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79
179
혁권을 태운 보잉 747 여객기는 어두운 밤하늘을 쉬지 않고 날아가 새벽녘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공항에는 환승을 하거나 입출국을 위해 나와 있는 승객들로 북적거렸다.
줄을 서서 기다려 입국 심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검정색 양복 차림의 백성균이 앞으로 걸어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조금 과한 동작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자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무슨 조폭이야.”
“예?”
퉁명스러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백성균은 그때서야 주변 분위기를 파악하곤 다시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쯧.”
짧게 혀를 찬 혁권이 다시 발걸음을 옮기자 백성균이 뒤늦게 짐가방을 들고 뒤를 따랐다.
백성균이 가져온 승용차를 타고 공항을 빠져나오자 어슴푸레 동쪽 하늘에서 해가 떠오르며 날이 밝아 왔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일출을 바라보던 혁권은 고개를 바로 하며 입을 열었다.
“요즘 오윤태 과장은 어떻게 지내고 있어?”
“착실하게 회사를 다니면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태일그룹 쪽에서 다시 미행을 붙이지는 않고?”
“네. 그때 이후로는 조용합니다.”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기에는 일렀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의심에서 벗어났다고 봐도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지시하신 대로 TC인터내셔널 사건을 맡고 있는 검사 쪽에 파이프를 하나 뚫어 놨습니다.”
“잘했어. 이번 주에 1심 판결이 난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이례적으로 공판이 아주 빨리 진행되고 있는데, 예상한 대로 징역 2년에 벌금 10억 정도로 선고가 내려질 것 같습니다.”
“수백억 대의 주가조작을 벌였는데 벌금은 고작 10억이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냉소를 지으면서 혁권이 말을 이었다.
“이동철은 얼마나 받았어?”
“그쪽은 김인철과 달리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분류돼 구속 수사를 받고 있는데, 징역 4년에 벌금 40억 정도로 구형도 아주 세게 나올 것 같습니다.”
피해를 끼친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형량이었으나 그래도 경제사범 치고는 상당히 높게 구형이 된 거였다.
그리고 김인철의 지시를 받은 거였지만 거의 대부분의 일들을 이동철이 나서서 처리했기에 죄를 뒤집어씌우기에 딱 좋았다.
“꼬리 자르기군. 이동철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이 버려졌다는 걸 알 텐데…….”
백성균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안 그래도 구형이 나오자 자기는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뿐이라고 혐의를 부정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피의자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동철을 주범으로 지목하는 데다 무엇보다 검찰에서 그렇게 몰고 가고 있어 빠져나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런 데다…….”
말끝을 흐르자 혁권이 눈을 치켜뜨며 다그치듯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얼마 전에 이동철이 수감되어 있던 구치소에서 재소자가 휘두른 칼에 배를 찔려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중입니다.”
“위독한 거야?”
“그 정도는 아니지만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될 겁니다.”
“흠.”
한쪽 팔을 들어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면도를 하지 못해 조금 까칠해진 턱을 매만지던 혁권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뭔가 냄새가 나는군.”
“구치소에서는 재소자들끼리 사소한 다툼을 벌이다가 사고가 난 거라고 하는데, 제가 봐도 이상한 구석이 많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더 자세하게 알아봐.”
“예.”
혁권은 팔짱을 낀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흰 붕대로 복부를 온통 칭칭 감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이동철은 태일그룹 본사 비서실장인 박상빈이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자 눈을 크게 떴다.
“다, 당신이 여긴 왜 왔소!”
어쩐 일인지 잔뜩 겁먹은 표정의 이동철이 억지로 상반신을 일으키려 하자 옆으로 다가온 박상빈이 입가에 얇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시간을 내서 문병을 왔는데 이거 섭섭하구먼.”
“네놈들이 사주한 걸 내가 모를 줄 알아!”
“뭘 말이오?”
박상빈이 어깨를 으쓱이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이동철은 치밀어 오르는 화에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그 개자식한테 날 찌르라고 시켰잖아!”
그러자 박상빈이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는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입은 만악萬惡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분명 알아듣게 이야기를 했을 텐데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지껄여서 이런 고생을 자초하는지 모르겠군.”
“그럼 하지도 않은 일을 내가 다 뒤집어쓰라는 거요!”
두려움을 애써 참으면서 이동철이 반박하자 박상빈은 머리를 살짝 가로 저었다.
“아니지. 실제로 허위 공시를 올리고 유상증자로 들어온 회사 자금을 밖으로 빼돌린 건 자네가 다 하지 않았나.”
“그거야 김 이사가 다 시켜서…….”
억울하다는 듯 내뱉던 이동철의 말을 박상빈이 중간에 끊었다.
“입조심을 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아직도 못 알아들었나? 병실이 아니라 관 속에 드러누워 있기 싫으면 내 말을 새겨 두는 것이 좋을 거야.”
냉혹한 시선에 이동철은 몸을 움찔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일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실제로도 시키는 대로 하지 않자 구치소에 갇혀 있는 그에게 서슴없이 칼침을 놓았기에 단순한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다는 생각에 이동철은 절망으로 한없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이내 방금 전까지 사납게 덤벼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비굴한 얼굴로 사정하듯 입을 열었다.
“지금껏 회사를 위해 충성을 다했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겁니까?”
이야기를 하는 이동철의 눈동자에는 억울함과 배신감이 가득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실컷 개처럼 이리저리 마구 부려 먹다가 상황이 어려워지자 토사구팽을 당하는 꼴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동철을 바라보는 박상빈 실장의 시선에는 동정심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바늘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지그시 노려봤다.
“자네가 더 잘 알 텐데…….”
그러자 이동철이 뱉듯이 말했다.
“파나마에 내 이름으로 된 페이퍼컴퍼니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난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미간을 살짝 찡그린 박상빈 실장은 짧게 혀를 찼다.
“쯧.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는 건가?”
“진짜입니다, 실장님.”
간절한 목소리로 매달렸지만 돌아오는 건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데 버텨 봤자 자네만 힘들 뿐이야.”
“정말 아닙니다.”
재차 결백을 주장했지만 박상빈 실장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 좋아. 어디 누가 이기나 한번 끝까지 해보자고. 구치소에 있다고 내가 손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이미 벌건 대낮에 구치소 운동장에서 칼에 찔리는 아찔한 경험을 한 이동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 그리고 혹시나 해서 다시 이야기를 하는데, 검찰에서 이야기하는 대로 혐의를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 나을 거야. 어차피 모든 증거 다 드러난 마당에 괜히 부인을 해 봤자 자네만 힘들고 괘씸죄에 걸려 가중처벌이 내려질 뿐이잖아.”
“…….”
“안 그래도 회장님 심기가 많이 불편하신데 자꾸 시끄럽게 한다면 비자금이 조금 아깝지만 다른 선택을 하실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해.”
박상빈 실장이 말한 다른 선택이 뭔지 바로 알아차린 이동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시, 실장님…….”
“그러니까 잘 생각해서 처신하도록 해.”
다시 한 번 경고를 한 박상빈 실장은 이동철이 겁에 질린 걸 확인하고는 피식 비웃음 던지면서 말했다.
“그럼 몸조리 잘하고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하게.”
그대로 얼어 버린 듯 이동철이 절망 어린 얼굴로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멍하니 앉아 있자 박상빈 실장은 몸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집에서 하루를 푹 쉬며 피로를 푼 혁권은 김인철 문제는 잠시 미뤄 두고 알할부시한테 받은 오더부터 처리했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할랄 식품 생산 회사인 봉담식품이었다.
자금 압박에 일감까지 줄어들어 하루하루 겨우 버티던 봉담 식품은 그사이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언제 회사가 문을 닫을지 몰라 불안해하던 직원들과 멈춰 선 채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던 기계 설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오대철 사장은 변함없이 사무실에서 자리만 지키고 있지 않고 공장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직원들이 일하는 걸 살폈다.
“가동 전에 소독을 제대로 했지?”
“예. 바깥에 묻은 얼룩까지 다 닦아 냈습니다.”
“여름이라 식중독균이 더 잘 생기니까 철저히 관리하도록 해.”
“염려 마십시오.”
대답을 듣고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오대철 사장은 직접 청결 상태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그러다 새로 입고된 냉동 고기 박스들이 한쪽에 쌓여 있는 걸 보곤 호통을 쳤다.
“상하기 쉬운 고기를 저렇게 놔두면 어떡해!”
“바로 냉동고로 옮겨 갈 거라…….”
“그럼 빨리 넣어 놔야지 저러다 재료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쩔 거야!”
“죄송합니다.”
“어서 수레나 가져와!”
“예.”
허둥지둥 직원이 운반용 수레를 찾으러 가자 오대철 사장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소매를 걷어 올리고는 고기 박스를 손으로 들어서 냉동고로 옮겼다.
조금은 유난스러워 보이기도 했지만 이렇게 직접 하나하나 신경을 쓰고 챙기기 때문에 오대철 사장은 자신이 만든 제품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때 공장부지 안으로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오더니 혁권이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걸 보고 깜짝 놀란 오대철 사장은 뛰듯이 다가갔다.
“아이고, 어서 오십시오, 김 사장님.”
뜨거운 환대에 그는 빙긋 웃으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요즘만 같으면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를 것 같습니다. 이게 다 김 사장님 덕분입니다.”
“쑥스럽게 왜 그러십니까.”
혁권이 겸손한 태도를 보이자 오대철 사장은 머리를 흔들면서 진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정말입니다. 김 사장님이 아니셨으면 진즉에 공장 문을 닫고 빚더미에 올라앉았을 겁니다.”
사실이었다.
은행은 물론이고 사채까지 다 끌어다 썼기에 혁권이 제때 선수금을 주지 않았더라면 며칠 뒤에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해 부도가 나고 말았을 터였다.
그러니 오대철 사장한테 혁권은 평생의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것 참, 아무튼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군요.”
잠깐 살펴봐도 아주 바쁘게 돌아가는 공장을 보며 이야기를 이었다.
“일이 많은 모양이군요?”
그러자 오대철 사장이 뿌듯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예. 얼마 전에 대형 유통 업체의 PB상품[Private Brand Products] 납품 계약을 따내서 일거리가 조금 늘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이러면 저희가 주문한 물량을 제 날짜에 다 만들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약간 걱정스러운 듯 묻자 오대철 사장이 염려하지 말라는 듯 한쪽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면서 말했다.
“김 사장님 오더는 밤을 새서라도 만들어 드릴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그렇게 말씀을 해 주시니까 안심이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