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62
262
입구 쪽으로 멀어지는 혁권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샌더슨은 이내 손을 뻗어 다이아몬드 원석을 움켜쥐었다.
혁권이 호텔 밖으로 나오자 검은색 벤츠 승용차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앞에 멈춰 서더니 하킴이 운전석에서 내려 뒷문을 열고 비켜섰다.
자말과 함께 그가 뒷좌석에 들어가자 하킴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는 승용차에 탔다.
벤츠 승용차는 천천히 호텔을 빠져나와 아테네로 시내로 향했다.
“CIA가 어떤 선택을 할까요?”
자말이 걱정스럽게 묻자 방금 전 수영장에서 보여 준 것과 달리 약간 굳은 얼굴로 혁권이 말했다.
“글쎄.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CIA 입장에서도 보헤멘이 눈엣가시 같을 거라는 거야.”
“그렇긴 하겠지만, 너무 성급하게 움직인 것이 아닌지 염려스럽습니다.”
“아니, 어떤 식으로 결정이 나든 CIA와 부딪치는 걸 피할 수는 없었을 테니. 아예 처음부터 다 털어놓는 것이 나아. 그럼 최소한 적인지 아군인지는 구분할 수 있잖아.”
“그러다 CIA 측에서 반대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그땐 다른 수를 써야지.”
혁권은 나름 생각이 있는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말은 여전히 신경 쓰이는 듯한 표정이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무시하면서 혁권은 차창을 내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을 만끽하듯 눈을 천천히 감았다.
버지니아 주 랭리에 위치한 CIA 본부는 24시간 내내 불이 꺼지는 법이 없었다.
CIA 본부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국장실 소파에 방금 비행기를 타고 아테네에서 도착한 샌더슨이 앉아 있었다.
“블랙레빗이라고 했나?”
“네.”
“그자가 드비어스사 회장인 보헤멘을 제거하겠다고 했다는 거지?”
러셀 국장의 물음에 샌더슨이 약간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것 참.”
CIA에서 블랙레빗이라는 암호명을 붙인 혁권에 대한 파일을 직접 살펴본 러셀 국장은 꽤 흥미로운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밀수업자에 불과한 자가 보헤멘 같은 거대 카르텔 기업의 수장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에 황당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미친놈 아니야?”
그러자 샌더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물급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실력이 있는 자입니다. 이번 알레포 작전도 블랙레빗이 처리한 겁니다.”
“그게 정말이야?”
“예.”
백악관에서 직접 지시가 내려왔던 거였기에 알레포 작전이라면 러셀 국장도 잘 알고 있었다.
헤쳐 나가야 될 장애물이 많아 실패 가능성이 아주 높은 작전이었는데, 그걸 훌륭하게 끝낸 사람이 바로 혁권이었다니 러셀 국장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가 드비어스사가 거래하는 블러드 다이아몬드가 IS를 비롯한 테러 조직들의 새로운 자금원이 되고 있기에 이쯤에서 특단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샌더슨의 이야기에 러셀 국장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CIA 입장에서도 드비어스사는 상당한 골칫거리였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로 매년 막대한 자금이 아프리카 반군들에 흘러가 정세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워싱턴 정계에 깔린 드비어스사의 인맥 때문에 쉽사리 건드리지 못하고 지켜만 봐 왔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미국의 최대 적인 IS와 연결된 급진 테러 단체와도 거래를 하는 것이 포착되면서 그냥 봐줄 수 있는 선을 넘고 있었다.
한쪽 손을 들어 턱을 매만지던 러셀 국장은 오른편에 앉아 있던 라이언 대테러 팀장을 쳐다봤다.
“라이언 팀장, 자네 생각은 어때?”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라이언 팀장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신중한 태도를 보일 거라 생각했던 라이언 팀장이 뜻밖의 대답을 하자 러셀 국장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샌더슨이 이야기한 대로 보헤멘 회장은 저희가 용인할 수 있는 적정선을 넘었습니다. 올해에만 블러디 다이아몬드 거래로 테러 조직에 흘러들어 간 자금이 2억 달러 이상입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액수에 러셀 국장은 이맛살을 찡그렸다.
“뭐가 그리 많은 거야?”
“대부분 최근 내전이 격해진 시에라리온을 비롯한 아프리카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반군들이 무기 구입에 돈을 쓰기도 하지만 상당액이 테러 단체로 흘러가고 있는데, 얼마 전에 벌어졌던 암스테르담 총격 사건에도 이쪽 자금 일부가 이용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확실한 거야?”
정색을 하며 묻자 라이언 팀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정보입니다.”
“으음.”
드비어스사가 건넨 거래 대금이 실제로 테러에 활용된 걸 확인한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이대로 놔뒀다가는 자칫 충분한 자금을 손에 쥔 테러 조직들이 제2의 9.11테러를 벌이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에 의해서 저질러진 9.11 테러는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 벌인 동시다발 자살 테러로 뉴욕에 있는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과 알링턴의 미 국방부 펜타곤이 공격을 받은 초유의 사건이었다.
사망자만 3천 명에 달하고 부상자는 그 두 배인 6,291명이나 되는 대참사로 미국 본토가 공격받은 최초의 일이었다.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낸 사건이자 잊지 못할 커다란 치욕이었다.
정색을 한 러셀 국장은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절대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그러기 위해서라도 테러 조직의 자금줄이 되고 있는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를 막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려면 보헤멘 회장을 제거해야 된다, 이건가?”
“예. 거기다가 보헤멘 회장을 없애면 생길 수 있는 이득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게 뭐지?”
처음과 달리 러셀 국장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였다.
“보헤멘 회장이 죽은 뒤 새롭게 드비어스사의 수장을 선출할 때 관여해서 국제 다이아몬드 시장에 영향력을 확보하는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이아몬드를 통한 범죄 조직들의 자금 움직임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러셀 국장은 눈을 번득이며 무릎을 쳤다.
“맞아. 그런 이득이 있었군. 내가 왜 진작 이걸 생각해 내지 못했지.”
“설사 일이 잘못된다고 해도 저희가 직접 관여하지 않았기에 책임질 필요도 없으니 그야말로 최상의 선택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은 러셀 국장은 시선을 샌더슨에게 돌렸다.
“샌더슨.”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보기에 블랙레빗이 보헤멘 회장을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나?”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킨 샌더슨은 상관인 러셀 국장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이번에 알레포에서 봤듯이 마음먹은 대로 일을 해낼 겁니다.”
크게 머리를 끄덕인 러셀 국장은 결정을 내렸다.
“좋아. 어쩌면 때가 됐는지도 모르겠군. 작전을 승인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대신 이번 일이 외부로 드러나지 않게 철저하게 비밀을 지켜야 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러셀 국장의 말에 두 사람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아무리 세계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거래하며 테러 조직의 자금줄 노릇을 하고 있다지만, 민간 기업의 수장을 암살하는 데 관여했다는 것이 드러나면 CIA 역시 상당한 비난 여론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기록에도 남기지 않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 작전으로 진행해야만 됐다.
지이잉. 지이잉.
진동이 울리자 안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혁권은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하시오.”
-방금 결정이 떨어졌소. 사흘 뒤 런던에서 봅시다.
스마트폰을 통해 들리는 샌더슨의 목소리에 그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말했다.
“도와주기로 한 거요.”
-운이 좋은 줄 아시오. 일이 잘못됐다면 전화가 아니라 킬러가 그쪽을 찾아 갔을 거요.
“그럼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지지 않고 혁권이 맞받아치자 상대는 크게 웃다가 이내 정색을 했다.
-자신감을 가지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게 그쪽 장점이지만 그게 안 통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도 명심하시오. 만약 그러지 않으면 언젠가는 후회할 날이 있을 거요.
의미심장한 이야기에 그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럼 런던에서 봅시다.
통화를 끝낸 혁권이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고 있자 옆에 있던 자말이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이 잘 안 된 겁니까?”
누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대충 분위기로 짐작한 자말의 물음에 그는 스마트폰을 집어넣으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내일 런던으로 갈 거니까 그렇게 알고 준비를 해 놔.”
“그럼?”
자말이 눈을 반짝이며 그를 봤다.
“샌더슨과 만나기로 했어.”
그 한마디에 상황을 바로 파악한 자말은 얼굴을 활짝 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급히 자말이 나가고 방에 혼자 남게 된 혁권은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발코니로 나갔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헝클며 지나갔다.
멀리 있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는 금방 샌더슨이 한 이야기를 천천히 곱씹었다.
다음 날 혁권은 부하들을 데리고 아테네에서 프랑스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향했다.
알레포에서 부상을 입은 백성균을 제외하고 자말과 알아바디, 하킴, 라미, 아미르까지 총 다섯 명뿐인 단출한 일행이었다.
모두 다 처음 이쪽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함께했던 이들로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부하로만 고른 결과였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존 도너입니다.”
혁권은 CIA 측에서 준비해 준 위조 여권을 내밀고 가명을 입에 담았다.
중국계 미국인이라는 설정으로, 일리노이 주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되어 있어 중국어는 한마디도 못해도 된다며 샌더슨이 쓸데없는 설명을 덧붙여 준 바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존이라니 너무 성의 없는 이름이라며 혁권은 속으로 툴툴거렸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는 직원이 사진과 혁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곧이어 방문 목적을 물었다.
“런던에는 무슨 일 때문에 오셨습니까?”
“비즈니스입니다. 거래처와 상담할 일이 있어서…….”
만약을 위해 당연히 가짜 회사 명함도 가지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것까진 요구할 생각이 없는 듯 직원이 여권을 돌려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잉글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스터 도너.”
그것으로 입국 심사는 끝이었다.
가장 어려운 관문을 손쉽게 지나치자 그 뒤는 공항을 나가는 것뿐이었다.
런던의 대표적인 공항답게 항상 사람들로 꽉 차 있는 메인 로비에서 나머지 일행과 합류한 혁권은 공항버스와 택시를 타려는 인파로 긴 줄이 늘어선 사이를 헤치고 도로변으로 나왔다.
그리고 타이밍을 딱 맞춰 알아바디가 운전하는 회색 밴이 그 앞에 정차했다.
먼저 나가서 차를 준비해 오라 일렀더니 알아서 짐까지 다 실을 수 있을 만한 커다란 밴을 렌트해 온 모양이었다.
일행이 모두 올라타자 밴은 엔진 소리를 내면서 부드럽게 공항 청사를 빠져나와 시내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