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00
200
택시에서 내려 알아바디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 도착하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내 데스크로 간 그는 다행히 수술이 빨리 끝나 입원실로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탔다.
원래는 중환자실에서 안정을 취해야 했지만 총상 환자인 데다 간첩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기에 특별히 병실로 옮겨 거기서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6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내린 혁권은 복도 한쪽에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걸 발견하곤 그리로 걸어갔다.
그러자 경찰관 한 명이 굳은 어투로 한쪽 팔을 앞으로 내밀며 그를 제지했다.
“죄송하지만 여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안에 있는 환자의 보호자입니다.”
경찰관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아래위로 훑어봤다.
“가족은 아니신 것 같고 관계가 어떻게 되십니까?”
“회사 상사입니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아니, 괜찮은지 환자 상태도 확인 못 한다는 말이오!”
이맛살을 찡그린 혁권은 살짝 언성을 높였다.
“중요 사건의 참고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혁권이 막 뭐라고 더 따지려고 할 때 양복을 입은 건장한 사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뭡니까?”
경찰관이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곤 말했다.
“이분이 자꾸 면회가 금지된 병실에 들어가시려고 해서 막고 있었습니다.”
힐끗 혁권한테 눈길을 준 사내는 경찰관을 보며 입을 열었다.
“들여보내세요.”
“예? 하지만…….”
“괜찮다고 하잖습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경찰관이 비켜서자 그는 사내를 한번 쳐다보곤 문을 열고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조용한 실내에는 초췌한 얼굴로 누워 있는 알하바디와 이따금 삐 하는 소리를 내는 작은 기계 단둘뿐이었다.
병원 특유의 짙은 소독약 냄새와 흰색 벽에 둘러싸인 알하바디는 지친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수혈을 했다곤 하지만 피를 꽤 흘린 탓에 그의 안색은 백짓장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마치 시체를 연상케 했으나, 얕게 오르내리는 가슴 덕분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던 건장한 사내가 이렇게 힘없이 누워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훌훌 털고 일어날 것만 같은데 어찌 이리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지, 사뭇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속상한 마음에 혁권이 인상을 작게 찌푸렸을 때.
우우웅.
진동이 울리는 소리에 그는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꺼내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백성균입니다, 보스.
“어디야?”
-방금 사천 톨게이트를 통과했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직후 그가 전화를 걸어 서울에 있던 백성균을 바로 내려오도록 지시했었다.
그동안 백성균을 옆에 두고 지켜본 혁권은 입이 무겁고 몸놀림이 날랜 모습에, 정식으로 부하로 받아들였다.
현재는 솔 루시두스 한국 지사 직원으로 되어 있었다.
“시립 병원으로 오도록 해. 거기 610호실에 있어.”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혁권은 작게 숨을 내뱉었다.
알아바디가 이렇게 누워 있는 상황에서 그를 도울 부하가 한 명이나마 오고 있다는 것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됐다.
저녁이 되자 금방 비라도 쏟아질 것 같이 날씨가 아주 흐려졌다.
바람이 세게 부는 부둣가 외진 창고에 낡은 승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세 명의 사내가 내렸는데 하나같이 모자를 깊이 눌러써 얼굴을 가렸다.
일행 중 한 명은 커다란 가방을 손에 들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면서 주위를 살핀 사내들은 군데군데 칠이 떨어져 나간 창고로 걸어갔다.
허리를 숙여 반쯤 열린 철제 셔터를 지나 창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한 생선 비린내가 코를 쑤셨다.
손전등을 하나 켜자 버려진 생선 상자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무언가를 찾는 듯 불빛을 이리저리 비추던 사내들은 한쪽 구석에 시커먼 인영 하나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걸 발견했다.
“장백산.”
“피바다…… 크윽.”
제대로 약속된 암호를 대자 사내들은 경계를 풀고 급히 인영 쪽으로 다가갔다.
불빛에 드러난 인영은 바로 극비 서류를 훔치러 왔다가 혁권이 쏜 총에 맞은 채 호텔을 탈출했던 북한 공작원인 심정열이었다.
얼마나 피를 많이 흘렸는지 입고 있는 셔츠가 온통 시뻘겋게 물이 들고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허억. 헉.”
한쪽 뺨에 작은 상처가 나 있는 사내가 그 모습을 보곤 짧게 혀를 차며 차갑게 말했다.
“어때, 살 수 있겠어?”
그러자 다른 한 명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심정열의 상태를 이리저리 살펴보곤 고개를 들었다.
“출혈이 심하지만 다행히 총알이 몸에 안 박혀 있고 장기도 건드리지 않아서 목숨은 건지겠습니다.”
구조 요청을 받고 급히 지원조를 이끌고 온 정찰총국 소속 대남 공작원 성무태 소좌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이 동무래. 운이 좋구먼. 치료해 주라우.”
“옛.”
부하가 가방에서 응급키트를 꺼내 심정열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반쯤 넝마가 된 셔츠의 팔 부분을 가위로 찢어 벌리곤 주삿바늘을 꽂는데도 제대로 느끼지도 못하는지 눈을 감고 밭은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수혈 팩에서 똑똑 떨어지는 붉은 핏방울이 관을 타고 흘러내렸다.
정신을 차리려면 한참 남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성무태 소좌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아침부터 검게 흐리더니 마침내 비가 내리려는 듯 툭, 툭 지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
심인성의 물음에 부하요원인 최기혁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아직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미간을 좁힌 심인성이 인상을 쓰며 화를 냈다.
“CCTV는 다 확인해 봤어?”
“예.”
“그런데도 동선을 알아내지 못한 거야!”
“그게 서울과 달리 CCTV가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놈이 사각지대를 골라 움직인 것 같습니다.”
“젠장!”
고도의 훈련을 받은 북한 공작원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행동이었다.
대놓고 검문검색을 벌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이대로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놈을 완전히 놓칠지도 몰랐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심인성이 말했다.
“다른 한 놈은?”
“완전 독종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정신이 들자마자 바로 자살을 시도하는 바람에 제대로 신문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심인성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그런 상관의 눈치를 보면서 최기혁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다.
“지금이라도 군경을 동원해서 대대적인 검문검색을 벌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누군 안 그러고 싶은 줄 알아? 하지만 위에서 최대한 조용히 해결하라잖아.”
퉁명스럽게 대꾸에 최기혁은 무안한 얼굴로 입을 닫았다.
사실 지금 가장 짜증이 나고 답답한 사람은 바로 심인성이었다.
저인망 그물을 치듯 사천 시내를 완전히 샅샅이 훑어도 모자랄 판국에 손발을 다 꽁꽁 묶은 채 공작원을 잡으라고 하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정체를 드러낸 북한 공작원이 도망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총상을 입었다고 하니까. 아직 도시를 빠져나가지는 못했을 거야. CCTV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병원과 약국 등에 수상한 사람이 오지 않았는지 탐문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참. 그리고 김혁권에 대해서 추가로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묻자 최기혁이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밀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료가 도착해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 볼까.”
서류철을 건네받아 내용을 살펴본 심인성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허어. 리비아 내전 세력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니…… 이거 얼마 전까지 평범하게 회사를 다녔던 직장인이 맞아?”
“첩보에 의하면 CIA와도 끈이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합니다.”
“확실한 거야?”
“이번 고등 훈련기 구매 중개를 맡은 것도 그거하고 연관인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이거 캐면 캘수록 아주 재미있는 친구구먼.”
흥미로운 표정을 짓는 심인성을 보며 최기혁이 정색을 한 채 이야기를 했다.
“단순히 고등 훈련기 관련 극비 서류를 노린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어떻게 하실 겁니까?”
“흐음.”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잠시 생각을 정리한 심인성은 이내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김혁권은 지금 뭘 하고 있어?”
“부상당한 피해자가 있는 시립 병원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하 한 명이 더 나타나 함께 있습니다.”
“이번에도 외국인이야?”
“아닙니다. 백성균이라고 사기 도박판에 끼어 있던 주먹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건 없나.”
“예.”
“요원들 배치해 뒀지?”
“지시하신 대로 해 놨습니다.”
“그럼 일단 당분간은 그냥 두고 보자고.”
“네.”
아까부터 계속 찝찝한 느낌이 드는 게 어쩐지 이번 사건이 여기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한편 혁권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온 KAI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이런 봉변을 당하시다니 뭐라고 사죄를 드려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최오철 사장의 이야기에 휴게실 소파에 앉은 혁권은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일에 조금 당혹스럽기는 하지만 KAI 측 잘못은 아니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머리를 숙인 최오철 사장이 말을 이었다.
“병원비는 저희 쪽에서 처리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됩니다.”
사양을 했지만 상대가 간곡히 이야기를 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죄송해서 그러니 받아 주십시오.”
“거참.”
그러자 혁권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경찰과 관계 기관에 특별히 부탁을 해 놨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예.”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것이 그리 내키지 않았으나 상황이 이러니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본 상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기는 조금 그렀습니다만 협상은 원래대로 계속 진행하시는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혁권의 말에 KAI 관계자들은 반색을 했다.
“혹시라도 협상을 연기하거나 취소될까 봐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모를까 이런 일로 그냥 돌아갈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자세를 바로 한 최오준 사장이 이야기를 이었다.
“그럼 언제쯤 다시 협상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제가 말씀드린 제안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이 나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흠.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최오준 사장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부와 조율을 빨리 끝내고 조만간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최오준 사장과 KAI 관계자들이 돌아가자 혁권은 병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