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Gaiden 1
323. 외전#1. 수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
비정상적인 세상이다.
아니, 비상식적이라고 해야 할까?
박정팔 경위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세계에 홀로 떨어진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두 눈으로 보니 또 다르군.’
그는 막 외국에 도착했다.
이스라엘 령(領)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국제공항.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외국인 전용 입국심사대의 긴 줄에 서 있다. 절친한 이민국 요원이 비즈니스 티켓을 끊어 줬지만 이 공항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은 외국인에게 개방되지 않았다. 덕분에 오랫동안 순서를 기다리며 사람 구경을 하던 그는 한국과 상이한 부분을 금방 알아차린 것이다.
오크는 여행객들 면모에 집중한다. 검은 머리의 인간, 붉은 머리의 긁적이는 인간, 금발의 인간. 밝은 피부의 인간, 검은 피부를 지닌 인간, 커피 색 피부의 인간. 푸른 눈, 녹색 눈, 갈색 눈의 인간 등등. 각양각색의 외모를 지닌 전 세계에서 모인 인간들.
그렇다. 대부분이 인간들이다.
대기열에 자신 말고 인외종족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정팔은 영 어색했다. 한국만 해도 걷다 보면 열의 두셋은 오크나 트롤, 엘프 등을 마주치기 마련인데. 이 공항은 어딜 봐도 인간만 가득하다.
‘그건 그렇고 참 오래 걸리는군.’
그가 탄 KE962편 탑승객은 많지 않았다. 애초에 평화롭게 관광이나 다닐 동네가 아니다 보니 대부분 석유화학 업종에 종사하는 회사원들로 보였다.
그런데도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 일단 열려 있는 카운터 자체가 몇 개 없었다. 외국인 라인을 담당하는 단 두 명의 심사관들은 여행자들을 빨리 통과시키는 것보다는 자기들끼리 알지 못할 언어로 잡담을 하며 낄낄거리는 쪽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다. 백인 인간인 그들은 실내인데도 챙이 넓은 검은 모자와 헐렁한 검은 의복을 걸쳤으며, 태어나서 한 번도 수염 손질 같은 것은 해 본 적이 없는 자들로 보였다.
‘저게 그 말로만 듣던 유대교 근본주의자들인가?’
민준에 따르면 마지막 중동전쟁 전까지만 해도, 그러니까 마정석이 지구에 풀리기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 공항 풍경은 매우 달랐다고 한다.
당시에는 저 자리에 흰 천으로 머리와 몸을 감싼 아랍인 남자들이 앉아있었다고 하니까.
지금은 반대로 전신을 흑색으로 덮은 유대인 남자들이 앉아 있다.
“하암!”
하품을 하며, 정팔은 핸드폰에 무료한 시선을 던졌다. 얼마 전 ‘창천’이라는 이름의 고룡이 사망한 사건을 아직도 국내 언론에서는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넥스트!”
긴 기다림 끝에 드디어 정팔 차례가 왔다.
손가락을 까딱거리던 입국심사관 표정이 굳는다. 정팔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나타난 변화였다.
‘쉽지 않겠군.’
이곳에 인외 여행객이 극도로 적은 이유를 정팔은 곧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입국심사관은 그의 순서가 되자 갑작스레 성실 직원으로 다시 태어난 듯했다. 직전까지만 해도 서류를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동료를 향해 낄낄거리던 시간이 더 길던 그는 오크의 여권을 대하 소설처럼 정독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저렇게 열심히 볼 건덕지도 없을 텐데 말이지.’
그의 여권에 스탬프가 찍힌 페이지는 단 한 장이다. 몇 년 전 팔남매가 노모를 모시고 광동연방(广东联邦, Cantonese Federation)의 장가계로 효도 여행을 갔을 때 찍힌 도장.
그럼에도 심사관은 여권의 빈 종이 한 장 한 장까지 면밀하게 살피더니 억양이 강한 영어로 질문했다. 한국에서 비행기를 열두 시간 타고 와 놓고는 당일치기로 돌아가는 기이한 일정의 이유를.
‘이게 다 너희가 안식일에는 공항을 닫아버려서 그렇잖아!’
토요일에도 정상적으로 출입국 수속을 진행했다면 정팔이 하루라도 자고 갈 수 있었을 테다. 하지만 이 나라 관리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켰고, 모국의 경찰서장은 연차를 이틀 이상 못 쓰게 하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속으로 투덜거리며 정팔은 준비한 대로 답했다. 그는 여기까지 핸드 캐리(Hand-carry)를 하러 온 것이며, 친구에게 물건 하나를 전달한 다음 바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그리고 경찰공무원 신분을 증명할 영문 서류까지 건넸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심사관은 더욱 수상쩍다는 눈빛이 되었다.
그러더니 결국은.
“컴 히어.”
젠장!
정팔은 욕을 삼키며 공항 경비에게 인계되었다.
오크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심사대 너머를 한 번 째려본 다음, 기어코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한 채 구석진 사무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잠시 기다리자 역시나 전의 심사관과 비슷한 차림새를 한 유대인 한 명과 한국인 통역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후 전과 비슷한 심문이 이어졌다. 출입국관리소의 유대인 말을 옮기던 통역사가 눈치를 보다가 정팔에게 은근슬쩍 말했다.
“놀라셨지요? 불쾌하시겠지만 저 치들에게 최대한 협조하는 편이 낫습니다. 이 나라가 워낙에···.”
“인외종족에게는 빡빡하지요. 듣기는 했습니다.”
“외국에도 악명이 퍼져서 요즘은 자중하는 편이긴 한데, 가끔 운이 나쁘면 이런 일이 생기곤 합니다.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그냥 넘기십시오.”
그 교묘한 타이밍에 팔짱을 낀 유대인이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Chazir.”
목소리에 묻어나는 경멸. 의자에 등을 깊이 묻고 입꼬리를 뒤튼다. 시선은 정팔에게 고정시킨 채.
순간 통역사의 눈가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정팔은 놓치지 않았다. 통역사가 못 들은 척하자 유대인은 좀 더 긴 문장을 웅얼거렸다. 혼잣말을 하듯.
“···@#%$@#$%chazir!#%*&#&.”
Chazir.
이번에도 한 단어가 정확하게 정팔 귀에 꽂혔다.
그는 물론 히브리어를 배운 적도 배울 계획도 없다. 그럼에도 저 단어는 안다. 인터넷에서 다른 오크들 경험담을 숙지했기에.
저 말뜻은 바로···.
‘돼지.’
분노를 가라앉히려 노력하면서.
정팔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저 말은 옮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저··· 그게···.”
인간 통역사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팔은 목구멍 아래까지 차오르는 화를 억누르려 애썼다.
여기에서 폭발하면 끝장이다. 그걸 알기에 저 자는 일부러 도발하는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면 바로 격리되어 유치소에 갇힐 터.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일단 여기서 벗어난 다음 해야 한다.
그 사이 유대인이 또 뭔가를 말했고 통역사가 해석해 주었다.
“친구에게 전달할 물건을 확인해보자고 합니다. 따로 부친 수화물도 없으시더군요. 애초에 숙박 계획이 없으니 이해가 됩니다만··· 들고 오신 짐가방을 확인하겠답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긴장하지 않았던 정팔의 눈매가 살짝 굳었다. 다행히 오크의 표정을 읽는 데 서툰 두 인간은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다.
정팔은 천천히, 최대한 여유롭게 보이려고 애쓰며 보스턴백을 책상 위에 올렸다.
“#@%)*&^$$^%#^$ @!”
“박정팔 님께서 직접 열어보라 말하고 있습니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린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손을 움직이는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느리지 않은지 의식하며 정팔은 손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속의 물건이 제대로 있는 걸 확인한 뒤, 백 양면을 넓게 젖혀 그 내부를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그 순간.
“이잉?”
통역사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Makhavat?”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유대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가방 안으로 손을 뻗는다. 통역사가 가만히 두라는 듯 정팔에게 눈짓했다. 오크는 마른 침을 다시 한번 삼키며 끄덕였다.
유대인의 손이 정팔의 가방 안의 물건을 움켜쥔 순간.
극도의 긴장 속에서, 정팔은 자신이 여기까지 온 계기가 된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
“민준씨! 저 왔어요. ···어라?”
이민국 요원 사무실 문이 열린 순간, 주인 대신에 두 손님의 시선이 교차했다. 인간 여자와 오크 남자였다.
“왜 아저씨만 있어요? 민준씨는?”
소파에 앉은 정팔은 신문을 접었다. 연분홍색 민머리를 긁적이며 대꾸한다.
“형님이 일곱 시까지 보자고 했잖아. 지금은 여섯 시 반이야.”
“아, 그래서 혼자 문 따고 들어와 기다린 거예요? 부지런도 하셔라.”
캐시는 신이 난 듯 흥얼거리며 들어섰다. 테이블 위에 짐을 올려놓는 그녀에게 정팔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남말 할 처지야? 넌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어라?”
그제서야 정팔은 뭔가를 발견한다.
“서린이 너, 머리가···.”
헤어스타일이 바뀌어 있었다. 팔꿈치까지 내려오는 장발에 평소보다 굵고 크게 컬(Curl)을 냈다. 캐시가 과장스럽게 머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어때요?”
커트와 뿌리 매직, 중하단에는 차례로 S컬/C컬 열펌, 그런 다음 전체적으로 염색까지 한 뒤 마무리 영양까지··· 담당 디자이너가 다섯 시간을 공들인 작품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던 정팔이 문장을 끝맺었다.
“···머리가 왜 그래? 집에 불이라도 났냐?”
캐시는 진저리를 쳤다.
“아저씨는 말투도 개그 코드도 우리 아빠랑 똑같아. 그러고도 아저씨라고 부르지 말라는 말이 나와요?!”
“말은 바로 해야지. 민준 형님은 나보다 연상인데 왜 나만 아저씨야?”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아저씨는 전체적으로 너무 올드하잖아요! 민준씨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닌데.”
그녀는 투덜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시콜콜한 잡담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삼십 분여 집주인을 기다린 뒤.
“음? 형님 오시나 보다.”
창밖에 택시가 멈춰서더니 익숙한 인형이 내려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캐시는 핸드폰 사진기를 켜서 머리를 재점검했다. 정팔은 피식 웃으며 못 본 척했다.
잠시 후.
“일찍들 왔네?”
캐시의 눈동자에 기대감이 반짝인다. 얼굴이 마주치고, 요원은 비서의 머리를 가만히 응시했다.
2초 남짓한 정적이 흐르고.
“캐시 너, 머리는 왜 그래. 집에 불났냐?”
그녀는 다시 한번 진저리를 쳤다.
“아, 쫌!”
기대를 한 내가 미쳤지.
캐시는 유달리 거칠어진 손길로 스카치 한 병과 락앤락 통을 꺼내 늘어놓았다. 술병 라벨을 읽은 민준이 감탄사를 뱉었다.
“오! 휴고앤버클리 37년?!”
공휴일인 오늘 모이자고 제안한 쪽은 캐시였다. 술은 자기가 준비하겠다며.
“심지어 드워프 마이스터 에디션이네? 돈 좀 썼겠는걸. 기다려, 내가 술상 봐 올게.”
퉁명한 목소리가 돌아온다.
“됐어요. 내가 세팅해 올게요. 어차피 이 집 주방 살림은 훤히 아니까.”
“아니, 굳이 그렇게 안 해도···.”
“요리의 완성은 플레이팅인 거 몰라요? 쉐프의 의도를 존중하라구요.”
민준과 정팔은 시선을 교차했다. 특별히 텔레파시 같은 것은 오가지 않았으나 두 사람은 본능적으로 합의했다. ‘형님, 괜찮겠죠?’ ‘그래, 그 정도야 뭐.’
어차피 오롯이 캐시 실력으로 만든 음식도 아니고 설마 접시에 담는 과정에서 변질될 일은 없으리라.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비서의 이능력 목록에 한 가지를 추가해야 한다.
그녀가 자리를 비운 사이 정팔은 술병을 유심히 관찰했다.
“저는 처음 보는 위스키인데요. 비쌉니까?”
“면세로 사도 팔천 불 정도 할걸?”
“커헉! 아니 형님, 대체 서린이한테 월급을 얼마나 주시는 거예요?”
“내가 월급 안 줘도 저 정도 쓸 능력은 되는 애야.”
정팔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중얼거렸다.
“아무튼 쟤··· 수상할 정도로 돈이 많다니까.”
그리고 그녀가 충분히 멀어진 걸 확인한 뒤. 정팔은 민준을 떠 보듯이 말한다.
“저는 그렇다고 치고, 형님이라도 좀 예쁘다고 해 주지 그랬습니까.”
“······.”
민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정팔은 생각한다. 외모 때문에 가끔 까먹긴 하지만 민준은 45년생 광복둥이다. 감각이 자신보다 더 올드하면 올드했지 반대로 가지는 않으리라.
그래서 지나가는 말처럼 묻는다. 추후 캐시에게 귀띔해주려는 목적으로.
“저런 헤어가 형님 취향은 아니신가 봅니다.”
“취향? 굳이 말하자면 난 목덜미에 아슬아슬하게 닿는 단발 쪽이 더···.”
본인이 한 말에 자기가 소스라치게 놀란 민준은 급히 입을 닫았다.
“······?”
그 이유를 모르는 정팔이 저 말을 그대로 캐시에게 옮겨야 할지 고민하던 중.
우웅! 우우웅!
실내에 울려 퍼지는 공명음.
민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화제가 바로 바뀐다.
“저 망할 것이 또 시작이네.”
“오, 서린이가 가지고 왔군요!”
캐시가 가방에서 깜박하고 꺼내지 않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정팔이 머뭇거리며 제안한다.
“형님이 챙기시겠습니까?”
“됐어, 난 저거 만지기도 싫어. 어차피 다음은 네 차례라며?”
정팔은 싱글벙글 웃으며 가방에서 진동하는 물건을 꺼낸다. 그러면서 민준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휴일인데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캐시나 쉬는 날이지 난 연중무휴인 거 알잖아. 의뢰받으러 다녀왔어.”
“의뢰주가 누군데요?”
“’마조’.”
그때 오크의 머릿속에 어떤 울림이 전해졌다. 경악의 감정을 담은 채.
=네?! 아니, 지금 요원님이 뭐라고 하셨죠? 의뢰주가 누구라구요? 제가 바로 들은 게 맞습니까?!=
아무튼 이런 단어에만 민감하게 반응한다니까. 오크는 손에 움켜쥔 조리도구에게 말했다.
“생각하는 거 하고는, 쯧.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 아니다.”
=아니, 그럼 ‘마조’가 무슨 뜻일깝쇼?=
“마녀 조합.”
=······이건 절 욕하시면 안 됩니다. 그 단어를 왜 그런 식으로 줄여야 하지요? 듣는 사람 오해하게 말입니다.=
“애초에 정상인은 그런 오해를 안 해. 아, 뭐. 넌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아무튼.”
=헤헤, 맞는 말씀입죠. 저는 그저 도구일 뿐입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정팔 형님을 위해 봉사할 차례 같군요. 아무쪼록 거칠게 다뤄주십시오! 언제나처럼 조언을 하나 드리자면 어지간한 식재료라도 튀기면 다 맛있답니다!=
민준은 후라이팬의 텔레파시는 듣지 못했지만 내용이 훤히 예상이 되는지 눈쌀을 찌푸렸다.
“이래서 내가 저거에 손 안 대려는 거야.”
민준은 이 마도구에 접촉하는 걸 유난히 싫어한다. 정신파 자체가 왠지 기분 나쁘고 더럽다나?
요원은 투덜거렸다.
“저 후라이팬을 만든 놈도 분명 엄청난 변태일 거야. 저 인격을 안 고치고 그대로 사람들에게 팔아먹을 생각을 하다니.”
팬을 챙기려던 오크는 순간 생각난 듯 말했다.
“잠깐만요. 마녀협동조합에서 공휴일에 불렀다고요? 형님은 거기 VVIP 시잖아요. 한 번에 그 마녀들로부터 마법 시료를 수십 억원치 사는 분이신데. 아무리 갑을 관계가 잠시 바뀌었다고 해도 지켜야 할 선이 있지 않습니까?”
“그쪽이 좀 급하다고 해서. 그리고 실질적 의뢰주는 영국에 있는 마녀협동조합 본부야. 여기 한국 지부가 아니라.”
의뢰가 들어온 경로는 좀 복잡했다.
영국 마녀들이 자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영국 정부는 다시 한국 이민국에 SOS 요청을 보냈으며, 연락을 받은 민준은 한국에 있는 마녀들 지부를 방문하여 원격 영상 회의에 참석한 것이다.
“아무튼, 덕분에 다음 주에는 갑자기 해외 출장을 가게 됐다.”
“영국입니까?”
“아니, 사우디.”
“이잉?”
계속 예상을 벗어나는 말들이 나온다.
“영국 마녀들이 의뢰주인데 작전 지역은 또 사우디에요? 거기에도 이민국 비슷한 기관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형님이 가셔야 해요?”
“이스라엘 모사드 애들이랑 영국 이미그레이션 서비스가 원래 서로 사이가 나쁘거든.”
그렇다고 마녀들이 자력으로 처리하기도 힘든 모양이었다.
“짐작하겠지만 사우디 현지 특성상 마녀들이 대놓고 활동을 못 해. 가뜩이나 그 동네 조합 지부는 비밀조직처럼 운영되는 판에, 추가로 외국인 조합원을 파견하는 것도 힘들다더군. 그리고···.”
어차피 이 사건에 정팔이 얽힐 가능성은 전무하기에, 민준은 또 하나의 이유는 대충 얼버무리기로 한다.
“···내가 원래 짬이 좀 되잖아.”
“그렇긴 하죠. 그럼, 형님이 가셔서 하실 일은 뭡니까? 아, 민감한 내용이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이민국 요원을 왜 부르겠어? 당연히 거기에 때려잡을 외계인이 있으니 그렇지.”
마땅히 화제를 돌릴 만한 이야깃거리도 없는 지라, 민준은 대략적인 이야기만 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정팔이 이런 내용을 어디 가서 흘릴 위인도 아니고.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도플갱어’ 비슷한 외계인이 그 동네에 등장한 모양이야. 물론 밀입국자로 추정되고. 그런데 사우디를 통치하는 이스라엘 정부는 거기 주민들 삶에 별 관심이 없고 리소스를 소모하는 것도 꺼리지. 그들 관심사는 오로지 자치령과 이스라엘 본토 사이 경계선에 쏠려 있으니까. 물론 영국에서 개입하면 더 싫어할 거고. 그러니 제3자인 한국의··· 경력 많은 요원이 대신 들어가서 체포해 달라는 게 마녀들 요청이야.”
그렇다면 마녀들은 왜 사우디 현지 사정에 관심을 갖는가?
정팔은 쉽게 답을 추측해냈다.
“그 외계인이··· 사우디 마녀들에게 무슨 짓인가를 한 모양이군요.”
스스로 말해 놓고도 너무 깊이 들어간다 싶어서 정팔은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그때.
우웅! 우웅!
얌전하던 후라이팬이 갑자기 급격하게 진동하며 공명음을 냈다. 놀란 정팔이 다시 손잡이를 잡았다.
“···뭐라고? 그러지 말고 그냥 나한테 이야기해봐. ···음?!”
오크는 주저하다가 요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형님.”
“응?”
“질색하시는 건 알지만 이 녀석이 형님한테 손잡이를 한 번 잡아달라는데요?”
“웃기지 말라고 그래.”
민준은 단호했지만 후라이팬은 간곡히 정팔에게 호소하는 것 같았다.
“저를 통하지 않고 형님에게 직접 말씀드릴 내용이 있답니다. 이렇게 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후라이팬이 이렇게까지 질척거리는 것은 처음··· 은 아니지만 드문 일이기에 민준은 의구심을 품었다.
‘무슨 속셈이지? 아무튼 수상한 놈이야. 조리도구치고 지나치게 성능이 좋은 이유도 아직 밝혀내지 못했고.’
마도구를 째려보며 조건을 단다.
“또 이상한 신음소리 내면 바로 녹여서 삽으로 만든 다음 그리폰 농장에 기부해 버릴 줄 알아!”
후라이팬과 정팔이 동시에 반응했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그건 안 됩니다, 형님!”
그리폰은 육식을 하는 주제에 코끼리에 비견되는 대량의 배설물을 매일 생산하는 걸로 악명이 높다. 육식 동물의 변이 초식 동물의 그것보다 악취가 심한 경향을 감안하면 농장 직원들에겐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그들이 날아다니며 넓은 목장 곳곳에 조류의 그것처럼 변을 흩뿌려서 직원들을 미치게 만든다는 점이다.
그런 곳에서 삽이 무슨 용도로 주로 쓰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엄포를 놓은 다음에야 민준은 팬을 건네받았고.
“······.”
그 다음 조리도구가 요원에게 한 말을 정팔은 듣지 못했다.
다만, 민준이 한 말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 새끼가? 웃기지 마. 내가 사우디에 후라이팬을 왜 갖고 가?!”
***
“’후라이팬? 사우디아라비아까지 갖고 온 게 고작 후라이팬?’”
통역사가 유대인의 말을 옮겼다.
“’한국에서 열두 시간 비행기를 타고 와서 전할 물건이 후라이팬이라고?’”
출입국관리소 관리는 가방에서 꺼낸 편수 팬을 보며 눈쌀을 찌푸렸다.
정팔은 고개를 끄덕인다.
“네, 후라이팬입니다. 요리계의 명품으로 취급되는 걸작이지요. 제 친구는 오늘 이걸 꼭 필요로 합니다.”
상대는 영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이었고 정팔은 더 이상의 설명을 포기했다. 대신 통역사를 향해 말한다.
“전화 한 통만 하게 해 주십시오.”
“아마 큰 도움이 안 될 겁니다.”
“그래도 일단 하게 해 주십시오.”
다행히 관리는 그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정팔은 그들이 보는 앞에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 아, 정팔이냐? 고생했다. 잘 도착했어?
민준이었다.
“네, 형님.”
정팔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 얌마, 왜 이제 전화했어? 진작 연락 주지. 아무튼 그 선별적으로 지랄 맞은 새끼들··· 나 때문에 네가 고생이 많다. 한국 돌아가면 거하게 사례할게. 잠깐만 기다려. 내가 해결해 줄 테니.
정팔이 전화를 끊자 유대인은 뭐 또 할 말이 있냐는 듯 눈길을 던졌다. 여전히 입가에는 비웃음 비슷한 미소를 건 채. 하지만 정팔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저···. 박정팔씨?”
이렇게 되자 불안해진 쪽은 한국인 통역사였다. 하지만 정팔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여유롭게 팔짱을 낀 채 공무원을 쏘아보기만 했다.
잠시 후.
벌컥!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리고 유대계 노인 한 명이 사무실로 새로 들어왔다. 역시나 못 보던 얼굴이었다.
“······!”
그리고 노인은 여태 정팔을 취조하던 공무원에게 뭐라뭐라 고함을 내지르며 손가락질을 시작했다.
그 울림통이 어찌나 튼튼한지 방 안에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당황하던 공무원은 처음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더니, 곧 새하얗게 질리고, 마침내는 새파랗게 멍드는 진기명기를 보였다.
“······#$@^%$#^@#@$.”
치욕감을 숨기지 못하는 공무원은 통역사에게 뭔가를 말했다.
통역사는 믿기지 않는 듯 재확인한 뒤,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정팔에게 말했다.
“···실례가 매우 많았답니다. 확인은 이걸로 끝났고 바로 입국 도장을 찍어드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시는 목적지까지 교통편도 제공해 드리겠다고···.”
“아, 교통편은 됐습니다.”
그렇게 거절하며, 정팔은 마지막으로 찌릿! 하는 눈빛을 공무원에게 보냈다. 이제 그는 정팔과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떨리는 동공은 매우 불안해 보였다.
나갈 채비를 하는 오크에게 통역사는 다시 물었다.
“저, 저기···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런 말씀드리는 것도 좀 그렇습니다만 저 유대교 꼴··· 아니, 저 고지식한 인간들이 한 번 문 타깃을 이쯤에서 포기하는 건 정말 드문 케이스···.”
“아무리 지독한 꼴통이라도 직장인은 직장인이니까요.”
정팔은 팬을 가방 안으로 챙기려 했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아주 잠깐, 미묘한 타이밍으로 멈췄다가.
“······.”
다시 움직인다.
안도의 한숨을 참으며 오크는 최대한 여유롭게 말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상사가 까라면 까야지요.”
“···아아?”
통역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이다.
이 친구는 영원히 모를 터다. 방금 민준의 요청을 받고 공항에 연락을 넣은 장본인이 얼마나 높은 레벨의 상사인지를. 그리고 윗선이 저 공무원의 행동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오크는 예언자가 아니지만 그의 미래를 알 것 같았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칼날일수록 맞았을 때 치명적이다. 이런 부분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갈 채비를 하며 정팔은 덤덤하게 말했다.
“사람 사는 데가 다 거기서 거기인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