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Gaiden 4
외전#1. 수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4)
대한민국 서울. 종로의 젠킨슨 타워.
비서실장 블레어 캠벨은 손 안의 서류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었다.
슥! 슥! 속독에 가깝게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의 눈길이 한곳에 멎는다. 엘프는 같은 문장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그것은 어떤 드라마의 기획안이었다.
블레어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다.
‘어떤 멍청한 작자가 이런 걸 끼워 넣었어?’
본래 이건 비서실장의 업무 영역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어가 이런 자잘한 기획안까지 들여다보는 이유는 이제 곧 젠킨슨 그룹에서 런칭할 어떤 서비스 때문이었다.
한국의 산업 분야를 총망라하는 젠킨슨의 기업 중엔 당연히 언론사도 존재한다. ‘젠킨슨 네트워크’라고 불리는 그 방송국들은 최근 시대의 흐름에 맞춰 구독제 스트리밍 서비스를 런칭하기로 결정했다. 이름하여 ‘Jenkinson+ (젠킨슨 플러스).’
대중의 반응도 확인할 겸 고의로 언론에 런칭 정보를 슬쩍 흘려 본 결과, 대다수의 반응은 ‘또?!’ 였다.
이미 세상에는 너무도 많은 OTT 서비스가 존재했고, 농담 반 진담 반 조로 정부가 나서서 강제 합병이라도 시키라는 목소리까지 나오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룡의 직원들은 젠킨슨 플러스에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름 아래 묶인 수많은 방송국들이 제작하는 양질의 컨텐츠를 공급하면 시청자들이 모일 거라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오직 젠킨슨 플러스에서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 컨텐츠도 필요하단 말이지.’
그런 판단 하에 담당자들은 런칭과 동시에 공개될 독점 영화 및 드라마의 시나리오를 모으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블레어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든 것이다.
엘프는 그 내용을 다시 읽으며 중얼거렸다.
‘지구인들이 위원회와 접촉하지 않고, 1945년 이후에도 지구에 오직 인간만이 살아간다는 가정 하에 쓴 대체 역사물이라고···?’
집단 이민이 애초에 없었다면?
이 별에 엘프나 오크, 드워프 같은 이종족들이 이주해 오지 않았다면 지금의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는 이 질문에 답하듯 상상력을 펼쳐냈다.
작중 세상에는 원인을 제공할 드래곤이 없기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지금처럼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국가로 존속하여 미국과 2강 체제를 이룬다거나, 마정석이 도입되지 않아 인류가 화석연료에 의존한 끝에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되어 기후 재앙이 현실화된다는 부분은 제법 그럴싸하고도 흥미로운 예측이라고 엘프도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건 방송하면 안 되지.”
블레어는 담당자에게 짧은 이메일로 지시했다. 런칭작 목록에서 이 드라마는 빼 버리라는 내용을 담아서.
작품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기발한 상상력이 곳곳에서 번뜩이고 유머도 적절하게 섞었다. 제작비도 적절한 수준으로 예상되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구에 인간만 남았다는 설정 자체가 위험해.’
작가는 작중에서 명확한 결론을 내지 않았다. 여러 종족이 함께 사는 지금의 지구와, 인간만이 살아가는 가상의 지구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세상이라고 단언하는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레어는 이 드라마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인간중심당에서 화제거리로 삼을 거야. 그리고 논란에 불을 지피겠지.’
지구는 본래 인간의 것이었으며, 지금이라도 인외 종족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항상 존재한다. 이 드라마는 그런 인간우월주의자들이 몰려들어 광란의 파티를 벌일 좋은 먹이감이 될 터.
그리고 블레어의 고용주는 이 이상 종족 갈등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드래곤들과 확연하게 구별되는 부분이다.
‘흐음, 그건 그렇고··· 아직 적당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못 찾았나?’
방금 전 그 드라마와는 반대로 블레어가 이번 런칭작 중 꼭 포함시키고 싶어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아직 기획안 단계인 그것은 엘더 드래곤 젠킨슨의 지금까지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였다.
그 생각을 하자 방금 전까지 일에 쩔어 있던 엘프의 눈동자에 다시 생기가 돈다.
‘젠킨슨 플러스의 런칭작으로 젠킨슨 회장님의 다큐멘터리라니.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있을까?’
당연히 시청자들은 좋아할 것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블레어는 확신했다. 첫째, 서민들은 대부호를 동경하기 마련이며 그들의 삶에 대해 알고 싶어 하니까. 둘째, 하물며 대상이 드래곤이라는데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 두 번째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을 가장 좋아할 시청자는 바로 블레어 본인이었다.
‘하루 빨리 완성된 작품을 보고 싶다!’
이 엘프가 생각하기에 드래곤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이다.
그리고 젠킨슨은 그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경외스럽고도 존경받아 마땅한 인격자였다.
가까이 모시기 때문에 블레어는 잘 알았다. 젠킨슨에게는 여타 드래곤과는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 차이는 젠킨슨을 평범한 용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고 동족 사이에서 ‘괴짜’나 ‘머리가 이상한 용’으로 불리는 결과를 낳았지만 블레어는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젠킨슨을 더 좋아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 우리 회장님이 얼마나 훌륭한 분인지.’
물론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들 것이다. 본래 지구 출신이 아닌 젠킨슨의 주변 인물들까지 인터뷰를 하다 보면 이계로 촬영진을 파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레어는 그 정도는 감수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지구 쪽 인터뷰가 더 문제였다.
‘인터뷰 대상자는 당연히 용외종족 중에서 골라야겠지. 다른 드래곤들은 어지간하면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터고, 설사 출연하더라도 좋은 말은 안 나올 테니까.’
그렇다면 지구의 용외종족 중 젠킨슨과 가장 가까운 이는 누구인가?
블레어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른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일 젠킨슨을 따라다니다시피 하는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
‘예민준 요원.’
비서실장인 블레어도 아직 모른다. 두 사람의 인연이 애초에 어떻게 엮인 것인지.
다만 젠킨슨이 ‘오랜 벗’이라고 부르는 대상이 그 요원밖에 없다는 건 확실하다. 젠킨슨은 다른 드래곤에게도 그런 표현은 쓰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해.’
엘프의 생각이 이어진다.
‘젠킨슨 컴퍼니가 그 요원과 계약을 맺은 게 70년대였지.’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민국이라는 기관의 행정서비스를 민영화하여 젠킨슨 컴퍼니에 이관했다. 블레어가 예민준이라는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것도 그때였다.
헌데, 젠킨슨과 민준은 그 시점에서 이미 서로를 알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회장님이 50년대에 지구에 오신 뒤로는 내가 쭉 모셔 왔지. 그런데도 모르겠어. 둘의 연결고리를.’
그 요원은 1945년생이다. 계약을 맺기 전에는 20대 청년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어린 사람이 대체 어떻게 고룡과 연을 맺었을까? 요원이라는 신분도 갖기 전에.
‘아무튼 희한한 부분이 많아.’
물론 이 다큐멘터리의 중심은 젠킨슨의 삶이지 예민준의 삶이 아니다. 또한 예민준과 인터뷰를 하더라도 얼굴이나 이름이 나갈 일은 없고 익명의 제보자로 처리될 예정이었다. 그는 요원이니까.
어디까지나 젠킨슨의 ‘미담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인터뷰가 될 터.
‘성격상 호락호락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는 않지만······.’
이건 아랫사람들을 시켜서 될 일이 아니었다. 블레어 자신이 직접 청해 봐야 한다.
그는 수화기를 들고 부하직원에게 물었다.
“예민준 요원님, 지금 어디에 계시지?”
***
리야드 도심의 카페.
민준은 미심쩍은 듯 트리스탄의 말을 되풀이했다.
“죽었던 소녀가 돌아왔다고?”
“그래! 지금 자치구 사람들은 전부 공포에 질려 있어. 감히 알라의 말씀을 어기고 마법을 사용했다가 사형당한 사악한 마녀가, 지옥의 유황불에서 돌아와 마을 사람들을 전부 불태워 죽이려고 한다면서!”
사악한 마녀라니.
그것이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능력을 펼친 소녀에게 할 말인가?
민준은 표정이 더욱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마녀가 성실하게 신을 섬기며 살아가는 선량한 사람들마저 불지옥으로 끌고 가려 돌아왔다고 난리가 났다는군.”
다른 많은 종교처럼 이슬람교의 지옥 역시 불구덩이로 자주 묘사된다.
그 지옥에서 죄인들은 불타는 송진으로 만든 옷을 입은 채 화염 속에서 고통받으며, 설사 살점이 녹고 뼈가 다 으스러지더라도 다시 살이 돋고 뼈가 자라나 영겁의 시간동안 활활 타오르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 뒤로 추가적인 목격담은?”
“현재로서는 없어.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지.”
“흐음. 좀 애매하군.”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그래서, 네가 언데드가 나타났다고 한 이유는···.”
“그게 정말 마리얌이 맞다면 설마 죽은 이가 살아났을 리는 없지. 그 불쌍한 소녀는 안식을 찾지 못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거야. 망자가 썩어서 흙이 되는 대신 두 발로 세상을 걸어 다니면 그걸 언데드라고 하지 뭐라고 하겠어?”
민준은 이제 둘의 말이 엇갈린 이유를 이해했다.
“알겠다.”
그는 현금이 가득 담긴 두툼한 종이 봉투를 넘긴다. 드워프는 환한 얼굴이 되더니 품에 챙겼다.
“고맙군. Elohim yevareh otah(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이쪽 동네에서 오래 굴러먹더니 습관적으로 히브리어가 튀어나오는 것 같다. 드워프는 그리 인사한 뒤 잔에 남은 맥주를 시원하게 원샷하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민준은 방금 전 정보상에게서 들은 내용을 정리했다.
의뢰주인 마녀들이 말한 의뢰 대상은 아무래도 화재 현장에서 발견된 마리얌인 듯하다.
‘자치구의 무슬림들은 그녀를 언데드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의뢰주인 마녀들은 그것을 ‘타인의 생김새를 모사한 존재’··· 그러니까 도플갱어 비슷한 무언가라고 판단했어. 아마도 외계인일 확률이 높기에 이쪽까지 의뢰가 넘어온 것이고.’
같은 대상을 두고 양측의 정의가 달라지는 이유는 간단하다.
무슬림들은 화재현장에서 발견된 존재를 이미 죽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녀들은 살아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불과 언데드의 상성이 나쁘긴 하지만, 불을 쓰는 언데드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애매하군.’
도플갱어인가, 아니면 언데드인가?
결정을 내린다.
‘내가 직접 찾아서 확인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다.
“저, 손님. 다 드셨으면 치워드릴까요?”
억양이 강한 영어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부터 이 테이블을 전담하여 서빙하던 직원이 서 있었다. 금색 수염이 덥수룩하고 머리에는 키파를 쓴 청년.
“아니, 치울 필요는 없고. 잠깐 여기 앉아 봐.”
민준이 빈 의자를 가리키며 지시한다. 그러자 청년은 당황했다.
“······네?”
“잠깐 앉아보라고.”
“하지만, 손님. 지금은 제가 근무시간이라···.”
어설프고 딱딱한 영어로 사양한다.
그때, 민준이 눈을 치켜 올렸다.
강렬한 시선이 눈 앞의 유대인 청년을 관통할 듯이 쏟아졌다. 스으으! 민준을 중심으로 다시 무거운 기운이 퍼지며 압도하듯 짓누른다.
그러자 청년은 가빠진 호흡을 뱉으며 온 몸을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극도로 긴장한 모습.
하지만 민준의 귀는 포착했다. 저 청년의 심장 박동이 아주 조금 거칠어졌다가, 놀랍도록 빠르게 안정을 되찾는 소리를.
“어설픈 연기 집어 치우고 빨리 엉덩이 저기 갖다 붙이라고. 언제까지 내가 올려다보게 만들 거야?”
“······.”
“너희 보스랑은 사전에 이야기 끝났는데. 못 들었나? 왜 여기서 이러고들 있지?”
웨이터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뀐 것은 그때였다.
겁먹고 동요한 눈동자는 온데간데 없고 입가에는 약간의 미소를 띄운다.
팽팽하게 긴장시켰던 근육을 순식간에 이완시키며, 청년은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의자를 잡아 당겨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민준을 마주보며 말한다.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유창한 영어발음으로.
“휴, 역시 요원님 눈은 못 속이겠군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쓸데 없는 소리 말고 내 말에나 답해. 난 분명 사전 조율을 끝냈거든? 그런데 왜 하필 내가 들른 카페에 앉아 있는 손님 절반 이상이 모사드 애들인지, 그 이유를 좀 들을 수 있을까?”
그 말을 하며 민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페에 앉아 있는 다른 손님들 대부분은 챙이 큰 검은 모자를 쓴 극보수주의 유대인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반수 이상이 위장이며 실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소속인 걸 민준은 알고 있었다.
‘그 꼴통들은 모사드 같은 데서 일 안 하지. 규율을 어겨야 하니까.’
그때 남자가 말했다.
“언제 아셨습니까? 아까 트리스탄과 대화하던 중에 그 살기도 일부러 뿌리신 것이군요?”
“겸사겸사 뿌려 봤지. 네 반응을 보려고. 다른 애들은 여기 들어오자마자 내 눈에 확실히 보였는데 너는 끝까지 좀 애매했거든. 그래서 자극을 한 번 해 봤어.”
“요원님께 그런 말씀까지 듣다니 영광입니다.”
“그나저나, 대답은?”
민준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으며 눈앞의 남자··· 모사드에서도 가장 위험한 임무를 담당한다는 특수작전국의 요원을 추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