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12
112
“그리스는 여전히 경제 상황이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슬쩍 눈치를 보며 그가 조심스럽게 묻자 홍성완 지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말도 마. 겨우 성사된 EU중앙은행의 구제 금융 덕분에 당장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안 보여. 오히려 긴축정책에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져서 소비가 줄어들고 그리스 경제의 중심축인 해운업까지 불황에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성장률이 몇 분기째 마이너스야.”
“그러면 지사 영업에도 영향이 있겠습니다.”
“안 그래도 이번 분기 목표를 못 채워서 걱정이야. 이러다가 실적 미달로 지사장 자리도 보존하기 어려울 것 같아.”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지사장님 실력이라면 금방 실적을 메워 넣으실 겁니다.”
“훗, 나도 그랬으면 좋겠군.”
홍성완 지사장이 능청맞게 물었다.
“정 그러면 말만 그러지 말고 자네가 오더를 좀 물어다 주든가? 나도 잘나가는 후배 덕 좀 보자고.”
“하하. 알겠습니다. 나중에 기회를 봐서 연락드리지요.”
“약속한 거야?”
말은 이리 해도 홍성완 지사장은 진짜 혁권이 연락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에게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자 하는 것처럼 으레 오가는 인사치레거니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가벼운 대화를 나누면서 분위기를 푼 혁권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사장님.”
“왜?”
“이곳에서 몇 년째 근무를 하고 계신 거지요?”
“글쎄. 과장 때부터 치면 횟수로 거의 5년이 넘었지.”
“그러면 정부 쪽에 아는 인맥이 많으시겠군요.”
홍성완 지사장이 머리를 흔들면서 몸을 뒤로 기댔다.
“이럴 줄 알았지. 그래 원하는 것이 뭐야?”
“정부 고위 인사를 좀 소개해 주십시오.”
“얼마나 고위직이어야 돼?”
“높으면 높을수록 좋습니다.”
혁권의 말에 홍성완 지사장은 살짝 콧잔등을 찡그렸다.
“또 뭘 꾸미는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꼭 제가 나쁜 짓이라도 하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럼 아니야.”
상체를 든 홍성완 지사장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실은 제 일을 도와주는 직원과 가족 들을 그리스로 이민시키려고 그러는 겁니다.”
“뭐?”
금방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거리는 상대를 보며 그가 차분히 사정을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제가 주로 사업을 벌이는 곳이 리비아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쪽 정국이 갈수록 불안해져서 직원 가족들을 좀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겨 가고 싶은데 제대로 된 정부가 없다 보니 그게 어려운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최근에 유럽 각국에서도 반난민 분위기까지 생기는 바람에 더욱 이주가 쉽지 않더군요.”
“그렇게 상황이 안 좋다면 사업을 철수하면 되지 뭐라고 그런 수고를 감수하려는 거야?”
“그래도 제가 데리고 일을 시키는 사람들인데 실컷 부려먹고 조금 힘들어졌다고 헌신짝처럼 버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허어. 아주 성인군자가 나셨구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절대 비아냥거리는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을 하려는 것에 내심 놀라면서 혁권을 다시 봤다.
“데려올 사람이 얼마나 되는데?”
“대략 쉰 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많아?”
“원래 이쪽 지역이 대가족을 이루고 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젊은 시절 중동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홍성완 지사장은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돈이 꽤 많이 들어갈 텐데 괜찮겠어.”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하는 걸 보니 그동안 제법 돈을 모은 모양이지?”
혁권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일이라면 도와줘야지.”
“감사합니다.”
홍성완 지사장과 헤어지고 막 차에 탔을 때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부르르 떨렸다.
핸드폰을 꺼내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짧게 혀를 찼다.
“쯧.”
그가 비밀리에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서 오윤태 과장한테 준 대포폰 번호였다.
보나 마나 지난번 일 때문에 몸이 달아 연락한 것이 뻔했다.
“여보세요.”
-나, 날세.
잔뜩 떠는 오윤태 과장의 목소리에 지금 얼마나 불안해하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먼저 하셨군요.”
-스위스에서 있었던 일 그거 자네가 한 거 맞지?
“글쎄요.”
애매한 태도를 보이자 오윤태 과장이 바로 말을 받았다.
-지난번 마카오에서 자넬 따라다니던 사내를 그날 봤단 말이야.
“그렇습니까? 이것 참 세상이 좁군요.”
-이봐!
상대가 언성을 높이자 그는 목소리를 무겁게 내리깔면서 말했다.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것이 오 과장님한테도 좋을 겁니다. 괜히 시끄럽게 만들어서 득 될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주춤한 오윤태 과장은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불안감을 쏟아 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지금 그 일 때문에 난리가 났단 말이야. 범인을 잡는다고 사방을 다 들쑤시고 다니는데 이러다가 우리 관계가 들통 나면 어떻게 해?
“금방 꼬리가 잡힐 정도로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준 돈은 함부로 쓰지 않고 잘 보관하고 있겠지요?”
-자네가 조용해질 때까지 묻어 두라고 해서 몽땅 은행 대여 금고에 넣어 뒀어.
오윤태 과장의 대답에 그는 머리를 작게 끄덕였다.
“잘하셨습니다. 그럼 딱히 의심받을 만한 것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전화를 해서 꼬투리 잡힐 행동만 하지 않으면 별일 없을 겁니다.”
-그, 그럴까?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되묻는 오윤태 과장의 말에 불안함이 섞여 있었다.
“절 믿으십시오.”
한 점 흔들림이 없는 단호한 말투를 듣고서야 그는 조금 진정된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이 안정되자 이번엔 불쑥 다른 생각이 든 듯,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번 일엔 내가 물어다 준 정보가 꽤 도움이 되지 않았나? 큰돈을 벌었으니 내 몫도 좀 챙겨 주는 게 당연할 거 같은데…….
딴에는 은근하게 떠본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욕망에 혁권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입만 열면 돈타령을 해 대는 것이 참으로 솔직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당연히 생각하고 있지요.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위험하고, 일단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얌전히 몸을 웅크리고만 계십시오. 그 뒤는 제가 알아서 챙겨 드리겠습니다.”
-음, 정말이지?
“제가 언제 한입으로 두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알고…….
“이만 끊겠습니다.”
혁권은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도 않고 핸드폰을 끊었다.
애 보는 보모도 아니고, 오윤태 과장이 계속 붙잡고 매달리는 것을 달래려니 짜증이 치밀어 오른 것이다.
그날 오후 혁권은 자말과 하킴 두 사람을 대동하고 예전에 한번 용선傭船을 한 적 있는 쥬피터 해운을 찾아갔다.
회사 입구에서 용건을 밝히자 담당 임원이 바로 뛰어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안면이 있는 흑발의 중년인을 보며 그가 손을 내밀었다.
“또 보게 돼서 반갑군요.”
“그때는 덕분에 좋은 거래를 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저희도 바라는 바입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악수를 나눈 혁권은 중년인의 안내를 받아 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기다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측이 마주 앉은 가운데 여직원이 차를 갖다 놓고 나가자 중년인이 먼저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용선을 원하신다고요?”
상대와 달리 급할 것이 없었던 혁권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어떤 배를 얼마나 빌리실 생각인지…….”
“지난번과 같은 선급으로 기간은 1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연장할 수도 있고요.”
안 그래도 요즘 일거리가 없어 파리만 날리던 참이다.
제 발로 굴러들어 온 호박을 놓칠 새라 중년인은 몸이 잔뜩 달아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아, 물론 서로 조건이 맞아야 계약을 할 수 있겠지요.”
“저희와 거래를 해 보셔서 잘 아시겠지만 일을 맡기셔도 절대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영업을 하는 상대를 보면서 그는 담담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화물을 운송할 곳은 리비아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지역입니다.”
순간 중년인을 비롯한 해운사 측 인사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거긴 위험지역 아닙니까?”
방금 전까지의 태도완 달리 약간 떨떠름해진 기색에 혁권은 뭐가 문제냐는 듯 되물었다.
“예, 맞습니다.”
“그곳은 좀…….”
“돈을 벌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요. 그게 아니라면 다른 해운 업체들을 놔두고 제가 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귀사를 찾았겠습니까?”
“으음.”
혁권이 아픈 곳을 정확하게 건드리자 중년인은 자신도 모르게 낮은 침음을 흘렸다.
“운항을 할 수 없다면 이번 계약은 없던 것으로 하지요.”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자세를 취하자 중년인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아닙니다.”
그러자 혁권이 슬쩍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확인했다.
“운항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중년인이 말을 이었다.
“대신 위험지역을 오가는 만큼 운임을 더 올려 주셔야 됩니다.”
이미 생각하고 있던 거였기에 그는 약간 거만하게 몸을 뒤로 기대면서 흔쾌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그가 눈짓을 하자 나란히 앉아 있던 자말이 발밑에 내려 둔 가방에서 준비해 온 서류를 꺼내 중년인 앞에 내려놨다.
“살펴보고 이의가 없으면 바로 계약을 맺도록 하죠.”
서류에는 1년간 화물선을 용선하는 대신 600만 달러를 두 번에 걸쳐 현금으로 지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불황으로 용선 비용이 크게 하락한 상황에서 1년에 600만 달러면 위험지역을 운항하는 걸 감안해도 상당히 후하게 쳐준 거였기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뒤에 딸려 있는 세부 조건에 중년인은 이맛살을 찡그린 채 고개를 들었다.
“지급한 용선비로 해당 선박에 걸린 은행 담보를 풀고 대신 그쪽에서 채권 설정을 하겠다니, 이게 뭡니까?”
발끈하는 상대와 달리 그는 뭐가 문제냐는 투로 말했다.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그 정도 안전조치를 취해 놓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래도 용선비를 어디에 쓰는 것까지 개입하는 건 너무 심한 간섭이지 않습니까!”
중년인의 말에 혁권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지요. 운항할 배가 귀사의 재무 문제로 인해 언제든 은행에 압류당할 수 있다는 부담을 우리가 질 필요는 없지요. 만약 그렇다면 너무 뻔뻔한 행동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논리적인 이야기에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상대가 우물거리자 혁권이 정색을 하며 상대를 봤다.
“은행 담보를 풀더라도 50만 달러 이상 남을 텐데 용선비를 어디 딴 곳에다가 쓰려는 겁니까?”
용선비를 받아 다른 급한 채무부터 갚으려던 중년인은 날카로운 지적에 찔끔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면 더욱 이 조건을 뺄 수가 없습니다.”
단호한 태도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중년인은 잠시 같은 쪽 사람들과 귓속말을 나눈 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잘 생각했습니다.”
혁권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짓고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맺었다.
여러모로 이쪽 입장을 많이 반영했지만 쥬피터 해운도 경영난에 보유한 현금이 거의 바닥나 어려운 상황에서 선금 200만 달러가 들어와 한숨 돌릴 수 있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계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