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7
17
“나쁘지는 않지만 고작 오더 2개 성공시킨 걸로 판단을 내리기에는 이르지.”
“……?”
리비아 지사의 선전을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한 반응에 박철종 과장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눈치 빠르게 이동철 부장의 얼굴을 살피면서 이야기를 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괜히 실적을 올리겠다고 설치다가 사고라도 터지면 골치 아프니까. 적당히 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짜증 섞인 말투에 이동철 부장이 부하 직원을 걱정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러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리비아 지사에 나가 있는 혁권이 이동철 부장에게 단단히 찍힌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한 박철종 과장은 괜히 자신까지 미운털이 박히지 않기 위해서 더욱 조심을 했다.
“실적이 좀 생겼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예정대로 내년에 리비아 지사를 철수시킬 수 있게 준비를 해 놔.”
“예.”
혁권은 아직 몰랐지만 내부적으로 리비아 지사 철수가 결정되어 있었다.
오랜 내전으로 상주 직원들의 안전에 문제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동안 아무런 실적 없이 유지비만 계속 들어갔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런 곳에 혁권을 보낸 건 스스로 회사를 그만두도록 만들기 위한 거였다.
그런데 좌절과 낙담에 빠지기는커녕 오히려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오더를 받아 적지 않은 실적까지 올리고 있으니 이동철 부장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가 봐.”
“네.”
기분이 상한 이동철 부장이 귀찮은 듯 한쪽 팔을 내젖자 박철종 과장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혼자가 되자 이동철 부장은 펼쳐 둔 서류를 손가락 끝으로 툭툭 두드리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미련한 놈. 혼자 고군분투를 하는 모양이지만 그런다고 바뀌는 건 없어.”
한편 연이은 거래 성공으로 잔뜩 고무된 혁권은 얼마 있지 않아 리비아 지사가 폐쇄될 운명이라는 걸 모르고 더욱 적극적인 영업을 펼쳤다.
그가 믿을 만하고 능력도 괜찮다는 소문이 났는지 바이어들도 전과 달리 문전박대를 하지 않고 진지하게 상담에 응했다.
오늘도 꽤 규모가 있는 무역상을 운영하는 바이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10% 정도 저렴한 가격에 자동차 부품들을 구해 줄 수 있다, 이거요?”
“그렇습니다. 여기 테스트 자료에 나와 있는 대로 정품은 아니지만 똑같은 성능을 가진 부품들입니다.”
바이어는 혁권의 설명을 들으면서 아까 전에 봤던 자료를 한 번 더 살펴보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과 달리 성능에 이상만 없다면 정품이든 아니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가격까지 저렴하다니 금상첨화였다.
리비아를 비롯해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는 한국산 중고 자동차들이 상당수 수입돼 굴러다니고 있었기에 판로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노련한 장사꾼인 바이어는 가격을 더 낮춰 줄 것을 요구했다.
“괜찮은 것 같기는 한데…… 15%에 맞춰 줄 수는 없겠소?”
“리비아까지 가지고 오는 운송비가 있어서 그건 곤란합니다.”
그러자 바이어는 팔짱을 끼며 난색을 표했다.
“그 정도는 돼야 나도 남는 것이 있을 거 아니오.”
리비아에서 자동차 부품이 얼마에 팔리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데 저런 말을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티를 내지는 않고 혁권은 차분하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각 품목당 1천 개 이상 주문을 하신다면 12%까지는 맞춰 드리겠습니다.”
“이제 첫 거래를 하는 건데 그건 너무 많지 않소.”
물 담배를 피우며 바이어가 어렵다는 태도를 보이자 혁권은 미련 없이 거래를 접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요. 다음에 또 좋은 기회가 있겠지요.”
오더가 필요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손해를 봐 가면서까지 물건을 팔 생각은 없었다.
물론 상대편 요구대로 15%를 깎아 준다고 해도 적자가 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첫 거래부터 이렇게 낮은 가격에 물건을 준다면 다음에도 비슷하게 해 주거나 아니면 더 낮춰 줘야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장기적으로 득이 될게 없었다.
이럴 바에는 괜히 끝까지 매달려서 이쪽이 급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보다 그냥 포기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것이 나았다.
불과 한 달 전이었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오더를 따내려고 했을 테지만 압둘라흐만 덕분에 어느 정도 실적을 올린 상태라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혁권의 행동이 의외였는지 바이어는 멈칫하더니 흰자위가 많은 눈으로 그를 지그시 쳐다봤다.
“계약을 안 하겠다는 거요?”
적당히 식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신 혁권은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담담히 대답했다.
“저야 계약을 하고 싶지만 서로 조건이 맞지 않으니 어쩌겠습니까.”
“흐음.”
전혀 흔들림 없는 혁권의 목소리에 바이어는 한쪽 손으로 텁수룩하게 기른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알았소. 그럼 다음에 또 봅시다.”
“예.”
자리에서 일어난 혁권은 바이어와 악수를 나누고는 곧장 밖으로 나갔다.
저택을 나와 주차시켜 놓은 차로 걸어갈 때 자말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이번 오더를 꼭 따낼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이렇게 포기하시는 겁니까?”
이해가 안 간다는 자말의 시선에 혁권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내가 오더를 포기한 것처럼 보여.”
“아니었습니까.”
“아까 못 들었어, 다시 보자는 말?”
“그거야 인사치례로…….”
혁권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다시 협상을 해 보자는 거야. 아마 며칠 안으로 연락이 올 테니 두고 봐.”
확신에 찬 혁권과 달리 자말은 도통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두 사람이 탄 사륜구동 차는 신시가지를 가로질러 해안에 위치한 코린시아 호텔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서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혁권은 차 문을 반쯤 연 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오늘은 더 이상 밖에 나갈 일이 없으니까. 이만 퇴근하도록 해.”
“그래도 되겠습니까?”
“호텔 안에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어.”
경찰은 물론이고 무장 경비원들까지 배치돼 24시간 경비를 서서 트리폴리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기에 자말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내일 봐.”
“예.”
차 문을 닫고 내린 혁권이 막 호텔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고막을 때리는 엄청난 폭음이 울려 퍼졌다.
꽈아아앙!
“크윽.”
강한 충격파에 혁권은 볼썽사납게 바닥에 넘어졌다.
고막이 찢어졌는지 귀에서 위잉 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겨우 정신을 차리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입구 쪽을 돌아보자 시뻘건 화염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폭발이 컸는지 족히 30미터는 넘게 떨어진 호텔 현관까지 파편이 날아와 떨어졌고 입구에 있던 경비 초소는 박살이 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 주위로 아까 전까지만 해도 웃으며 인사를 하던 무장 경비원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날카로운 비명과 신음 소리를 들으며 그가 멍하니 서 있자 사륜구동 차에서 다급히 뛰어 내린 자말이 팔을 붙잡아 호텔 안으로 끌고 들어가며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자살 폭탄 테러입니다.”
“젠장!”
그동안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눈앞에서 테러가 일어나자 혁권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더군다나 트리폴리에서 가장 안전하다는 코린시아 호텔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충격은 더욱 컸다.
쿠쿵!
그 순간 또 한 차례의 폭음이 울리며 검은색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괴한들이 무기를 들고 호텔로 난입해 들어오자 혁권은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미치겠군.”
무장 경비원들이 고함을 내지르며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이내 테러범들이 쏜 총탄에 피를 뿌리며 나동그라졌다.
“막아!”
카카카캉!
“컥.”
“으윽!”
그사이 혁권과 자말은 호텔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넓은 로비는 겁에 질린 사람들의 비명성과 다급한 고함으로 가득 찬 채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꺄아아악!”
“도망쳐야 돼.”
본능적으로 요란하게 울리는 총성을 피해 이리저리 달아나는 사람들을 헤치며 자말이 그에게 크게 소리쳤다.
“놈들이 난입하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됩니다.”
“그래.”
충격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린 혁권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자말과 함께 로비를 가로질러 곧장 후문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앞서 도망치던 사람들이 후문 주차장 쪽에서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걸 보고 걸음을 멈춰야 했다.
쨍그랑.
“꾸엑!”
재빨리 복도 모퉁이에 붙어 바깥을 살펴본 혁권은 복면을 쓴 테러범들이 무기를 들고 이쪽으로 오는 걸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제기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느새 권총을 뽑아 든 자말의 모습에 잠시 테러범들을 노려본 혁권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이대로 얌전히 당할 수는 없지. 뚫고 나가자고.”
“잘 생각하셨습니다.”
위험하기는 했지만 테러범들에게 장악될 호텔에 남아 있는 것보다 나았다.
호신용으로 바깥에 나갈 때마다 지니고 다니는 베레타 권총을 꺼낸 혁권은 안전장치를 푼 뒤 노리쇠를 당겨 총알을 장전했다.
철컥.
상대를 겨냥하고는 막 방아쇠를 당기려던 혁권은 갑자기 나타난 픽업트럭을 보고 낭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썅!”
픽업트럭에는 중기관총이 장착되어 있었고 PRG-7을 가진 테러범 두 명이 짐칸에서 뛰어 내렸다.
아무리 테러범들이 이쪽을 눈치채지 못했다고 하지만 고작 권총 두 정 가지고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아니었다.
테러범 몇 명을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몰라도 중기관총이 불을 뿜으면 끝장이었다.
자말도 같은 생각인지 표정이 어두웠다.
적들이 후문 바로 앞까지 다가와 더 지체할 여유가 없었던 혁권은 한쪽 팔을 들어 복도 끝에 있는 비상구를 가리켰다.
“저리로!”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그가 몸을 움직이자 자말도 지체 없이 따라갔다.
두 사람이 비상구로 모습을 감추는 순간 테러범들이 호텔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오며 소리쳤다.
“입구를 막아! 한 놈도 도망치지 못하게 해.”
복면을 써서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눈에 핏발이 선 테러범들은 총구를 들이대면서 겁에 질린 사람들을 사납게 몰아 붙였다.
“손들어!”
“움직이면 쏜다.”
아랍어와 영어가 뒤섞인 외침에 사람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시키는 대로 했다.
한편 비상구로 들어간 혁권과 자말은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헉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렇다고 엘리베이터를 탈 수는 없었다.
5층까지 올라왔을 때 혁권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벽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었다.
“앞뒤로 완전히 막혔습니다. 아무래도 단순한 자살 테러가 아니라 호텔을 점거하려는 것 같은데요.”
한 손에 권총을 든 채 작은 창문으로 바깥 상황을 살핀 자말의 이야기에 혁권은 얼굴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