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93
193
다음 날 정오가 되자 약속대로 510억 원이 TC인터내셔널 법인 계좌로 입금됐다.
돈이 들어온 걸 확인한 혁권은 지석영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재기한 민사소송을 치하하는 것과 동시에 압류를 풀어 줬다.
하지만 형사재판과 검찰 조사는 민사하고 상관없이 계속 진행되는 데다 이번 고소로 외화 밀반출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새로운 범죄 사실들이 드러났기에, 구형이 더욱 무겁게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론까지 안 좋아서 재벌 오너와 일가한테 전가의 보도처럼 적용되던 집행유예 또한 받기가 어려웠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관심이 식으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은 꼼짝 없이 실형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혁권은 돈도 챙기고 김인철을 감옥에까지 집어넣어 제대로 복수에 성공한 셈이 됐다.
자금이 확보되자 혁권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아직 개인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는 TC인터내셔널 주식을 매입하는 거였다.
TC인터내셔널 주식은 폭락을 거듭하다 분식 회계 사실이 드러나면서 결국 상장폐지까지 당하자 주당 100원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어 거래 자체가 끊긴 상태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주식을 떠안고 있던 개인 투자자들은 혁권이 매입을 한다고 하자 앞을 다투며 팔았다.
“어제부로 주식 매입이 모두 끝났습니다.”
김덕현 전무의 보고에 그는 가져온 서류를 살펴보며 물었다.
“100% 다 매입이 된 거예요?”
“그렇습니다.”
“자금은 얼마나 들어갔어요?”
“보고서에도 적혀 있지만 80억이 조금 못 됩니다.”
“생각보다 지출이 크지 않았네요.”
원래는 주식 매입에 못해도 100억 정도가 들어갈 거라 예상하고 있었다.
“곧 부도가 나서 휴지조각이 될 거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저희 쪽에서 매입을 한다니 헐값에라도 팔아 치우려고 우르르 몰려드는 바람에 가격이 더 떨어지고 손쉽게 매입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잘됐군요.”
돈을 아낀 만큼 그에게 이득이었기에 혁권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렇게 헐값에 주식을 모두 매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태일그룹 측과 합의를 보고 민사소송을 취하하면서 현금으로 510억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지지 않은 점이 컸다.
새로운 자금이 무려 500억 넘게 들어왔다는 사실이 공개됐다면 폭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외거래 시장에서 원래 작전을 벌이기 전 가격인 주당 300원까지는 올랐을 터였다.
그러면 당연히 혁권이 주식을 매입하는 데 더 많은 돈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태일그룹 측에서 일을 조용히 처리하길 바란 것도 있지만 혁권도 쓸데없이 떠들어 대서 불필요한 지출을 할 만큼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그럼 이걸로 이제 TC인터내셔널을 100% 소유하게 됐군.”
“이제 솔 루시두스와 회사를 합치실 겁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하는 김덕현과 달리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혁권은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TC인터내셔널은 지금처럼 계속 독자적으로 운영할 거예요.”
“남아 있는 인원과 사업도 별로 없는데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주식도 전부 확보했으니 당연히 솔 루시두스와 합병시켜 TC인터내셔널을 청산해 버릴 거라고 예상했다.
그렇게 해도 주식을 매입하고 남은 자금 430억과 회사 소유 부동산이 남았기에 상당한 이득이었다.
남은 직원들도 몇 명 되지 않으니 적당히 위로금을 줘서 내보내거나 아니면 서울 사무실에 합류시키면 됐다.
“여기와 별도로 TC인터내셔널은 따로 할 일이 있어요.”
알짜배기 사업은 전부 태일물산에 남겨 둔 채 계열 분리가 돼서 말 그대로 빈껍데기뿐인데 이런 회사로 뭘 하겠다는 건지 김덕현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에 있던 회사에서 오랫동안 해외 자원 개발 업무를 맡았다고 했었지요?”
“……예.”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광산을 본격 개발하는 데 필요한 예산과 장비 목록을 한번 뽑아 보도록 해요.”
“……!”
깜짝 놀란 김덕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설마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에 손을 대시려는 겁니까?”
“광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껏 확보한 개발권인데 이대로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어깨를 으쓱이며 쉽게 이야기하는 혁권과 달리 김덕현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파였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거긴 치안 상태가 너무나도 안 좋은 데다 반군이 장악한 지역 안에 광산이 위치해 있어서 사실상 개발이 불가능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직접 개발을 했지 주가조작에 이용했겠습니까?”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그런 위험성 때문에 외국의 다국적 대형 광산 업체들이 관심을 두지 않아 TC인터내셔널이 사업권을 딸 수 있었던 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었다.
김덕현의 반대에 혁권은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그 문제는 따로 해결책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어떻게 하시려는 겁니까?”
“그건 좀 더 일이 구체화되면 알려 드리도록 하겠소.”
“이것 참…….”
스리슬쩍 가장 중요한 일을 알려 주지 않고 말을 돌리자 김덕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오너가 이렇게 자신 있게 이야기를 하는데 안 된다고 초를 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일단 개발을 시작하면 자금이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니고 중간에 쉽게 그만둘 수도 없었기에 선뜻 맞장구를 쳐 주지도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김덕현의 모습에 혁권이 합의점을 제시했다.
“그럼 본격적인 사업 진행은 다이아몬드 광산의 안전이 확보되면 추진하는 걸로 하고, 일단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만 해 두는 것으로 합시다.”
“그런 거라면 저도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무조건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의견을 수렴해서 적당히 양보해 주자 김덕현은 안도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혁권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해외에서 자원 개발을 했던 경험도 있으니 당분간은 김 전무가 서울 지사와 TC인터내셔널을 함께 맡아 줘야 될 것 같은데, 그래도 되겠어요?”
그러자 김덕현은 별다른 망설임 없이 선뜻 머리를 끄덕였다.
“당장 크게 바쁜 일도 없으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은 계륵鷄肋 같은 존재지만 앞으로 시에라리온 다이아몬드 광산이 우리에게 큰돈을 벌어 주는 보물단지가 될 테니 두고 봐요.”
마치 예언을 하듯 그가 입가에 미소까지 지으면서 자신 있게 이야기했지만, 김덕현은 여전히 걱정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저도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습니다.”
광산 개발까지 해결해야 될 난관들이 너무나도 많았기에 김덕현은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기에 혁권은 뒤처리를 김덕현한테 맡기고 그리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출국 전에 그는 김덕현에게 이번 일을 잘 해결한 보너스로 현금 1억을 줬다.
생각지도 못했던 큰돈에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했지만, 혁권이 억지로 손에 쥐여 주자 김덕현은 이내 감격한 얼굴로 머리를 숙였다.
돈도 돈이었지만 무엇보다 오너인 혁권이 그를 인정해 줬다는 생각에, 정리해고를 당한 이후로 위축되어 있던 자존감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앞으로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김덕현을 고작(?) 1억을 써서 완전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으니 혁권 입장에서는 상당히 남는 장사였다.
출국 당일.
어머니인 박필순 여사는 아들한테 줄 밑반찬을 만드느라 새벽부터 일어나 바빴다.
탁탁탁.
치이익.
맛있는 냄새와 함께 부엌에서 들리는 음식 만드는 소리에 잠이 깬 혁권은 하품을 하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 함. 뭐 하세요?”
“일어났니? 아직 시간이 멀었는데 좀 더 자지 않고.”
허리에 앞치마를 두른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시끄러워서 깼나 보구나?”
“아니에요. 이제 슬슬 준비를 해야죠. 그런데 아침부터 무슨 음식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요?”
식탁에는 애호박볶음부터 노각생체, 더덕구이 등 십여 가지가 넘는 반찬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이번에 가면 또 몇 달은 나가 있을 거지 않니. 그래서 밑반찬으로 먹을 거 몇 개 만들고 있는 중이야.”
“안 그러셔도 되는데…… 괜히 힘드시잖아요.”
“힘들기는 먹기 좋게 밀폐 용기에 담아 줄 테니까 가져가서 밥 먹을 때마다 꼭 챙겨 먹도록 해. 알았지?”
“그럴게요.”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되니까 씻고 나와.”
“알았어요.”
만들어진 밑반찬들을 보니, 하나같이 그가 평소 좋아하던 거였다.
아들을 먹이겠다고 손수 재료를 하나하나 사 오셔서 다듬고 새벽부터 일어나 반찬을 만드셨을 걸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먹먹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런 것이 어머니의 사랑인 거 같았다.
샤워를 하고 욕실을 나오자 어제 늦게까지 택시 운전을 하셨을 아버지가 일어나 소파에 앉아 계셨다.
“아버지.”
“응. 씻었냐?”
“네. 피곤하실 텐데 벌써 일어나셨어요?”
“나이가 드니 잠이 별로 안 오는구나.”
“아. 예.”
택시 영업을 끝내고 집에 들어오실 때마다 피곤에 절어 바로 잠들기 바쁘시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살짝 당황스러웠다.
아마도 아들이 떠나는 날이라 일찍 일어나셔 놓고 쑥스러우시니까 괜히 말을 돌리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내심 미소를 지을 때 부엌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고는 크게 소리를 치셨다.
“다들 식사하러 와요!”
아버지와 함께 부엌으로 들어가자 평소보다 많은 음식이 식탁에 차려져 있었다.
특히 한가운데 불고기찜까지 놓여 있어 아침으로 먹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불고기찜도 하셨어요?”
“네가 좋아하잖니.”
그러시면서 불고기찜이 놓인 그릇을 살짝 혁권 앞으로 밀어 놓으셨다.
“식으면 맛없으니까 따뜻할 때 어서 먹어.”
“예. 두 분도 드세요.”
“그래.”
대답을 했지만 어머니는 식사를 하시지 않고 연신 맛있는 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 혁권의 밥그릇에 올려 주셨다.
어린아이도 아닌데 이러시는 것이 살짝 부담되기도 했으나, 그래도 어머니가 좋아서 하시는 건데 뭐라고 하기도 그래서 그냥 주시는 대로 받아먹었다.
금방 한 그릇을 다 비우자 어머니가 몸을 반쯤 일으키시면서 물었다.
“한 그릇 더 퍼 줄까?”
“아니요. 벌써 배가 다 찼어요.”
“그래도 불고기찜이 아직 많이 남았는데…….”
어머니가 아쉬운 표정을 짓자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 무뚝뚝한 어투로 입을 여셨다.
“애가 싫다잖아. 그러다가 비행기에서 탈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알았어요. 당신은 아침부터 왜 큰 소리를 치고 그래요?”
눈을 흘기는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려는 걸 그가 얼른 끼어들었다.
“참 두 분 다 왜들 이러세요? 오랫동안 비행기에 앉아서 가야 되는데 배가 너무 부르면 거북해서 그러는 거니까 어머니가 이해해 주세요.”
“그러면 남은 걸 싸 줄까?”
“다른 밑반찬도 많은데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또 아버지도 드셔야죠.”
“저 양반은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데 뭘.”
앙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처럼 퉁명스레 하는 말에 눈치를 살폈으나, 다행히 아버지는 그냥 평소처럼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기색이었다.
“이번에 가면 언제 돌아오는 거냐?”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서울에 벌여 놓은 일도 있으니까 지난번보다는 짧게 걸릴 거예요.”
“그래. 돈 버는 것도 좋지만 외국에 나가면 항상 몸 조심해야 한다. 한국과는 달라서 총 들고 다니는 나쁜 놈들이 많다고 하던데, 괜히 위험한 일에 휘말리면 안 돼.”
시비라도 걸리면 혼자 상대할 생각하지 말고 바로 경찰을 부르라며 아버지가 신신당부를 했다.
양심이 콕콕 찔리긴 했지만 어쨌든 얌전히 예, 하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