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58
258
잠시 뒤 부하들은 아이스하키에서 공 대신 사용하는 퍽Puck처럼 생긴 고체 연료를 가져와서 트럭 짐칸 한가운데 여러 개를 커다란 깡통 안에 쌓아 두고 불을 붙였다.
화르륵.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면서 조금씩 훈훈한 온기가 느껴지자 오들오들 떨던 난민들의 표정이 한결 좋아졌다.
어디서 났는지 주전자나 냄비에 빗물을 받아서는 불에 올려놨다.
따뜻한 수증기가 퍼지자 짐칸 안은 더욱 온기가 감돌았다.
그걸 본 혁권은 가지고 있던 커피와 코코아 티백을 나눠 줘서 마실 수 있도록 해 줬다.
불을 쬐고 따뜻한 차가 몸 안으로 들어가자 난민들은 어느 정도 체온을 유지하며 갑자기 찾아온 추위를 그럭저럭 견뎌 낼 수 있었다.
그가 사륜구동 차 뒷좌석에 앉아 지도를 살펴보고 있을 때 하킴이 차문을 열더니 스테인 글라스 컵을 하나 내밀었다.
“커피 한 잔 드십시오.”
“아. 고마워.”
혁권은 컵을 받아 들며 하킴을 봤다.
계속 밖에 나가 있어서 그런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자네도 안에 들어와서 조금 쉬어.”
“괜찮습니다.”
“그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쩔 거야? 그럼 잠깐 옷이라도 말리도록 해.”
머뭇거리던 하킴은 이내 머리를 끄덕이며 조수석에 탔다.
“시동을 걸고 히터를 좀 틀어.”
“예.”
하킴이 손을 뻗어 운전대 옆에 꽂아 둔 열쇠를 돌려 시동을 걸고는 히터를 틀었다.
얼마쯤 기다리자 송풍구에서 따뜻한 히터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금방 차 안 공기가 훈훈해진 가운데 그는 지도를 접어 한쪽에 놔두면서 말했다.
“사람들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왜,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하킴이 살짝 얼굴을 굳히면서 대답했다.
“반군 부상병들 가운데 두 명이 숨졌습니다.”
“…….”
잠시 말이 없던 혁권은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처음부터 부상이 심한 중상자들을 골라 태웠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국경을 바로 앞에 두고 가다니 안타깝구먼.”
“그러게 말입니다.”
하킴이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했다.
“시신은 어떻게 했어?”
“일단 잘 수습해서 놔 뒀습니다.”
“그래. 여기에 그냥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국경을 넘어가게 되면 사람을 써서 장례라도 치를 수 있게 해 줘.”
“예.”
그리고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여전히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약간 어색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혁권이 몸을 살짝 들썩여 자세를 고치려던 순간, 품 안에서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벨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바로 위성전화기를 꺼내 든 그는 굵은 안테나를 꺼내 세우고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익숙한 샌더슨의 목소리가 귀에 들렸다.
-나요. 샌더슨.
그다지 반갑지 않은 전화에 그의 대답도 자연스럽게 퉁명스러웠다.
“무슨 일이오?”
-도시를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킬리스Kilis로 국경을 넘어 올 거요?
“요구한 대로 화물을 알레포에 가져다줬으니 내가 어디로 가든 그쪽에서 상관할 일이 아니지 않소?”
-그냥 무사히 잘 돌아오는지 궁금해서 묻는 말인데, 그렇게 까칠한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소.
능청스러운 이야기에 상대가 아무런 용건도 없이 전화할 리가 없다는 걸 아는 혁권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대화에 그는 이맛살을 좁혔다.
-가능하면 킬리스로 오시오.
“왜 그래야 되는 거요?”
-아는지 모르겠지만 어제부로 터키 정부가 군부대를 대규모로 배치하며 시리아 국경을 모두 폐쇄했소.
출발 전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 조치가 취해졌다는 소식에 혁권은 낮게 침음을 흘렸다.
“으음.”
안 그래도 함께 데려가는 난민들 때문에 국경을 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길이 막혔다고 하니 정말 난감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샌더슨이 능글거리며 말했다.
-알레포에서 난민들을 탈출시켜서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그들을 데리고 무사히 국경을 넘으려면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소.
“…….”
샌더슨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알레포에서 데려고 나온 난민이라는 걸 눈치챈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꿍꿍이오?”
-전쟁을 피해 도망쳐 나온 난민들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도와주려는 거요. 더불어서 이들을 통해 지옥 같은 알레포의 참상을 해외 주요 언론에 널리 알릴 수 있다면 내전을 빨리 종결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소.
기껏 탈출시킨 난민들을 러시아와 시리아 정부군의 잔인함을 홍보하는 도구로 써먹으려는 CIA의 속셈에 그는 내심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리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어찌 됐건 이용해 먹으려면 난민들을 안전한 곳까지 무사히 데려와야 했으니 CIA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당장 폐쇄된 국경도 CIA와 미국 정부가 적극 나서 준다면 어렵지 않게 열어 줄 수 있었다.
차후에도 추방의 위험에서 벗어나 안정적으로 난민촌에 머물거나 제3국으로 넘어가 정착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다.
그런 것들을 고려한다면 난민들 입장에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그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킬리스로 가면 안전하게 국경을 넘어갈 수 있는 것이오?”
-이미 조치를 취해 놨으니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요.
현재 위치한 앗자즈에서 가까운 데다 어차피 그쪽 방향으로 국경을 지나갈 생각이었기에 그는 바로 결정을 내렸다.
“늦어도 내일 정오에는 국경에 도착할 거요.”
-알겠소. 그럼 그렇게 알고 맞이할 준비를 해 놓겠소.
위성전화기 너머에서 샌더슨이 이를 드러내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깜빡 잠이 들었던 혁권은 누군가 몸을 흔들어 깨우는 느낌에 눈을 떴다.
“보스, 어서 일어나 보십시오.”
차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총성에 그는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정부군 놈들이 쫓아오기라도 한 거야.”
“아닙니다.”
“그럼 저 소리는 뭐야?”
그러자 하킴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IS가 언덕 너머에 있는 난민촌에 난입해 마구 총을 쏴 대고 있습니다.”
“난민촌이라니?”
뜬금없는 이야기에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하킴이 바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직접 보시죠.”
사륜구동 차 밖으로 나오자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쏟아져 내리던 비가 어느새 다 그치고 보석처럼 아름다운 별들이 떠 있었다.
부하들이 굳은 얼굴로 각자 무기를 든 채 대기하고 있는 가운데 날카로운 총소리가 더욱 명확하게 들렸다.
“이쪽입니다.”
하킴을 따라 도로 한쪽 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언덕을 올라가자 뜻밖의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버려진 올리브 농장에 터키로 들어가려는 시리아 난민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텐트촌이 있었다.
규모도 꽤 커서 얼핏 봐도 500~600명 이상의 난민들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리 비가 장대같이 쏟아져서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지만 채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난민촌이 있다는 걸 몰랐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민촌에는 비명과 총성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는데 쌍안경을 꺼내 자세히 살펴보자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일단의 사내들이 자동소총을 마구 쏴 대면서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었다.
때마침 비가 내린 뒤에 달빛이 아주 밝아 난민촌 상황이 아주 잘 보였다.
한쪽에 아무렇게나 세워진 차량에 검은색 IS 깃발이 바람에 꽂혀 나부끼는 걸 확인한 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궁색한 난민들을 괴롭혀 봤자 별로 얻을 것이 없었기에 IS 대원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자 하킴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젊은 여자와 아이 들을 노리는 걸 겁니다.”
“무슨 소리야?”
쌍안경에서 눈을 뗀 혁권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하킴이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IS가 젊은 여자들을 잡아다가 성노예로 쓰고 아이들을 세뇌시켜 소년병으로 전투에 투입하거나 자살 폭탄 테러에 이용한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거기다 최근에는 서방 세계의 봉쇄와 공격에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원유 수출이 막히자, 불법 장기臟器 매매까지 손을 대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장기 매매까지 한다고?”
눈을 부릅뜨며 그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전투 중에 잡힌 포로는 물론이고 저렇게 난민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장기를 적출한다고 합니다.”
“정말 단단히 미쳤군.”
아무리 극단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벌이는 종교적인 광신 단체이고 상황이 안 좋다지만, 이런 반인륜적인 범죄까지 저지르다니 절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니 아사드 정권을 반대해서 일어선 같은 반군 내에서도 IS를 배척하고 것이지 않겠습니까.”
실제로도 시리아 반군 세력 내에서도 IS는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채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시리아 정부군과 맞서고 있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IS였다.
이러다 보니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들이 강압적인 철권통치로 국민을 탄압하는 아사드 정권을 비난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반군 세력을 돕는 데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미국과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의 복잡한 이해관계가 만들어지면서 금방 끝날 것만 같았던 시리아 내전이 어느덧 5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정부군은 반군 세력을 토벌하기 위해서 병원과 민가를 가리지 않은 채 무차별 폭격을 퍼붓고, 온갖 반인륜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고 벌이는 IS까지 시리아 주민들한테는 삶 자체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혁권이 굳은 얼굴로 난민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하킴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보스, 마침 비도 다 그쳤으니까 놈들이 저희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 어서 여길 떠나도록 하지요.”
지금 저들하고 부딪쳐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혁권은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보스.”
하킴이 재차 재촉을 하자 잠시 고심에 찬 표정을 짓던 혁권은 이내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부하들을 이쪽으로 데려와.”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이대로 저 사람들이 IS에 끌려가면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뻔히 아는데, 이대로 모르는 척 외면할 수는 없잖아.”
단호한 말투에 하킴은 더 만류를 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일단 한번 그가 결정을 내리면 웬만해서는 뜻을 바꾸지 않는 걸 알기도 했지만, 난민촌을 유린하고 있는 IS 대원들의 숫자가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다 합쳐 봐야 20명 남짓밖에 안 됐는데, 그 정도면 기습 공격을 통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었다.
만약 적이 조금만 더 많았더라면 어떻게든 혁권을 설득하려고 했을 것이다.
하킴이 무전기로 명령을 전달하는 동안 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IS가 한창 분탕질을 쳐 대고 있는 난민촌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부하들이 도착하자 그는 빠르게 작전을 설명했다.
“놈들이 약탈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난민촌 뒤로 돌아가서 우선 차량을 지키는 적을 처리하고 바로 이어서 나머지를 소탕하는 거야. 자칫 난전이 벌어지면 우리뿐만 아니라 죄 없는 난민들까지 다칠 수 있으니까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작전을 끝낼 수 있도록 해.”
“알겠습니다.”
“예.”
전투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들이라서 그런지 갑작스럽게 싸움을 벌이게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들 당황하거나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트럭에 남아 있는 사람들한테는 내가 지시한 대로 말을 해 뒀겠지?”
“네. 신호탄이 터지면 그대로 트럭을 몰고 국경 쪽으로 달아나라고 했습니다.”
“잘했어.”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었다.
“좋아. 그럼 시작하자고.”
혁권이 무릎에 올려 둔 자동소총을 챙겨 일어서자 흙바닥에 둥글게 앉아 있던 부하들도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