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72
272
양국 정보기관 수장들이 은밀히 만나 음모를 꾸미던 시각, 혁권은 넓은 바다로 나와 한가롭게 영국 해협을 지나고 있었다.
선실 침대에 누워 있던 혁권은 누군가 노크를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눈처럼 하얀 나신을 살짝 드러낸 채 옆에 있던 갈색 머리 미녀가 인기척에 몸을 살짝 뒤척였다.
“괜찮으니까 더 자.”
귀에 대고 부드럽게 말을 속삭인 혁권은 이불을 끌어서 덮어 주고는 침대에서 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바지를 집어서 입었다.
문을 열고 선실 밖으로 나가자 자말이 서 있었다.
“쉬시는데 방해를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손에 들고 나온 셔츠를 몸에 걸치면서 혁권이 말했다.
“근데 무슨 일이야?”
“이제 곧 생말로Saint-Malo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그래?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왔군.”
아무래도 큰 항구보다 지켜보는 감시의 눈이 적을 수밖에 없는 생말로를 도착지로 정해 두고 있었다.
“바로 그리스로 가실 겁니까?”
자말의 물음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직 런던에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니까 당분간은 다른 곳 숨어서 좀 더 분위기를 지켜보는 것이 좋겠어.”
자칫 잘못했다가는 그리스에 있는 가족들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데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자말도 같은 생각인지 순순히 수긍을 했다.
“생말로에 계속 머무실 건 아니시겠지요?”
“언제 영국 정보기관에 노출될지 모르는데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
“그럼?”
“일단은 우리와 연관이 있는 곳은 무조건 피해야 되겠지.”
그러자 잠자코 듣고 있던 자말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계속 피해만 다닐 수는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물론이야.”
도망자 신세가 될 거였다면 애초에 복수를 실행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상황이 정리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야.”
“만약 CIA가 저흴 배신한다면 어떻게 합니까?”
사실 자말이 가장 우려하는 것이 바로 이거였다.
뒷수습을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목에 칼을 들이미는 최악의 경우를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혁권은 그리 크게 염려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섣불리 우릴 버리지 못할 테니까 염려하지 마.”
“무슨 복안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자말을 보며 그는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날 건드린다면 CIA도 상당히 골치 아파질 거라는 사실을 살짝 알려 줬다고나 할까.”
두리뭉실한 대답이었지만 뭔가 대비책을 세워 뒀다는 것에 자말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랭리로 돌아온 샌더슨은 평상시와 같이 승용차를 주차장에 세워 두곤 엘리베이터를 타고 자신의 사무실로 올라갔다.
띵.
문이 열리고 회색 복도가 나타났다.
인사해 오는 사람들에게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 안으로 들어가니 사무실 앞에 있던 여직원이 그를 보고 말을 걸었다.
“일찍 출근하셨네요.”
“오늘은 차가 안 막히는군.”
“평소보다 10분만 더 빨리 집에서 나오면 항상 쾌적한 도로 상태를 만끽할 수 있죠. 물론 그러지 못해서 탈이지만.”
여직원은 빈 커피 잔을 집어 들면서 물었다.
“마침 한 잔 더 마실 생각이었는데, 함께 타 드려요?”
“아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볼일 봐.”
“그래요, 그럼.”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가 커피 머신 쪽으로 걸어가자 샌더슨은 사무실의 문을 열고 제 책상 앞에 앉았다.
컴퓨터의 전원을 켜고 부팅되는 것을 기다리는 사이, 그는 창가에 올려 둔 손바닥만 한 작은 화분에 물을 주었다.
몇 년 전 생일에 선물로 받은 것인데 딱히 식물에 취미는 없었으나 그냥 버릴 수도 없어서 회사에 놔두고 가끔씩 물을 주기만 했는데 용케 죽지도 않고 잘 살아 있었다.
이제는 래리에 있을 때면 매일 아침의 일과인 양 습관처럼 된 행동들을 익숙하게 처리한 샌더슨은 아무런 배경화면 없이 기본 설정 그대로인 윈도우 화면 중앙에 메일이 왔음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고 마우스를 딸각였다.
“……?”
발신자는 익명.
제목과 내용 또한 공란으로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노골적으로 수상하다는 표정을 지은 샌더슨은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였다.
CIA 내부 규정대로 한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메일은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서 무조건 삭제한 뒤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유일하게 첨부되어 있는 첨부 파일명을 본 샌더슨은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블랫레빗.
바로 CIA에서 혁권한테 붙인 암호명이 떡하니 적혀 있었던 것이다.
팔짱을 낀 채 한참 동안 모니터를 바라보던 샌더슨은 이내 마우스 커서를 움직여서 첨부 파일을 클릭했다.
그러자 그가 혁권과 만나는 모습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대화가 녹음된 음성 파일이 실행됐다.
-방금 결정이 떨어졌소. 사흘 뒤 런던에서 봅시다. ……도와주기로 한 거요? 운이 좋은 줄 아시오. 일이 잘못됐다면 전화가 아니라 킬러가 그쪽을 찾아 갔을 거요…….
컴퓨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목소리에 샌더슨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러셀 국장의 승인이 난 직후 혁권과 통화한 내용이 그대로 녹음되어 있는 것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가방 안에 넣어 둔 위성전화기 벨이 울렸다.
띠리리릭. 띠리리릭.
흠칫 놀라 급하게 음성 재생을 중단시킨 샌더슨은 위성전화기에 뜬 번호를 확인하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위성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댄 샌더슨은 화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혹시 몰라 다시 살려 둔 위성전화기로 혁권이 연락을 해 온 것이다.
-보낸 메일은 잘 받았소?
폭탄을 던져 놓고 너무나도 당당한 태도에 샌더슨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런 걸 보내 놓고 무사할 줄 알아!”
-나도 가능하면 그걸 퍼뜨릴 생각이 없으니까 진정하시오.
“바꿔서 말하면 상황에 따라서 이걸 터트릴 수도 있다 이거로군.”
-역시 똑똑하다니까. 나도 이 험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가 없지 않겠소. 그쪽한테는 미안하게 됐소이다.
“흥. 퍽이나 고맙군.”
퉁명스럽게 말한 샌더슨은 모니터에 띄워져 있는 사진들을 쳐다보면서 으르렁거렸다.
“이딴 음성파일하고 사진 몇 장에 CIA가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아!”
-물론 끄떡도 하지 않겠지.
“알면서도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가!”
짜증이 난 샌더슨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치명상은 안기지 못하더라도 CIA의 명성에 꽤 뼈아픈 타격은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소?
“끄으응.”
혁권의 말대로 이게 언론을 통해 폭로된다면 상당한 스캔들이 되어 CIA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었다.
더군다나 곧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기에 시기상으로도 너무나 안 좋았다.
미간을 좁힌 샌더슨은 작게 한숨을 내뱉고는 위성전화기를 고쳐 잡았다.
“뭘 원하는 거지?”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니오. 그저 원래 했던 대로 약속을 지켜 주길 원할 뿐이오.
“허어.”
샌더슨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런던에서 그 난리를 쳐 놓고 별게 아니라고. 정말 간이 배 밖에 나왔군.”
-보헤멘을 처리하는 일은 그쪽도 동의한 것 아니었소?
“일을 그리 크게 벌일 줄 알았으면 절대 그러지 않았을 거야!”
욕이라도 한바탕 쏟아 내고 싶은 걸 샌더슨은 겨우 눌러 참았다.
-어찌 됐건 난 합의한 대로 움직였을 뿐이오. 그러니까 그쪽도 약속을 지켜 줄 거라 믿고 있겠소.
“이따위 걸 보내 놓고 그런 소리를 늘어놓다니 정말 뻔뻔하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같이 미약한 존재가 CIA를 상대로 살아남으려면 이렇게라도 보험을 들어 놔야 되지 않겠소?
실제로 혁군을 처리해서 위험요소를 사전에 없애 버리자는 이야기가 CIA 내부에서 나오고 있었기에 어쩌면 아주 시기적절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물고 늘어지는 대상이 하필이면 자신이라는 것에 샌더슨은 심기가 편할 수 없었다.
애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샌더슨은 정색을 한 채 말했다.
“이게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건 생각 안 해 본 모양이군.”
-그럼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현명하게 판단할 거라고 믿고 있소.
“쯧.”
이맛살을 찌푸린 샌더슨은 짧게 혀를 찼다.
제법 쓸 만하지만 그래도 언제든 자신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체스판의 말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눈가를 찌푸린 샌더슨은 입맛을 다시면서 말했다.
“이건 내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그쪽에서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바람에 영국 정보기관들이 발칵 뒤집혔다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전화를 할 테니 그때까지 결정을 내려 주시오.
촉박한 시간에 샌더슨이 인상을 썼다.
“이것저것 조율할 게 많은데 시간이 너무 짧아.”
-미리 말해 두는데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인다면 약속한 시간에 상관없이 바로 각 언론사 사이트와 인터넷에 방금 본 것들을 다 풀어 버릴 테니 그렇게 아시오. 그러면 또 전화하겠소.
“이, 이봐!”
-뚜뚜뚜…….
혁권이 먼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리자 샌더슨은 부숴 버릴 듯 위성전화기를 책상에 내려놨다.
“젠장 할!”
욕설을 내뱉은 샌더슨은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될지 머리가 아파 왔다.
“누구하고 통화를 하는데 그렇게 표정이 심각해요? 혹시 애인?”
조앤이라고 이름을 알려 준 갈색 머리 미녀가 그의 목에 새하얀 팔을 두르면서 물었다.
“애인이라…… 그런 거 없어.”
“정말요?”
지중해 바다처럼 푸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조앤이 되묻자 혁권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 내가 바람둥이처럼 보여?”
그러자 조앤이 풍만한 가슴을 그의 등에 밀착시키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멋진 남자가 애인이 없다니까 안 믿겨서 그렇죠.”
“후후후. 그거 듣기 좋은 소리군.”
“그럼 나랑 사귈래요?”
서양 여자답게 과감한 대시에 혁권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려 조앤을 봤다.
잘록한 허리에 글래머러스한 몸매 그리고 작고 섹시한 얼굴은 여자로서 매력이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남자라면 누구나 눈길이 갈 미녀였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팔을 목에서 풀면서 혁권이 말했다.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미안하군.”
“좋은 타이밍이 아닌 건가요?”
“그래.”
조앤은 흐응, 하고 미련 없이 그에게서 떨어졌다.
“안타깝네요. 당신이라면 꽤 오래 사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음에 또 인연이 된다면 멋진 곳에서 저녁을 사 주도록 하지.”
“어머, 그땐 내가 당신보다 더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을걸요.”
마치 미래가 정해져 있기라도 한 듯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보기 좋은 당당함에 혁권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꼭 그렇게 되길 바라지.”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요.”
턱을 세우며 새침하게 휙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그는 약간 가라앉았던 기분이 자연스럽게 풀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가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 내고 원하는 걸 이루길 빌어 줬다.
1시간쯤 뒤 일행이 탄 요트는 갑문을 통과해서 생말로 내항에 무사히 정박했다.
사우샘프턴에서처럼 대신 일을 처리해 줄 사람이 없었기에 혁권과 부하들은 직접 출입국 사무소로 가서 입국 도장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소지한 위조 여권이 쉽게 감별해 내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물건인 데다 남자라면 자연스럽게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쁜 미녀들을 옆에 끼고 있자, 출입국 사무소 직원들은 팔자 좋은 졸부 정도로 생각하곤 검사를 대충 하곤 여권을 돌려줬다.
일부러 비싼 고급 요트에 미녀들을 태우고 온 효과를 제대로 본 거였다.
추적을 완벽하게 따돌렸다고 자신했지만 그래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에 혁권은 조앤과 친구들에게 3천 달러씩을 쥐여 주고는 바로 헤어졌다.
요트는 렌트 업자가 알아서 가져가기로 되어 있으니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도시를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혁권은 조앤이 헤어지기 전에 몰래 쥐여 준 연락처가 적힌 쪽지를 펼쳐 보곤 그냥 버리려고 하다가 다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