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21
322. Epilogue (본편 完)
***
윰투스는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었다.
“아니, 그러니까···.”
주교는 두통을 느끼며 테이블 너머 상대에게 말했다.
“지금 제게 개종(改宗)을 권유하시는 겁니까?”
한때 이름도 없이 넷째라고 불렸던 금발의 청년은 당당하게 대꾸했다.
“네, 윰투스 주교님을 우리 교단으로 스카우트하고 싶어요. 조건은 잘 맞춰드릴게요.”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사람은 세 명뿐이다.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신성력 능력자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였다. 사실, 이제와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다.
윰투스는, 아무리 그래도 상대의 직속상사 앞에서 이직을 권유하는 것은 너무도 과한 언행이 아닌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하필 저입니까? 그리고··· 심지어 개종 후에는 개명(改名)도 하라구요?”
“저희 교단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행정과 운영 전반을 책임질 브레인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저나 동철이 형이나 그런 쪽으로는 경험도 지식도 부족하거든요.”
“아니, 제가 알기에는 동철 님도 딱히 당신 교단의 신자가 되겠다고 한 적은 없는 걸로···.”
“그리고 개명은, 그래야 세 명 이름의 운율이 맞으니까요.”
윰투스는 그가 제안하는 새 이름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설마?”
“네. 동철이 형이 개명할 수는 없으니, 윰투스 사제님이 ‘은철’로 이름을 바꾸시죠?”
야 이 미친놈아.
윰투스는 당장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교단의 우두머리임에도 ‘신’의 총애를 받는 자에게 무례를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주교는 저 1인 종단의 수장이 기절했다 깬 순간을 기억한다. 그의 첫마디는 이것이었다. ‘···아아, 치킨. 치킨 먹고 싶다.’
다소 경망스러운 발언과는 별개로, 그는 무아지경에 빠졌던 칠일간의 일을 본능적으로 기억했다. 자신이 퍼뜨린 종자가 별 전체를 뒤덮었고, 그것을 동철이 다시 거두어 들이는 기적이 행해졌음을 말이다.
그것은 매우 황홀한 영적 체험이었던 것 같다. 동철에게 매우 깊이 감명을 받은 나머지, 그는 어떤 결심을 했다. 스스로 교황이라고 칭한 주제에, 전도에 성공한 교인 1호(라는 일방적 주장의 대상)를 따라, 드디어 자기 이름을 손수 지은 것이다.
그 두 글자는 바로···.
“금철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기왕이면 교황님이라고 불러주세요.”
“아··· 그건 이 자리에 교황께서 두 분이나 계시다 보니···.”
자기 머리색으로 보나, 교황이라는 위치로 보나, 동철과 끝 글자를 맞추기 위해서나 가장 적합한 이름이었다며, 금철은 자신의 작명 센스에 매우 만족하는 눈치다.
윰투스는 인상을 찌푸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미 잘 아시겠지만, 전 이미 실존하는 신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분의 분노가 두렵지 않습니까? 제가 어떻게 이미 존재하는 신을 부인하겠습니까?”
금철은 검지를 들어올리며 좌우로 흔들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심사숙고해봤는데, 저희 교단은 일단 포용적 다신교 컨셉으로 밀고 나갈 생각이에요.”
윰투스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다신교요. 개념은 익숙하시죠? 내가 믿는 이분도 신이고, 네가 믿는 그분도 신이다. 전부 다 인정하고 용인해서 같은 교리 안에 집어넣는 거죠. 더 큰 우리가 되는 거예요.”
윰투스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 갑자기 차원 #00-001에 남아있는 꼬물이들이 그리워지기도 했다. 그 녀석들을 허공에 던지면서 비행 놀이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애탄 눈빛으로 상석에 앉은 남자를 본다.
하지만 요즘 윰투스 앞에서는 체면 차리는 것도 귀찮아하는 그 남자는, 예복 대신 레더 바이커 자켓에 셀비지 진 차림으로, 두 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교··· 교황님.”
애탄 눈길을 무시하며, 엘라후-프라가 교단의 우두머리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쟤가 믿는 그 신이, 사실 네가 믿는 그 신과 동일인이라는 걸 알려주면 안 되겠지?’
금철이나 윰투스나 사실은 같은 신을 믿으면서 서로 개종을 하라느니 못하겠다느니 교리가 어쩌느니 말다툼을 하는 광경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여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중이었다.
그는 눈길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둘 다 그쯤 해 두고, 일 이야기나 하지.”
그나마 화제를 돌려줄 생각인 것 같아, 윰투스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는 비어 있는 의자 하나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동철님이 늦으시는군요.”
두 교황이 동시에 말했다.
“지금 오네.”
“저기 오네요.”
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자동문이 열렸다. 윰투스는 그가 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지만, 두 교황은 일찍부터 알아차린 모양이다.
동철은 세 사람에게 겸연쩍게 웃으며 인사했다.
“늦어서··· 죄송해요.”
그는 레이크필드의 송별회에 다녀온 참이었다. 딸과 재회한 엘프는, 이번 달 내로 지구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위원회가 건재했던 시절엔 다시는 발을 딛을 수 없었을 땅이었지만 이제 자유로이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철이 자리에 앉자 윰투스가 브리핑을 시작했다.
차원계 지도가 허공을 수놓는다.
“이미 ‘파종’ 단계의 실험은 충분히 했다고 그분께서는 판단하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는 ‘수확’을 늘릴 생각입니다. 이동 경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차원 #54 129. 차원 #99-104, 차원 #14-323···.”
그들이 앞으로 돌아다녀야 할 차원 좌표가 계속 나열되었다.
2021년 새해가 밝은 뒤 약 네 달 간, 두 교황과 고블린은 선별된 차원을 순회하며 지구에서 한 것과 같은 일을 했다.
“어··· 그러니까··· 저도 그냥, 똑같이 하면 되는··· 거죠? 주인님··· 아니, 민준 형님··· 도 거기 계시는 거구요?”
윰투스의 표정이 살짝 불편해졌다. 흠흠, 헛기침을 하며 차원 좌표 중 하나를 가리킨다.
“네, ‘신’께서는 이번 순회에서는 사흘 뒤 여기 이 차원에서부터 저희와 합류하실 계획입니다.”
그때 핸드폰에 빠져 있던 장발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쯤이시지? 방해가 될까 아버지께 영계 통신도 안 보내는 중이라서 말이야.”
윰투스는 방금 가리켰던 것과는 다른 차원 좌표를 읊었다.
동철이 순수한 궁금증을 담아 물었다.
“민준··· 형님은, 거기서 뭘 하고 계실까요?”
그러자 장발의 교황은 무심하게 턱을 긁었다.
“글쎄요, 제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눈동자를 허공에 굴리며 덧붙인다.
“적어도, ‘일’을 하고 계시진 않을 겁니다.”
***
“의원님, 무릎이···.”
정팔은 수행비서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머리가 멍했다. 비서는 아마도 자신을 몇 번이나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무릎? 무릎이 왜···.
그는 바닥에 꿇은 무릎 양쪽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각 때문에 그제서야 몸서리쳤다. 잔디의 이슬이 양복에 스며든 것 같다. 동시에 과거의 한 시점이 떠올랐다. 지금과는 달리, 비릿하고 따스한 액체에 두 무릎을 적셨던 그날이.
“의원님···.”
“아, 미안합니다.”
정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의 무릎 부분에는 젖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비서는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고 권했지만, 오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있던 자리 앞에는 묘비가 나란히 서 있었다. 돌의 표면엔 정팔이 세상의 누구보다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는 그들의 무덤 앞에 놓인 꽃을 바라보았다. 종류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가 가져왔지만 다른 하나는 알 수 없었다. 양쪽 다 방금 가져다 놓은 것처럼 풍성하고 싱싱했다.
‘레이크필드 사장님도, 서린이도, 동철이도 아닌데.’
그는 방금 전 그들과 함께 있다가 왔다. 송별회에 잠깐이나마 얼굴을 내비친 것이다.
어제는 작고한 모친의 생신이었다. 당일 출장 일정 때문에 찾아오지 못한 정팔은, 오늘 늦게라도 여기 올 예정임을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가 송별회 자리를 뜬 뒤, 바로 묘지로 향할 것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가십시다.”
세단이 부드럽게 출발했다. 오크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며, 뒷좌석에서 서류를 뒤적거린다.
그는 요즘 그 어떤 의원보다 바빴다. 예전에 최판석 의원이 담당하던, 오크 의원의 구심점 역할을 자연스럽게 넘겨받은 이유도 작용했다. 그 5선 의원에 비하면 나이도 경력도 미천하지만, 아무도 그의 존재감을 무시하지 못했다. 이 오크의 뒤에 버티고 있는 드래곤 때문이다.
지구의 드래곤 로드가 박정팔 의원의 뒷배라는 소문은 전국에 파다했고, 정팔은 그것을 굳이 부인하는 대신 이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았다.
오크는 요즘 혼신의 힘을 다해 하루를, 모든 나날을 살았다. 매일 아침을 시작할 때마다 삶을 다시 시작하는 것처럼.
서류를 읽다가 중얼거린다.
‘최의원님··· 당신은, 정말 여러 일들을 꾸미고 있었군요.’
거기엔 최판석 의원이 오크와 인간 간 갈등을 격화시키고, 그들 종족의 내부 단결을 꾀하기 위해 해 온 일련의 활동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본래대로면 아무리 정팔이라도 손에 넣기 힘들었을 자료다.
하지만 2021년 새해가 밝고 며칠 후, 최판석과 재회한 그는 상대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노인은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는 ‘세상의 주인’이 자신에게 언제 벌을 내릴까 알 수 없어, 그날만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또한 그런 노인의 공포를 악화시킨 요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때 들은 절규가, 정팔의 귓가에 환청처럼 스쳤다.
– 예언해! 예언을 하란 말이다! 왜··· 왜 갑자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거냐!
이성을 잃은 최판석은 그 앞에서 털어놓지 않아도 될 부분까지 지껄였고, 덕분에 정팔은 그들 부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2021년 1월 1일을 맞이했음에도 그 후의 미래를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를 모르는 건 그들 부녀나 정팔이나 마찬가지였다.
‘참, 희한하군.’
최판석이나 인권연대나 정팔이 증오해 마지 않던 대상이다.
그리고 연초까지만 해도, 둘 중 어느 쪽이든 떠올리면 일을 하기 힘들 정도의 격노를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예전 그 노인이나 테러리스트를 생각할 때 뒤따랐던, 정팔 본인을 향한 지독한 분노와 자기혐오가 없었다.
가족들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곤 했던 감정이.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오늘 송별회에서, 동철이 밝은 얼굴로 그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 만 걸 정팔은 모른다.
그랬다. 데모닉 고블린은 볼 수 있었다. 정팔을 연료로 태우던 불꽃이 눈에 띄게 작아졌음을.
오크는 작년에, 자신이 가장 의지하고 믿던 존재에게 소원을 빌었다.
나의 신념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도록. 스스로 원하는 것을 계속 원할 수 있도록.
혹여, 현재 내가 과거만큼 괴롭지 않다는 사실은··· 그 신념이 녹슬었다는 사실을 의미할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서류를 덮으며 생각한다.
정팔이 가슴에 품은 칼은 여전히 무겁고 날카롭다. 그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분노를 느낀다. 앞으로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꾸고 나아가도록 내 모든 것을 바칠 것이다.
그럼에도 오크가 혼란을 느끼는 이유는, 첫 번째 소원이 어떤 방식으로 실현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정팔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계속 원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 소원을 들은 남자는, 사람이라면 무의식적으로 바랄 소원 역시 같이 들어주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에 대해 생각하던 오크가 문뜩 생각한다.
“아··· 설마?”
레이크필드도, 캐시도, 동철도 아니다.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하은성일 리도 없다.
그렇다면 결국···?
“아니.”
곧 고개를 젓는다.
“그럴 리가 없지.”
옆 좌석의 비서가 묻는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안경을 벗으며, 정팔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속으로 중얼거린다.
‘형님, 지금은 어느 차원에 계신 겁니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짓던 표정을 정팔은 똑똑히 기억한다.
항상 그런 사람이었지만, 그날도 그 남자는 너무도 지쳐보였다.
‘어디에 계시든···.’
오크는 기원한다.
‘그때보다는 좀 더 편안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차량은 그의 지역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전히 슬럼가 곳곳에는 폭력과 파괴의 흔적이 보인다. 눈길이 닿지 않는 골목 안쪽에서는 훨씬 끔찍한 악취를 풍기는 중일지도 모른다. 크고 작은 악을 만들거나, 그것에 엮이며 사람들은 여전히 힘겹게 살아간다.
끔찍했던 2020년에는, 올해 한 해만 버티면 모든 것이 더 나아질 수 있을까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정작 그토록 기다리던 2021년을 맞이한 현재, 사람들의 삶은 모두의 기대만큼 나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작년보다는 올해에 모두가,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갈 수 있도록 돕겠다고 정팔은 다짐한다.
창문을 조금 내렸다. 사방에 포근한 햇살이 꽃을 피웠다. 몰라보게 따스해진 공기가 살갗을 간지럽힌다.
봄이었다. 시작하기 좋은 계절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
민준은 눈을 떴다.
“···왜 그러고 있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채, 델이 웃고 있었다.
민준은 상체를 일으켰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다. 기억을 완전히 되찾은 뒤로는 잠을 잘 필요가 없었지만, 올해부터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는 우주 전함의 창밖을 본다. 외계의 풍경임에도 익숙한 시가지가 펼쳐졌다. 수형자 시절 근무했던 차원 중 하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델이 말했다.
“그냥, 얼마나 좋은 꿈을 꾸길래 그렇게 웃을까 싶어서.”
“내가 또 그랬나?”
“어, 또 그랬어.”
민준은 턱을 쓰다듬는다. 방금 전에 꾼 꿈은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있었다. 자기도 모르게 또 웃고 있었던 모양이다.
델은 민준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이곳은 민준이 델과 만나기 전에 복역했던 장소이기에, 그녀로서는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둘은 요즘, 민준이 수형자 시절 머물렀던 장소를 차례로 방문하고 있다.
“무슨 꿈이었어?”
그렇게 묻는 델에게, 민준은 잔잔한 울림처럼 답했다.
그 말투는 태초의 종족이라기보다, 한때 아시프-666이라고 불리던 남자의 것에 가까웠다.
“그냥, 평소랑 똑같았어.”
“사람들 꿈?”
“그래, 사람들 꿈.”
민준은 오래전, 행복한 꿈으로 서로를 잇는 계획을 세운 이유를 상기했다.
잠든 백성들이 꿀 꿈은, 다름 아닌 서로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선과 즐거움, 만족만으로 채워 넣을 수는 없음에도. 그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음에도 행복한 꿈이었던 이유는, 그 과정을 통해 결국 서로를 긍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이나 일시적 희열을 넘어선, 사람이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무엇인가?
민준은 그것이 사람과 사람의 연결 속에 있다고 보았다.
델이 손가락으로 민준의 가슴 위를 덧그리며 말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 지금도 당신이,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게.”
델은 민준이 백성들을 깨운 현장에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그날,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펑펑 울었던 그녀의 모습을 기억한다. 나중에 왜 울었냐고 물어봤지만 델은 그 이유를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얼마나 오래 걸릴까?”
민준은 심적 세계에서 하은성과 대화를 나눈 그 순간을 되새긴다.
사람으로서의 자신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 민준은 명확한 말로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은성과 백성들은 그것을 이해한 모양이다.
그들은 민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생각만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
만약 동철이 지금 자신을 본다면, 그 눈에 비친 불꽃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 것인가?
민준은 그의 내면을 채웠던 미움과 분노를, 이 순간 꿈속에서 경험하며 희석시키고 있을 백성들을 생각한다. 그 동시에 왕이 그들이 있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힘을 쓰고 있는 그들을.
그리고 민준은 오로지 그들에게 의존하는 대신, 그 또한 백성들을 도울 방법을 찾기로 했다. 따라서 실험을 계속할 예정이다.
“여기서 다들 모이는 거지?”
“그래. 여기가 좋을 것 같았어. 어차피 내 경로와 겹치니까.”
“이곳의 드래곤들은···.”
“대부분 12월 31일에 지구에 왔었던 녀석들이지.”
델은 쉽게 납득했다.
작년의 마지막 날, 델은 지구에 없었지만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는 익히 들었다.
민준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수만의 드래곤들에게, 전대 드래곤 로드와 젠킨슨의 기억을 심었다.
그것은 민준의 평가처럼 세뇌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정확히는 정신 공격에 가까울 것이다. 그들은 좀 더 거칠고 미완성된 방식으로 전임자의 기억을 받아들였던 젠킨슨과는 달리, 인격이 갈라지는 사고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저 알게 되었다.
지구에서 살다가 죽은 골드 드래곤과,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레드 드래곤의 마음을.
그리고 그들은 극도의 혼란을 느꼈다. 본래 침공군은 눈앞에 버티고 서 있는 아시프-666을, 태초의 종족을 당장에 찢어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사람’을 벗으로 여기고 아꼈던 두 드래곤들의 기억과 감정이 생생하게 그들 안에 살아있었다.
군대가 와해되고 전열이 붕괴되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민준은 그들이 지구 밖으로 탈출하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뒤쫓아서 사냥하여 피를 쥐어짜지도 않았다.
“그때 그 일을 경험한 드래곤들은, 그 후로 엘라후-프라가 교단이 하는 모든 일에 순종하듯이 굴고 있어. 자기가 왜 그런 선택을 내리는지 혼란스러운 상태에서도. 그러니 이번 내 방문과, 여기서 신성력으로 할 실험에도 전적으로 협조하는 거지.”
또한, 감히 민준에게 대항할 용기조차 내지 못했다.
그때 또 비슷한 일을 당한다면, 자신이 다시 어떤 존재가 될지 상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민준은 지나가는 투로 말한다.
“게다가, 꽤나 놀랄 만한 소식을 들었어.”
“어떤?”
“젠킨슨 말고도, 자발적으로 피를 바치겠다고 약속한 드래곤이 나오고 있다더군.”
민준과 직접 연락할 방법이 없는 그들은 교단을 통해 접촉을 시도했다.
그래서 요즘 사제들은, 그들의 신이 필요 없다고 여겨서 일부러 정해놓지 않은 세부적인 규칙과 시행령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는 중이었다.
“자발적으로 공혈룡이 된다고? 그건,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 아니면 자기도 언젠가 죄인이 될까봐? 그것도 아니면··· 먼 미래에 닥칠 우주의 멸망을 유예하기 위해?”
“동기는 각자 다를 수 있겠지.”
민준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한다.
“아마도 마지막 이유가 제일 결정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개체로서, 혹은 종으로서 계속 존재하고 싶은 소망은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으니.”
그리고 덧붙인다.
“애초에 내가 ‘신성 마법’으로 동족들을 깨울 수 있었던 것도, 결국 그게 사람이라면 품기 마련인 소망과 결을 함께하기 때문이었으니까.”
지구인이 용을 쫓아내는 마법을 긍정한 것처럼.
사람의 본능적인 소망은, 동족을 깨우는 마법의 결과 또한 긍정한 것이다.
그 후로도 민준은 여러 행성에서 지구에서 했던 일을 재현하는 중이다. 용을 쫓고, 동족을 깨우고 나서도, 이 힘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 탐구하는 것.
예를 들어 신성력으로, 동족들과 자신이 섞이는 속도를 좀 더 빠르게 만들거나 혈액이 우주에 운반할 양분을 대체할 무언가를 찾거나, 아직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세상에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지 않을까?
그 방향이 사람들의 소망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면.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 삐이익!
통신기에 불이 들어오며, 착륙 30분 전을 알렸다. 그때 델이 문뜩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아 참, 내가 전에 신성력에 대해 자료를 찾아봤었잖아?”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델은 아들을 돕기 위해 엔델리온의 데이터 기지에서 며칠 머문 적이 있다. 결국 교황은 금철을 찾아냄으로써 문제를 해결해버렸지만 말이다.
델은 그때 본 자료를 기억해낸다.
“이제 와서 별 의미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이어지는 말에, 민준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애는 신성력의 근원이, ‘믿음’이나 ‘소망’이 아니라 ‘자기 초월’이라고 했지? 그리고 종교는 사람이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유일한 예외는 고블린이라고 말이야. 그런데··· 또 다른 케이스가 먼 옛날에 존재했던 것 같아.”
엔델리온의 기록에 따르면, 신을 믿지도 않았고 고블린도 아니었던 한 사람이 신성력에 각성한 케이스가 있었다.
“그는 이미 신성력 능력자들이 득세한 행성에서 태어났어. 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신의 존재를 부정했지. 그리고 그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 서로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민준이 절로 어떤 오크를 떠올리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결국, 그를 못마땅하게 여긴 교단에게 잡혀서 목이 잘렸지. 종교가 힘이 센 행성이었거든.”
그리고 델은, 그 케이스가 시선을 끈 이유를 말했다.
“그런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종의 돌연변이였던 것 같아. 왜냐면, 그는 자기가 보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눈부신 빛을 느꼈다고 해.”
“···반대가 아니라?”
“응. 만인의 눈에 그는 평범하게 보였지. 반면 그의 눈에 비친 세상 만민은 눈부시게 빛났고, 기이하게도 그는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기록되어 있어.”
“그의 종족은?”
“인간이었어.”
태초의 종족 실험체로부터 유래한 종족.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델이 그의 추측과 비슷한 말을 읊었다.
“세상에 그 스스로 빛을 발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특이한 능력자가 있다면.”
다시 말해, 세상에 민준과 같은 사람이 있다면.
“반대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빛을 보고 그들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존재했던 게 아닐까?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민준과 정반대의 능력을 지닌 사람도 존재했던 것일지도.
델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말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 애는 신성력의 근원을 ‘자기 초월’이라는 어려운 단어로 정의했지만, 사실 그걸 대신할 훨씬 쉬운 단어가 있지 않을까?”
민준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델은 그가 충분히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그 편안하고도 안락한 침묵에 익숙해질 무렵, 민준이 다가왔다.
“착륙까지 아직 25분이 남았는데 말이야.”
델은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그는 예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기도 했고, 여전히 그녀가 아는 민준 같기도 했다. ‘자기 초월’을 대신할 단어를 실행하기 위해 다가오는 그의 손을 잡고, 시선을 마주쳤다. 그 스스로를 난도질하듯 타오르던 분노를, 적어도 델은 볼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 속에서, 민준은 자신을 긍정했다.
후기 (9월 1일 수정)
이번 여름의 끝은 유난히 습하고 비가 잦았지요. 양치식물에겐 최적의 성장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글 쓰는 책상에 고사리 화분이 하나 있는데, 녀석이 근래 폭풍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덩치를 불리고 불리다 못해, 흙을 뚫고 하늘로 뿌리를 수십 가닥 뻗어내고 있습니다. 더 큰 화분으로 바꿔줄 시기를 한참 넘겼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정신없는 한 해였네요. 하지만 이번 주말에는 드디어 분갈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창고에 35리터짜리 흙 포대를 쌓아 두고 벼르는 중입니다.
잡설이 길었습니다. 독자분들께서 관심과 사랑을 주신 덕분에 본편이 완결되었습니다. 고개 숙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당하게 주 5회 연재를 선언했지만 시스템을 보니 평균 주 4회 업로드했다고 뜨네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송구스럽습니다. 속도 때문에 답답하셨을 분들께도요.
사실, 전작을 완결낸 2019년 당시 저는 장편을 또 쓸 자신이 없었습니다. 시간적으로 쫓기기도 했고, 이미 소설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았거든요. 출판사 담당자 분과 미팅을 했을 때 표를 내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앞으로 이 분과 업무상으로 다시 뵐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을 정도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모 PD님···)
그런데 이번 소설을 끝맺고 보니, 결국 전작보다 글자수 기준으로 더 많이 썼네요;;; 아직도 할 이야기가 많았나 봅니다. 심지어 그때보다도 훨씬 즐기면서 쓸 수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저 보다는 독자 분들이 느낄 흥미를 우선으로 둬야 하는데, 이번에도 그 부분을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즐겁게 쓴 소설이니 독자분들도 즐겨 주셨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덧붙여, 향후 일정에 대해 말씀 드리면··· 본편의 메인 스토리에 집중하기 위해 생략한 에피소드가 좀 있습니다. 요원 신분인 주인공이 정작 지구에서 외계인을 수사하고 때려잡는 이야기가 적었던 이유입니다. 이런 내용을 추려서 가을 내, 늦어도 10월부터 외전으로 연재하려 합니다.
또한 여기서 말씀드리기 힘든 이유로 에필로그가 제 계획보다 매우 짧아졌으므로(ㅠㅠ) 소설 내 시점으로 2021년에 일어난 일에 대한 외전도 있을 예정입니다. 본편에서 묘사된 사건 후 등장인물들 신상 및 관계가 어떻게 변해가는지에 대한 내용도 물론 포함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올 여름쯤에는 새로운 글로 찾아 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추세라면, 그땐 고사리가 책상 면적 반 이상을 점령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리고 바라건대, 그쯤이면 모두가 서로 두어야했던 거리가 원래대로 좁혀진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뵐 때까지 계시는 곳에서 건강하고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댓글로 문의 주신 내용을 반영하여 공지글을 수정했습니다. 질문을 주셨는데도 누락된 부분은 말씀드리기 어려운 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른 마음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