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94
194
식사를 끝낸 혁권은 방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어젯밤 대충 싸 놓은 짐을 마저 챙기고 나오자 어느새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셨어요?”
주위를 둘러보며 그가 묻자 밑반찬을 넣은 스티로폼 박스를 테이프로 꼼꼼하게 싸매고 있던 어머니가 고개를 드시면서 대답했다.
“공항까지 태워 주신다고 차를 가지러 가셨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집에 차가 없는 것도 아니고 짐도 많은데 타고 가야지.”
“아버지도 쉬셔야 되잖아요.”
“너 데려다주고 들어와서 주무시면 돼.”
죄송스러웠지만 그래도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러시는 거니, 혁권도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밑반찬을 한 박스나 만드셨어요?”
“마음 같아서는 더 싸 주고 싶은데, 비행기를 타고 가야 돼서 이것만 한 거야. 두 번씩 포장하고 국물이 있는 건 안 흘리게 병에 넣고 단단히 밀봉시켜 놨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예.”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어머니한테 내밀었다.
“이거 받으세요.”
“뭐니?”
“용돈요.”
그러자 어머니가 가볍게 손사래를 치셨다.
“지난번에 준 것도 그래도 있는, 뭘. 괜찮으니까 너나 써.”
“밖에 나가 있으면 잘 못 챙기니까, 미리 드리는 거예요.”
“돈을 모아서 너도 빨리 장가를 가야지. 자꾸 이렇게 쓰면 어떡해?”
“이 정도 여유는 있어요. 시간 없으니까 빨리 받으세요. 이러다가 비행기 놓치겠어요.”
혁권의 재촉에 어머니는 마지못해 돈 봉투를 받으셨다.
“잘 쓰마.”
“부족하면 언제든지 또 드릴 테니까 괜히 장롱에 넣어 두거나 아끼시지 마시고 편하게 쓰세요. 아셨죠?”
“그래.”
말씀은 저렇게 하셔도 아들이 준 돈이라고 고이 모셔 둘 것이 뻔했다.
한 번 더 당부를 하려다가 그러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 혁권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짐을 챙겨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아파트 현관 앞에 아버지께서 차를 세워 놓고 계셨다.
“빠뜨린 것 없이 짐은 다 챙겼냐?”
“예.”
“트렁크에 싣게 이리로 가져와.”
“그냥 택시를 불러서 가도 되는데…….”
“뭐 하러 쓸데없이 그래.”
퉁명스럽게 말한 아버지가 트렁크를 열고 여행 가방을 집어 들자 그가 황급히 나섰다.
“제가 할게요.”
여행용 가방과 밑반찬이 든 박스를 싣자 트렁크가 가득 찼다.
“저 갈게요.”
“몸조심하고.”
“걱정 마세요.”
어머니가 살짝 눈물을 비치자 그는 안심하시라는 뜻으로 가볍게 포옹을 했다.
“다녀올게요.”
“그래.”
조수석에 탄 혁권은 차창을 열고 안 들어가고 계속 서 계시는 어머니에게 손을 흔들어 드렸다.
아파트 단지를 나온 아버지의 개인 택시는 곧장 큰길로 들어섰다.
평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차가 별로 막히지 않아 인천공항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국제선 청사 앞에 세워 주세요.”
“짐도 있는데 안까지 들어다 주마.”
“아니에요.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또 한참 걸어가야 되고 아버지도 일찍 들어가서 쉬셔야죠.”
“그래도 되겠냐?”
“짐은 카트를 가져와서 옮기면 돼요.”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해라.”
잠시 뒤 커다란 국제선 청사 앞에 차가 멈춰 섰다.
트렁크에서 짐을 내린 혁권은 비상등을 켜 둔 채 차 문을 열고 나와 서 있는 아버지를 보며 말했다.
“이제 들어가세요.”
“건강 챙기고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해라.”
“예.”
한쪽 팔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곤 몸을 돌려 운전석으로 가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왜소해 보이는 것 같아 그는 왠지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응?”
“운전 조심하시라고요. 그리고 가능하면 밤일은 하지 마세요.”
“녀석, 그래. 알았다.”
혁권의 말에 아버지는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한쪽 손을 드셨다.
“가세요.”
부우우웅.
역시 비싼 차가 좋은지 예전에 운전하시던 택시와 달리 부드러운 엔진 소리를 내며 미끄러지듯 공항 청사를 빠져나갔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알아바디가 옆으로 다가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보스.”
“도착해 있었군.”
“아버님 차 뒤를 따라왔습니다.”
“그랬군.”
괜히 부모님 눈에 띄지 않도록 미리 아버지 차를 타고 간다고 문자를 보냈다.
혁권은 안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쓰곤 몸을 돌려 청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고.”
“예.”
아테네 공항에 도착하자 여느 때처럼 자말이 부하들과 마중을 나와 있었다.
SUV 뒷좌석에 앉은 그는 따스한 햇살이 하얀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쬐며 올리브 밭이 넓게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며, 이제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을 느꼈다.
쭉 뻗어 있는 고속도로를 한참 동안 달린 SUV는 피레에프스 항구 근처에 위치한 콘도로 들어섰다.
원래는 리비아에서 데려온 부하들의 가족을 임시로 거주시키기 위해서 마련한 곳이었는데, 지금은 주변에 있던 올리브 농장 부지를 사들여서 완전한 그의 아지트로 만들었다.
평야 지대라 주위가 확 트여 있고 콘도 건물 자체가 튼튼한 콘크리트로 지어져 있어 방어를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나름대로 치안이 안정되어 있는 그리스였기에 리비아에서처럼 대놓고 습격 같은 걸 해 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것이 있었다.
지난번 발레타에서 이슬람형제단이 보낸 킬러들에게 습격을 받은 이후로 혁권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건지 확실히 깨달았다.
차가 도착하자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부하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절도 있는 자세로 거수경례를 했다.
그 모습이 마치 잘 훈련된 군인 같았는데 부하들 대부분이 군 출신이다 보니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허리에 곤봉 하나만 달랑 차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가슴 안쪽에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그리스에서 총기 소지는 불법이었기에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숨긴 거였다.
위로 들어 올린 차단봉을 지나 그가 탄 SUV와 경호 차량이 콘도 내부 진입 도로에 들어서자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이 부르르 떨렸다.
무심코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혁권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그다지 반갑지 않은 샌더슨 요원의 전화였다.
“여보세요.”
-나요, 샌더슨. 비행은 즐거웠소?
첫마디부터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걸 봐도 확실히 샌더슨과는 그다지 맞지 않았다.
“CIA도 참 할 일이 없나 보군.”
-무슨 뜻이오?
“거창한 테러범이나 적국 스파이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사람 뒤나 캐고 다니니 말이오.”
-하하하. 난 또 뭐라고. 미스터 김은 우리의 중요한 협력자 중 한 명이오. 그러니까 신상 파악을 해 두는 건 당연한 일이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는 건 상당히 거슬리는 일이었다.
그 때문인지 목소리에서 기분 나쁜 티가 그대로 드러났다.
“퍽이나 고맙군.”
-그게 우리 일인 걸 어쩌겠소?
짜증이 났지만 하지 말란다고 그만둘 상대가 아니었기에 그는 대충 넘기고 용건을 물었다.
“안부나 물으려고 전화를 하진 않았을 테고 용건이 뭐요?”
-급하기는. 지난번에 내가 한 이야기는 잊지 않았겠지요.
“뭐 말이오?”
-이집트 정부에서 발주하는 고등 훈련기 도입 사업 말이오.
CIA를 대신해서 미스라타 민병대에 물자를 공급해 주는 대가로 받기로 한 특혜를 떠올린 혁권은 눈을 반짝이며 귀에 댄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소.”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으니까 며칠 중으로 카이로에 가서 알자파리 소장을 만나도록 하시오.
“따로 준비해야 될 건 없소?”
-관련 서류를 오늘 중으로 보내 줄 테니까 그걸 참조하면 될 거요.
“알았소.”
-아 참. 그리고 이번에 한국을 다녀오면서 아주 흥미로운 걸 가지고 왔더구려.
“…….”
-할랄 인증을 받은 전투식량 말이오.
그때서야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혁권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민병대에 공급할 식량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보니 머리를 억지로 짜내서 생각해 낸 고육책이오.”
실제로 이슬람 율법에 따라 금해야 되는 음식들이 많아 식량 품목을 고를 때 상당히 신경을 썼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율법에서 허용하는 과일 통조림이나 채소류 그리고 밀가루 정도밖에 가져다줄 수 없었다.
내전이 격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혁권도 단순히 몇 번 거래를 하고 말 거였으면 귀찮게 할랄 인증이 된 전투식량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중간에 CIA의 압력이 있었지만, 어찌 됐건 미스라타 민병대에 공급되는 물자를 책임지기로 한 만큼 가장 효율적이고 상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니, 전투식량을 떠올리게 된 거였다.
-정말 기발한 생각이었소. 윗선에서 미스터 김이 만든 전투식량 샘플을 보고 아주 극찬을 했소.
이제 첫 물량을 그리스에 실어 와 미스라타로 보낼 예정인데, 물건을 어떻게 구한 건지 눈가를 찡그리다가 CIA라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니라는 생각에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전투식량 5만 개를 이번 달 말까지 구해 줬으면 좋겠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에서 전투식량이 왜 필요한 거요?”
-시리아에 필요할 것 같아서 일단 시험적으로 소량을 보내 볼 계획이오.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시리아 정부에 갖다 주지는 않을 테니, 온건파 반군에 전투식량을 지원해 주려 한다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딱히 손해 볼 일이 없고 오히려 중간에서 꽤 짭짤한 마진을 챙길 수 있었기에 그는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좋소.”
-돈은 서류하고 함께 보내도록 하겠소.
통화를 끝낸 혁권은 이미 콘도 건물 앞에 도착해 멈춰 서 있는 SUV 차 문을 열고 내렸다.
곧장 방으로 올라간 혁권이 샤워를 하고 냉장고에서 맥주 캔을 하나 꺼내 목을 축이고 있자 노크를 하며 자말이 들어왔다.
“쉬고 계신데 제가 방해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그는 앉으라며 맞은편의 소파를 가리켰다.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아 편안한 자세를 취한 혁권이 자말을 보며 말했다.
“아까 차 안에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해 봐.”
“예. 관청에서 공장을 언제부터 가동할 건지 문의를 해 왔습니다.”
부하들과 가족을 그리스로 데려오면서 보다 손쉽게 거주 허가를 받기 위해 투자 이민을 신청했는데, 그때 운영을 하겠다고 신고했던 공장을 말하는 거였다.
아무래도 가족이 연관된 일이다 보니 자말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만약 이게 잘못되면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자신과 가족들이 신분이 불안정하고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난민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리스 국내에 반난민 정세가 퍼지면서 목숨을 걸고 어렵게 바다를 건너온 난민들이 다시 터키로 되돌려 보내지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있었다.
혁권은 손에 든 맥주 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공장 설비는 다 갖춰졌지?”
“네. 아직 조금 미숙하지만 가족들 모두 그리스인 숙련공한테 기술도 착실히 배우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다음 달부터 공장을 가동할 거라고 해.”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윗선에 뇌물을 먹여 놔서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 좋지 않겠어.”
“하지만 공장을 돌리려면 일거리가 있어야 되는데…….”
눈치를 보며 자말이 말끝을 흐리자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시다면 시키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래.”
한시름 놓은 자말은 그때서야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