정신공격이라고 치면 되겠군. 사실상 세뇌라고 봐도 되겠고.”
전대 드래곤 로드가 설계한 마법으로는 기껏 한 번에 한, 두 명에게 기억을 전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때마다 엄청난 마력이 소모되었고 말이다.
민준은 아시프-1이 방금 전 불가능하다고 했던 일에 대해 떠올린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젠킨슨이 언젠가 설명해 준 전대 로드의 유지를 되뇌었다.
– 계승자의 자아는 보존된 채, 로드가 전하려던 생각과 감정, 기억이 추가로 전승되는 구조였습니다. PC에 보조기억장치 하나를 더 꽂은 것과 같다고 그는 묘사했지요.
– 심지어 계승자는 그걸 본래 자기 것과 완벽하게 구분해서 인지했을 거라고 합니다. 상대에게 나쁜 영향을 끼칠 의도는 없습니다. 찰나에 모든 과정이 끝나는 겁니다.
전대 로드와 젠킨슨.
그가 ‘벗인 동시에 사람’으로 인정한, 단 둘뿐인 드래곤.
콰라라라!
수만의 용족들이 해일처럼 덮친다. 형형색색의 개체가 모인 군대는 하늘과 바다를 덮으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향해, 민준은 닿지 않을 중얼거림을 흘린다.
“용이라는 종족은 애초에 우리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 두 사람은 지구라는 작은 별의 드래곤 로드에 불과했지만···.”
용들은 포효했다. 그들의 머리와 눈은 민준을 향했다. 입에서는 전투를 앞두고 흥분한, 언어가 될 수 없는 짐승 같은 울부짖음과 오직 사람만이 퍼부을 수 있는 증오서린 저주의 말이 터져 나왔다.
그들 모두를 눈에 담으며 민준이 말했다.
“어쩌면 너희들의 진정한 로드는··· 그 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군.”
말을 끝맺은 순간.
민준은 몸속에 끓어오르는 원시적인 힘을 정교한 주문으로 제어했다.
보통 사람들은 신성력과 신성 마법이라는 용어를 혼용한다. 하지만 초능 마법이라는 단어가 없고 그냥 초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신성 마법 또한 잘못된 단어임을 민준은 알았다. 그 힘은 스펠로 제어하지 않는 본능적인 영역의 이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민준은 처음으로 시도하려고 한다. 얽힌 정신으로 전달받은 힘을 연료로, 태초의 종족이나 알 법한 고난이도의 주문을 만든다. 그가 던진 키워드에 따라 기억이 엉키며 손끝에 모였다.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차원계 역사 상 처음 발동되는 진정한 ‘신성 마법’이었다.
파아앗!
민준의 몸에서 퍼진 빛이 모든 드래곤을 파도처럼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