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78
178
법원 앞은 흉흉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평소에도 갖가지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오가는 만큼 아무 일도 없이 평화로울 때가 오히려 드물다지만, 오늘은 김인철이 직접 출두하는 날이라 시위대의 기세가 더욱 거셌다.
“피땀 흘려 번 내 돈, 다시 토해 내라!”
“사기꾼 김인철은 피해자들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해라!”
“사과해라!”
“태일그룹은 책임을 지고 피해를 보상해라!”
입구 앞을 가로막고 있는 청원경찰들 때문에 차마 안으로 들어가진 못하고 건물 앞에 선 사람들이 팻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러 대는 이들은 이번 주가조작 사건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는 소액 투자자들로, 재판 기간 내내 이렇게 시위를 하며 정의를 구현해 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인터뷰를 따 내기 위해 어슬렁거리고 있는 기자들이 몇몇.
이미 한물 지나간 이슈라 한창때보다는 모자랐으나 그래도 꽤 많은 숫자라 할 수 있었다.
여론이 뜨거웠을 당시 ‘재벌 3세의 사기극’,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 뒤통수 맞은 서민들’ 같은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앞세워 제법 조회 수가 짭짤했었으니, 이번에도 비슷한 효과가 있기를 기대하는 것 같았다.
“어어, 나온다!”
“김인철이다!”
법원 정문 사이로 검은색 슈트를 빼입은 남자 두 사람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리며 몰려들었다.
파파팍!
“지금 심정이 어떠신가요, 김인철 씨!”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피해자들에게 하실 말씀 없으십니까?”
“검찰에서 재기한 혐의는 다 인정하시는 겁니까!”
경호원들이 철통같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어떻게든 손을 뻗어 마이크를 들이대는 기자들을 보고선 김인철이 일순 질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곁에 서 있던 이근홍이 슬쩍 옆구리를 찔러 주의를 준 덕분에 얼른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긴 했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김인철 씨!”
“……본의 아니게 TC인터내셔널 주주분들께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그리고요?”
“그것뿐입니까?”
기자가 다음 말을 기대하듯 물었지만 김인철에게선 아무런 답변도 나오지 않았다.
‘뭘 더 어쩌라는 거야, 병신아.’
애초에 이근홍이 준비해 준 대사는 이것밖에 없었다.
그 외엔 더 말해 봤자 꼬투리를 잡히거나 긁어 부스럼인 꼴이 될 테니,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으라는 그의 조언을 김인철은 충실히 지키고 있었다.
“더 하실 말씀은 없나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몰려든 인파 덕분에 열기가 후끈했다.
여기저기서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때문에 주변 온도가 몇 도는 더 올라가는 기분이 들자, 김인철은 일부러 한껏 초췌하게 보이려고 화장한 것이 녹아내리지는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무조건 반성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이근홍의 말에 따라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있던 김인철은 소매에 일어난 보풀을 보곤 입술을 짓씹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런 싸구려 옷 따위, 쳐다보지도 않을 거다.
집에 와서 옷장을 뒤져 보곤 안 되겠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던 이근홍의 모습을 새삼 떠올리니 열이 받았다.
“씨발, 나더러 이딴 거적때기를 입으란 말이야?”
아울렛 마크가 박힌 쇼핑백을 바닥에 내팽개치며 소리치는 김인철에게 이근홍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서민들 등쳐 먹은 사기꾼이라는 딱지가 붙은 마당에 시가 1천만 원이 넘는 고급 브랜드 옷을 입고 나타나면 여론이 잘도 편을 들어 주겠습니다?”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를 보는 것처럼 한심하단 표정을 짓더니 다시 한 번 김인철 앞으로 쇼핑백을 내밀었다.
결국 주변 설득에 못 이겨 이근홍이 사 준 옷을 걸치고 나오긴 했지만, 하류층이나 입는 싸구려를 제 몸에 걸쳤다는 생각을 하니 당장이라도 박박 찢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을 억지로 눌러 참고 있는 실정이었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보도 자료를 돌릴 테니 지금은 일단 보내 주시죠.”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이근홍이 뒤늦게 나서며 기자들을 물리쳤다.
경호원들이 틔워 준 길을 가로지르며 대기 중인 승용차를 향해 계단을 내려가려던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물씬 퍼졌다.
“어……?”
자기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듯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김인철은 주르륵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축축한 감촉에 서서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씹……!”
분노한 김인철이 재빨리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자, 기자들 너머에 있는 시위대 중 한 사람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계란 한 판을 들어 보였다.
“꼴좋다, 씨발 새끼야!”
“더러운 놈!”
“사기꾼!”
“내 돈 내놔라, 이놈아!”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욕설에 카메라맨들은 신나서 셔터를 눌러 댔고, 기자들은 더욱 극성스럽게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물러서! 다들 물러나요!”
“비켜서세요!”
이근홍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김인철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까 봐 황급히 재킷을 벗어 그를 덮어 주고는 얼른 등을 떠밀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뒤에서는 경호원들이 시위대와 기자 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두 팔을 벌린 채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일단 차에 타서 얘기합시다.”
뭐라 반박하려는 김인철을 억지로 끌고 차에 태운 이근홍은 얼른 차 문을 닫으라며 경호원에게 손짓했다.
탁!
검게 선팅된 차창 덕분에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겨우 해방되자 곧장 김인철의 입에서 쌍욕이 튀어나왔다.
“개새끼 같으니라고!”
그는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방금 계란을 던진 사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바깥에서는 김인철에게서 별 재미를 못 본 기자들이 재빨리 사내로 목표를 변경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아마 오늘 저녁쯤 되면 계란 영웅이니 투사니 하면서 시답잖은 기사가 포털사이트를 장식할 것이 뻔했다.
“당신은 왜 가만히 있어! 저 새끼야말로 명예 훼손으로 처넣어야 되는 거 아냐?”
“명예훼손이라…….”
“아님 폭행죄든 뭐든! 감히 나한테 계란을 던지다니, 시발 잡것들이 내가 누군 줄 알고!”
길길이 날뛰며 화를 내는 김인철을 바라보는 이근홍의 눈빛이 점점 차갑게 식어 갔다.
‘아니까 던졌겠지.’
가깝게 붙어 있었던지라 노란 점액질이 튄 와이셔츠 옷깃을 물티슈로 닦으며 이근홍이 속으로 조소했다.
태일그룹에서 받는 수억대의 연봉만 아니었어도, 이런 철부지를 변호할 일은 없었으리라.
이근홍은 차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동그라져 있는 제 재킷을 흘끗 보고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저건 버리라고 해야겠군.
딱 한 번밖에 안 입은 새 옷임에도 불구하고 세탁해서 다시 사용한다는 선택지는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재벌가만큼은 아니지만 그 역시 부장검사 출신으로 돈이 부족하지는 않았으므로 검소함 따위 하고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씨발! 씨이이이발!”
앞좌석을 발로 퍽퍽 차면서 오갈 데 없는 분노를 푸는 김인철의 눈에 새빨간 핏줄이 섰다.
그가 어디서 이런 굴욕을 당해 봤으랴.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는 모욕에 김인철은 거의 정신이 반쯤 나갈 지경이었다.
눈이 홱 뒤집어진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싶었다.
“절대 그 새끼들 가만 안 둘 거야…….”
“예. 이번 일이 끝나면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시죠.”
어차피 소송이 마무리되고 나면 그다음 일은 제 알 바 아니었으므로 이근홍은 김인철이 폭력을 휘두르건 사람을 죽일 셈이건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아, 혹시 살인교사죄로 또 끌려가면 내가 나서야 되려나?’
이근홍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미스라타로 보낸 유조선이 무사히 원유를 실고 수에즈운하로 향했다는 소식에 혁권은 그때서야 긴장을 풀고 서울행 비행기를 탔다.
“신문을 보시겠습니까?”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유니폼을 입은 스튜어디스가 미소를 지으면서 서 있었다.
“아, 하나 주세요.”
“한국분이셨군요.”
그가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자 스튜어디스는 더욱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종류가 많은데 어느 걸로 드릴까요?”
살짝 고개를 내밀어 카트 위를 살펴보니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즈 같은 유명 영자 신문부터 시작해서 각국의 일간지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혁권은 그중에서 한국 신문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고맙다는 뜻으로 스튜어디스에게 눈을 살짝 접어 웃어 보였다.
스튜어디스가 카트를 밀며 다른 손님에게도 똑같이 신문을 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는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 서울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8시간 이상 가야 했다.
직항 노선이 있다면 조금 더 빠르겠지만 중간에 터키 이스탄불을 거쳐 가야 했기에 더 멀게 느껴졌다.
1등석이라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한자리에 앉아 있으면 허리가 뻐근하고 불편한 것은 당연한 일.
좀이 쑤신 듯 몸을 뒤척거린 혁권은 작게 불평을 내뱉었다.
“휴우.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군.”
부상을 당한 하킴 대신 경호 임무를 맡은 알아바디가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한국말로 혼잣말을 하는 걸 듣고 쳐다봤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가볍게 손을 내저은 그는 무릎 위에 올려둔 신문을 집어서 펼쳤다.
여전히 제 할 일을 못하는 국회의원들이 서로 편을 갈라 정쟁을 벌이는 한심한 내용과, 갈수록 어려워지는 경제 상황이 1면부터 신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선거 때면 국민들 앞에서 바짝 엎드려 표를 구걸하다가, 당선이 된 후에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언제 그랬냐는 듯 안면을 몰수하고 목에 빳빳이 힘을 준 채 민생을 외면하는 한결(?)같은 모습에 그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데도 지금껏 나라가 유지되고 선진국은 아니더라도 그 문턱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했다.
정치 수준은 밑바닥이었지만 세계 어느 나라보다 근면성실 한 국민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있는 걸 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신문을 넘기던 혁권은 뒤쪽에 작게 실린 기사를 하나 발견하곤 눈썹을 찡그렸다.
바로 김인철과 관련된 기사였다.
사진도 없이 경제면 한구석에 단신처럼 실려 있어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모르고 그냥 지나칠 정도였다.
시간이 오래 지난 것도 아니고, 한 달 넘게 한국 주식 시장을 뜨겁게 달구며 화제가 된 사건인 것을 생각하면 너무 기사가 작았다.
게다가 피해액도 무려 수백억인 것을 감안하면 꽤 수상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분명 태일그룹의 입김이 작용했음을 직감한 혁권은 미간을 찌푸렸다.
국내 굴지의 재벌가 아들이 관련되어 있어 충분히 이슈를 끌 만한 사건이었으니 그것 말고는 이렇게 하찮게 다뤄질 만한 이유가 없었다.
“언론의 입까지 틀어막다니 역시 태일그룹이군.”
이렇게 될 걸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실제로 눈으로 확인하니 씁쓸해지는 걸 감출 수 없었다.
그러다 매섭게 눈을 번득이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들을 비웃으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