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12
212
아테네 외항인 피레에프스 항구 근처에 위치한 혁권 소유의 의류 공장에서는 오전부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철컥철컥.
드드득.
서툴지만 재봉틀 앞에 앉은 리비아 출신 직원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치수에 맞게 자른 원단이 이어 붙여져 옷이 하나씩 만들어졌다.
중간에 그리스인 기술자들이 작업하는 걸 보고 있다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적을 하면서 기술을 가르쳤다.
“거긴 바느질을 좀 더 촘촘하게 해야지 안 그러면 이렇게 금방 뜯어져.”
“예.”
기술자가 주의를 주자 옆에 붙어 있던 통역을 통해 설명을 들은 여직원은 머리를 끄덕이곤 바느질해 놓은 걸 풀고 다시 작업을 했다.
이런 식으로 리비아 출신 직원들은 재봉 기술을 하나씩 익혀 나갔다.
의사소통이 어렵고 처음 해 보는 일이라 금방 손에 익숙해지지 않아 실수도 많았지만, 리비아 출신 직원들은 한 번 하지 않고 열심히 설명을 듣고 재봉틀을 돌렸다.
천천히 공장을 한 바퀴 돌아본 혁권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준비가 잘되어 있는 모습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들 제법 일에 익숙해진 것 같군.”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중년인이 머리를 살짝 숙이면서 말을 받았다.
“처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도 중요한 작업은 그리스인 직원들이 다 맡아서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중년인의 이름은 에시드로 리비아에 있을 때 봉제 공장을 다녔던 경력이 있어 그가 공장장 자리를 맡긴 이였다.
“그래도 재봉틀은 물론이고 가위질도 제대로 못하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
정말 그때를 생각하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보다 안전하고 살기 좋은 그리스에서 뿌리를 내리고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에 리비아 출신 직원들이 간절한 마음을 갖고 밤낮으로 기술을 배우지 않았다면 오더를 받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터였다.
“저쪽에서 보내 준 디자인 견본은 확인했겠지?”
“예. 다행히 복잡하지 않고 심플한 디자인이라서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거 잘됐군. 원단을 넉넉하게 주문했으니까 조금이라도 불량이 난 건 아까워하지 말고 바로 폐기하도록 해.”
혁권의 지시에 에시드 공장장이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렇게 하면 자칫 손해가 날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어차피 이번 오더는 이윤을 남기기보다 직원들이 일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에 더 비중을 둔다고 생각해.”
“알겠습니다.”
숙련되지 않은 직원들을 데리고 주문받은 물건을 만들어 내야 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던 에시드는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공장을 둘러보고 숙소로 사용하고 있는 콘도로 돌아오자 자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씀하신 걸 알아봤습니다.”
“그래, 말해 봐.”
혁권은 냉장고에서 꺼낸 캔 맥주를 들고 소파에 편하게 앉아 듣는 자세를 취했다.
“먼저 제일 규모가 큰 PMC(Private Military Company:민간군사기업)인 Xe사와 접촉을 해 봤습니다.”
“Xe?”
“예전에 2차 이라크 전쟁 때 활약했던 블랙워터사가 이름을 바꾼 곳이 바로 Xe입니다.”
“그렇군.”
네이비 실 출신들을 주축으로 미국에서 만들어진 블랙워터는 대표적인 거대 PMC로 자체적으로 장갑차를 비롯한 각종 중화기는 물론이고 무장 헬기와 수송기까지 보유한 강력한 전투 집단이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액수만 맞춰 주면 장비와 인력은 얼마든지 동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백 단위가 넘어가더라도?”
“예. 그쪽 담당자의 말이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용병 숫자만 3천 명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엄청나게 많은 숫자에 그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 정도면 경비 회사가 아니라 그냥 군대군.”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한 명 한 명이 각국의 특수부대에서 단련된 정예들이니, 고작 해 봐야 자동소총과 수류탄이 전부인 반군은 상대도 안 될 겁니다.”
“그럴 거야.”
혁권은 수긍하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특수부대인 공수특전단에서 군 생활을 했었기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특수부대원이 얼마나 강한 전투력을 발휘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돈이라는 거군.”
“기본적으로 용병인 만큼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갈 겁니다. 그리고 보스께서 원하시는 중화기까지 포함하면 더 뛸 테고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자말이 진지한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아무리 반군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이라고 해도 엄연히 시에라리온의 영토인 만큼 프리타운 정부의 허락이 없다면 자칫 불법 침략이 되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알고 있어. 일을 벌이기 전에 프리타운 정부와 협상을 해야겠지.”
아무리 반군을 상대한다지만 자국 안에 무장 세력이 들어와서 전투를 벌이는 걸 달가워할 정부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혁권은 프리타운 정부를 설득할 자신감이 있었다.
“중요한 문제니까 다른 회사하고도 접촉을 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혁권은 캔 맥주로 목을 한 번 축인 뒤 다시 물었다.
“이집트 쪽 상황은 어때?”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자말이 표정을 살짝 굳힌 채 계속 말했다.
“저유가 상황에서 계속된 테러로 인해 관광 산업까지 위축되는 바람에 경제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재정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정부에서 주던 각종 보조금을 취소하거나 대폭 줄인다는 이야기까지 있어서 분위기가 갈수록 안 좋아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 태일그룹에서 진행 중인 아파트 단지 공사에도 안 좋은 영향이 있겠군.”
“그렇지 않아도 보스께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어쩌면 공사가 중단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발주처인 이집트 정부에서 공사비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래?”
혁권이 놀란 듯 되묻자 자말이 진지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IMF에 재정 지원을 요청한 처지에 당장 급하지 않은 공사비를 지급할 여력이 없는 거겠지요. 알아보니 공사비 지급이 되지 않은 것이 벌써 꽤 됐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집트 정부의 보증을 믿고 자체적으로 자금을 충당하며 공사를 진행해 왔지만, 아시다시피 사정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보니까 더 이상 미수금을 늘리는 것이 부담스러워진 것 같습니다.”
설명을 들은 혁권은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나 같아도 그런 상태에서 계속 공사를 진행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
“그 때문인지 자재 운송도 지난번에 간 것 이후로 아직 일정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벌써 보름이 넘지 않았나?”
“이십 일이 지났습니다.”
보통 이 주일에 한 번씩 공사에 필요한 건설 자재들을 운반했던 걸 생각하면 벌써 훨씬 전에 일정이 나왔어야 됐다.
그렇지 않다는 건 자말의 이야기대로 아파트 공사 현장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입맛을 다시며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자재 운반을 핑계로 밀수를 해서 꽤 짭짭한 수입을 거뒀는데 아깝게 됐군.”
“그래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밀수를 통해 이집트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만만치 않았기에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물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나?”
“그동안 자재를 운반하면서 세관 관리들하고 친분을 쌓아 뒀으니 그걸 활용해서 밀수품을 통과시키는 겁니다.”
“가능할까?”
“돈만 충분히 쥐여 준다면 분명 눈을 감아 줄 겁니다.”
자신 있는 대답에 한쪽 손으로 턱을 쓸면서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해 봐.”
“예.”
제 의견이 받아들여지자 자말의 안색이 밝아졌다.
며칠 뒤 혁권은 시에라리온의 수도인 프리타운에 발을 디뎠다.
몇 달 만에 다시 돌아온 프리타운은 금방이라도 반군한테 도시가 함락될 것처럼 혼란스러웠던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고 겉으로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공항은 물론이고 도시 곳곳에 장갑 차량과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는 것이 여전히 긴장된 상황을 알려 줬다.
알아바디와 백성균에 더해 부상을 완전히 치료한 하킴까지 합류하면서 수행원은 세 명으로 늘어났다.
원래는 두 명 정도만 데리고 다니려고 했었다. 하지만 벌써 몇 번이나 위험한 상황을 겪었고, 아직 이슬람형제단이 내건 현상금이 취소되지 않았다는 걸 들며 자말이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셋을 다 데려가기로 했다.
그 외에도 동행인이 더 있었는데 김덕현 전무와 인수한 TC인터내셔널 관리 부장이었던 홍선호가 로마에서 합류했다.
두 사람은 TC인터내셔널 이름으로 체결된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권을 승계하고 본격적인 개발에 앞서 현지 조사를 하기 위해서 온 거였다.
“후우. 엄청 덥군요.”
실내였지만 에어컨 시설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찌는 듯한 더위가 그대로 느껴지자 이미 입고 있는 와이셔츠가 흠뻑 땀으로 젖은 홍선호는 연신 손부채질을 해 댔다.
“아프리카는 처음이라고 했지?”
그런 모습을 본 혁권이 피식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묻자 홍선호는 얼른 자세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예.”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조금 있으면 금방 익숙해질 거야.”
“아. 네.”
까마득한 상사의 말이었기에 애써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지만 홍선호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이 더위에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입국장으로 나오자 반가운 얼굴의 현지인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지난번에 왔을 때 통역 겸 길 안내를 맡았던 은완코였다.
앞으로 다가와 꾸벅 머리를 숙이는 은완코를 보며 그는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다시 보니 반갑군.”
“보스 덕분입니다.”
총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걸 중간에 버리지 않고 끝까지 데려와 병원에서 치료까지 시켜 준 은혜를 은완코는 잊지 않았기에 깍듯하게 그를 대했다.
“몸은 괜찮나?”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후유증 없이 건강해 보이는 모습에 그는 머리를 끄덕였다.
“다행이군.”
공항 청사를 빠져나온 일행은 준비되어 있던 승합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갔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혁권이 운전대를 잡은 은완코를 보며 물었다.
“요즘 이곳 분위기를 어때?”
그러자 은완코가 약간 얼굴을 굳히며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던 반군의 공격을 겨우 막아 내기는 했지만, 한때 프리타운에서 33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워털루까지 빼앗겼을 정도니까요.”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혁권과 달리 이곳이 처음인 김덕현 전무와 홍선호는 긴장한 얼굴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해외 자원 개발을 오랫동안 해 와서 이런저런 경험이 풍부한 김덕현 전무는 그래도 차분한 태도인 것과 달리 홍선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살짝 겁이 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북부 지역을 방어하던 움부야 장군의 2군단이 급히 달려와 반군 측면을 공격하면서 자금은 마시아카Masiaka까지 물러나 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코이두를 비롯한 서부 지역 대부분이 반군 손에 넘어갔고, 당장 위기에는 벗어났지만 프리타운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은완코의 말이 사실이라면 시에라리온 국토의 절반가량이 반군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뜻이 됐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김덕현 전무와 홍성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승합차 안 분위기도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