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71
271
서부 힐링턴 자치구에 위치한 런던 히드로 국제공항London Heathrow Airport.
드넓은 활주로 한쪽에 세워진 커다란 격납고 안으로 검은색 고급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섰다.
격납고에는 며칠 전 샌더슨을 태우고 갔던 흰색 걸프스트림 G550 비즈니스 제트기가 매끈하게 빠진 동체를 뽐내면서 서 있었다.
마르케타 국장이 뒷좌석에서 내리자 긴 모직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흑인 사내가 앞으로 다가왔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힐끔 고개를 들어 전용기를 쳐다본 마르케타 국장은 수행원 한 명만 대동한 채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트랩을 밟고 기체 안으로 들어가자 CIA 수장인 러셀 국장이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상대를 반겼다.
“어서 오시오.”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심각했기에 마르케타 국장은 굳은 얼굴로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군요.”
“아니오. 그것보다 며칠 전 런던에서 있었던 일은 심히 유감이오.”
“고맙습니다.”
“자, 일단 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눕시다.”
수행원들을 모두 배제한 채 두 사람은 기체 한쪽에 있는 소파로 가서 마주 앉았다.
“괜찮은 위스키가 있는데 한잔하시겠소?”
“됐습니다.”
상대가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으며 사양하자 러셀 국장은 혼자만 얼음을 넣은 온더록스 잔에 위스키를 조금 채웠다.
“사건을 해결하느라 정신없이 바쁠 텐데 꼭 나눠야 된다는 중요한 이야기가 뭐요?”
그러자 마르케타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미스터 존슨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
혁권이 가명으로 쓰는 이름이 마르케타의 입에서 나오자 러셀은 순간 멈칫했지만 능구렁이답게 금방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처했다.
“글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그게 누구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마르케타는 작게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알레포에서 그쪽 일을 해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른다니, 이거 참 이상한 일이군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워낙 많은 협력자들이 있다 보니 하나하나 파악하는 것이 쉽지가 않소이다.”
상대의 공격을 가볍게 넘긴 러셀 국장은 태연한 겉모습과 달리 MI5가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는 바짝 긴장했다.
“그러면 이자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파고들어도 상관없겠소?”
“뭐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해도 상관없소이다.”
흔쾌히 대답했지만 뒤로 증거를 없애기 위해서 CIA에서 혁권을 먼저 제거하려 들 거라는 걸 마르케타 국장은 알고 있었다.
비정해 보여도 그래야지만 이쪽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입장이 바뀐다면 마르케타 역시 주저 없이 똑같은 행동을 취할 터였다.
속마음을 최대한 감췄지만 이걸로 CIA가 이번 일에 관련이 있다는 걸 확신하게 된 마르케타는 더 이상 상대를 떠보지 않고 오늘 만나자고 한 진짜 용건을 꺼냈다.
“이번에 벌어진 일이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를 둘러싸고 벌어진 복수극이고, 거기에 CIA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소.”
갑자기 핵심을 훅 찌르고 들어오자 러셀은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여러 가지로 입장이 곤란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상상력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니오? 당장 방금 한 발언을 취소하지 않는다면 양국 간의 외교 관계에 상당한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소이다!”
허점을 보이지 않으려는지 러셀 국장은 필요 이상으로 발끈하면서 으르렁거렸다.
그와 반대로 마르케타는 같이 날을 세우지 않고 오히려 느긋한 모습을 보였다.
“정말 이 일을 공론화시켜도 괜찮다면 그렇게 하지요. 나야 여기서 더 잃을 것이 없다는 걸 그쪽도 잘 알고 있을 거요.”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는 걸 느낀 러셀은 미간을 찡그린 채 낮게 침음을 흘렸다.
“으음.”
마르케타의 말대로 이미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는 처지였기에 양국이 큰 혼란에 빠지든 말든 얼마든지 손에 쥔 폭탄을 터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러셀은 아니었다.
CIA 국장직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이런 일로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대답을 기다리는 마르케타를 바라보면서 빠르게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러셀은 이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것이 뭐요?”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말해 보시오.”
“이번 일에 관여한 진짜 목적이 무엇이오?”
“…….”
러셀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손에 든 온더록스 잔을 가볍게 흔들었다.
반쯤 녹은 얼음이 달각 소리를 내며 유리에 부딪히는 것을 곁눈으로 흘깃 쳐다본 마르케타가 금방 다시 물었다.
“블러드 다이아몬드 때문이오?”
그러자 러셀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역시…….”
마르케타는 미간을 좁히며 한탄과도 같은 숨을 내뱉었다.
“사실 그동안 보헤멘 회장이 우리의 경고를 수차례 무시한 채 블러드 다이아몬드 거래를 계속해 왔고, 그렇게 거래된 막대한 자금이 아프리카 반군 세력과 IS를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 조직에 흘러간 걸 그쪽도 부인하지 못할 거요.”
마르케타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그래서, 보헤멘 회장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우리 잘못이라는 것이오?”
“그럴 리가 있겠소. 다만 손을 쓸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걸 말해 두는 거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일을 해결하는 건 우리도 원하지 않았소.”
어쩔 수 없이 관련성을 인정하면서도 러셀 국장은 모든 책임을 혁권한테 덮어씌우는 태도를 취했다.
러셀의 시커먼 속내에 마르케타는 확실히 선을 그으면서 상대를 압박했다.
“애초에 그쪽이 놈을 돕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 아니오!”
반박할 말은 많았지만 여기서 상대와 날을 세워 봤자 좋을 것이 없었기에 러셀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마르케타 역시 마음 같아서는 런던에서 몰래 공작을 벌여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러셀 국장의 얼굴에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지만, 그러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애써 화를 가라앉혔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마르케타는 상대를 바라보면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지금은 어떻게든 수습을 하는 것이 우선이니 일단 이 문제는 덮어 두도록 하겠소.”
러셀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쪽 말마따나 이번 일이 의도치 않게 커진 거라면 양국 관계를 생각해서 시끄럽게 떠들어 봤자 서로 좋을 것이 없을 테니까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합시다.”
“진심이오?”
“솔직히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테러라고 언론에 다 나간 상황에서 또다시 일이 꼬인다면 나 역시 곤란한 입장이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대충 의도를 파악한 러셀은 비릿한 미소로 대꾸했다.
“상황에 따라선 국가를 위해 진실을 가려야 할 때가 있는 법 아니겠소.”
“어쨌든 원래 하던 이야기나 계속하십시다. 내각과 국민들을 납득시키려면 적당한 희생양이 필요할 텐데, 그건 CIA에서 만들어 주시오.”
손바닥으로 턱을 쓸면서 잠시 생각한 러셀이 말했다.
“최근 프랑스와 독일에서 테러를 벌인 전적도 있으니 IS가 벌인 걸로 하면 그럴싸하게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떻소?”
“나쁘지 않은 것 같군.”
IS라면 서방 세계의 공적과도 같은 데다 이미 몇 년 전에 런던에서 대규모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기에, 조금만 정보를 흘려도 금방 여론이 그쪽으로 쏠릴 게 분명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도록 하겠소.”
머리를 끄덕인 마르케타는 몸을 뒤로 기대고 상대를 봤다.
“그리고 일단 덮어 두기로 하긴 했지만, 그쪽에서 잘못한 일인 만큼 마땅히 적당한 보상이 있어야 되지 않나 싶은데…….”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소?”
이맛살을 찌푸리며 러셀이 묻자 마르케타는 담담한 얼굴로 원하는 걸 이야기했다.
“드비어스사에서 얻으려고 했던 이권의 절반.”
러셀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설마 단순히 테러 조직에 자금이 흘러들어 가는 걸 차단하려고 손을 썼다는 이야기를 내가 곧이곧대로 믿을 줄 알았소? 사람을 너무 순진하게 보셨군.”
목소리는 담담했으나 눈동자는 잘 벼린 칼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어차피 내 도움이 없으면 이권이고 뭐고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 아닌가?”
그러자 러셀이 온더록스 잔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손등에 힘줄이 올라올 정도로 힘을 주고 있던 그는 곧 잔을 내려놓고는 찡그려진 미간을 풀면서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열고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해 주겠소.”
“잘됐군.”
마르케타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일어섰다.
“그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알고, 난 이만 가 보겠소.”
딱히 별다른 인사도 없이 그는 러셀을 지나쳐 전용기에서 내렸다.
동그란 방풍창 너머로 마르케타가 차에 타는 모습을 시선으로 좇던 러셀은 격납고 밖으로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고는 이윽고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짧게 혀를 찼다.
“쯧.”
드비어스사의 이권을 나눠야 되는 것이 불만스러웠으나 그래도 최악의 상황을 피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어찌 됐건 이걸로 일단 상황이 정리됐군.”
때마침 다시 들어온 요원한테 손짓을 해서 위성전화기를 건네받은 러셀은 라이언 대테러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야, 블랙레빗의 행방은 아직 못 찾았나?”
-죄송합니다. 하지만 곧 꼬리가 잡힐 겁니다.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사흘째, 그 전부터 갑자기 시야에서 벗어난 혁권을 영국의 정보 조직 몰래 찾기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들의 추적을 피해 내고 있는 것에 러셀은 짜증이 치밀어 오르면서도 한편으로는 크게 감탄했다.
물론 거미줄처럼 깔린 CIA의 정보망을 언제까지 피해 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보여 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러셀은 위성전화기를 고쳐 쥐면서 말을 이었다.
“찰리 팀은 아직 그대로 대기 중이지?”
-그렇습니다.
“이제 필요 없으니까 철수시키도록 해.”
-예? 하지만 아직 블랙래빗을 처리하지 못했는데…….
라이언 팀장의 말대꾸에 러셀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시키면 그대로 따를 것이지, 뭐가 그렇게 말이 많아?”
-죄송합니다.
“그리고 원래 계획대로 다음 단계를 실행하도록 해.”
-런던 쪽 분위기가 여전히 시끄러운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우려 섞인 물음에 러셀이 딱 잘라 대답했다.
“아무런 터치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진행시켜.”
-…….
러셀이 런던에서 마르케타 MI5국장을 만났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이야기를 들은 라이언 팀장은 뭔가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졌다는 걸 눈치챘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얼마 있지 않아 시끄러운 제트 엔진 소리를 내면서 격납고를 나온 전용기가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