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73
273
# 진실과 거짓
“국장님은?”
“안에 계십니다.”
여비서의 대답에 샌더슨은 걸음을 옮겨 국장실 앞에 섰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법이 없자 샌더슨은 결국 러셀 국장한테 사실대로 모든 걸 이야기하기로 했다.
때마침 러셀 국장의 호출이 있었기에 그는 혁권이 보낸 파일을 USB에 담아서 가지고 갔다.
가뜩이나 런던에서 일을 크게 벌이는 바람에 수습을 하는 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까지 보고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눈에 선했다.
사람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바탕 욕을 들어 먹는 건 물론이고 최악의 경우 한직閑職으로 쫓겨나거나 사직서를 내야 될지도 몰랐다.
자신을 이렇게 곤경에 처하게 만든 혁권을 떠올리며 이를 부드득 간 샌더슨은 이내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어깨를 올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똑.
그러고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샌더슨은 소파 가운데 자리에 비스듬히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는 러셀 국장을 보곤 살짝 머리를 숙였다.
“부르셨다는 연락을 받고 왔습니다.”
러셀 국장이 턱으로 비어 있는 자리를 가리켰다.
“거기에 앉아.”
“예.”
굳은 표정에 목소리도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것이 그다지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메일 이야기를 꺼내야 되는데 러셀 국장의 심기가 불편해 보이자 샌더슨은 내심 곤혹스러웠다.
샌더슨이 눈치를 보면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맞은편에는 라이언 대테러 팀장이 먼저 와 자리해 있었다.
그가 오기 전에 먼저 이야기를 조금 나눴는지 라이언 팀장의 얼굴이 경직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영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외로운 늑대들에 대한 보고를 한 적이 있었지?”
갑작스러운 물음에 샌더슨은 의아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했다.
“……예.”
“내 기억에 런던 지역에도 IS를 추종하는 외로운 늑대들이 꽤 있다고 들은 것 같은데?”
“맞습니다. 베스널 그린Bethanl Green을 중심으로 50~100명 정도의 위험인물들이 있는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SNS에 불평이나 올리는 정도일 뿐이고 실제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있는 자들은 몇 명 되지 않습니다.”
외로운 늑대Lone Wolf란 전문 테러 단체 조직원이 아니라 정부나 사회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가지고 혼자 행동에 나서는 자생적인 테러범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한쪽 손으로 턱을 쓸면서 잠시 생각을 하던 러셀 국장이 고개를 돌려 라이언 팀장을 보며 말했다.
“그럭저럭 괜찮은 것 같은데 자네 생각은 어때?”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요?”
“그거야 우리가 적당히 양념을 치면 되지.”
“뭐.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샌더슨은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러자 러셀 국장이 찬찬히 샌더슨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런던에서 마르케타 국장을 만나고 왔네.”
“아니, 언제…….”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샌더슨은 정색을 하며 물었다.
“설마. MI5에서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요?”
“맞아.”
러셀 국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자 샌더슨은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지며 그대로 몸이 굳었다.
가장 우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엄청난 후폭풍이 불어닥칠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분위기가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자, 샌더슨은 뭔가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러셀 국장이 말을 이었다.
“진실이 밝혀져 봤자 좋을 것이 없으니 서로 적당히 덮어 두기로 했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바짝 긴장해 있던 샌더슨은 뜻밖의 이야기에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다른 것도 아니고 런던 한복판에서 총격 테러가 발생해 국가 전체가 발칵 뒤집혔는데, 그걸 없던 일로 한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대신 이번 작전에서 얻을 이득 절반을 요구했지만, 사건이 외부에 알려졌을 경우 감수해야 될 피해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내어줄 수 있지.”
맞는 말이었다.
드비어스사를 통해서 국제 다이아몬드 거래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막대했지만 그렇다고 CIA와 미국 정부가 커다란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보다 나았다.
“그러면 아까 전에 외로운 늑대를 거론하신 것도?”
“그래. 들끓는 민심을 달래고 영국 내각에 위신을 세우려면 MI5에 적당한 먹잇감을 넘겨줘야 되지 않겠어?”
“그렇지요.”
아무리 두 정보기관 수장이 합의를 봤다고 해도 사건을 마무리 지으려면 모든 책임을 떠넘길 희생양이 필요했다.
비록 사건이 발생하는 건 막지 못했지만 신속하게 범인을 찾아내 테러 세력을 일망타진한다면 MI5에 쏟아지고 있는 비난을 잠재울 수 있었다.
자생적 테러리스트인 외로운 늑대라면 나중에 문제 될 소지가 작고 국민과 내각을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양쪽 정보기관의 입맛에 따라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아니, 오히려 이걸 잘 이용한다면 수년째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CIA에 유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으로 볼 때 러셀 국장 역시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어때? 그럴듯한 걸로 일을 엮어 낼 수 있겠나?”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해내라는 말투였지만, 어찌 됐건 이번 사건에 크든 작든 책임이 있는 샌더슨이었기에 거절할 입장이 아니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겠군요?”
“저쪽 사정을 생각하면 늦어도 이삼일 안에 결과가 나와야 될 거야.”
대충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너무나 촉박한 시간에 샌더슨은 이맛살을 살짝 찡그렸다.
“쉽지는 않겠지만 최대한 그림을 그려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턱을 내민 자세로 러셀 국장이 그를 지그시 바라보자 샌더슨은 자신에 대한 신뢰가 많이 낮아진 걸 느끼고는 내심 한숨을 내뱉으면서 대답했다.
“절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러셀 국장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믿어 보도록 하지.”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잠자코 앉아 있던 라이언 팀장이 러셀 국장을 보며 입을 열었다.
“블랫레빗은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혁권에 대한 문제가 나오자 샌더슨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USB를 떠올리곤 입안이 바싹 말랐다.
무표정한 얼굴을 한 러셀 국장은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에 있는지 위치는 파악했나?”
“일단 영국을 떠난 것까지 확인했고 계속 추적 중이니 곧 꼬리가 잡힐 겁니다.”
궁색한 대답에 러셀 국장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라이언 팀장을 쳐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며칠 전에도 그 말을 들은 것 같은데…….”
“…….”
“자네 말마따나 고작 밀수꾼 하나 찾아내지 못해서 며칠째 헤매고 있다니 정말 실망스럽군.”
싸늘한 질책에 라이언 팀장은 얼굴을 붉히며 머리를 숙였다.
아무리 혁권이 용의주도하게 움직이고 있다지만 CIA에서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아직까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이야기를 해 봤자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러셀 국장은 살짝 인상을 쓰곤 그냥 넘어갔다.
그러고는 손가락 끝으로 소파 팔걸이를 가볍게 몇 번 두드리면서 잠시 고심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날 이렇게 곤란하게 만든 걸 생각하면 당장 머리통에 총알구멍을 내놔도 시원치 않겠지만 당분간은 그냥 놔둬.”
“진심이십니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놈을 괜히 섣불리 건드렸다가 일을 더 악화시킬 필요는 없잖아. 일단 그대로 놔뒀다가 나중에 제대로 한번 써먹고 폐기시키면 되지 않겠어?”
“놈이 통제에 따르지 않으려고 하면 어쩝니까?”
이미 한번 시야에서 벗어나 일을 크게 벌인 전적이 있었기에 이런 우려를 나타내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러셀 국장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놈도 머리가 있다면 우리하고 척져서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을 테니, 불만이 있더라도 대놓고 반항하지는 못할 거야.”
찝찝한 마음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았지만 러셀 국장이 결정한 거였기에 라이언 팀장은 불만을 삭히며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렇게 혁권에 대한 처분이 결정되자 겉으로는 담담한 얼굴로 앉아 있었지만, 내심 조마조마해하며 대화를 듣고 있던 샌더슨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굳이 혁권한테 받은 이메일을 밝혀 자신의 잘못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이야기를 끝내고 국장실을 나오자마자 샌더슨은 주머니에 들어 있던 USB를 구둣발로 밟아 완전히 부숴 버렸다.
평상시라면 관광객들로 북적일 세인트 폴 대성당 앞은 휑한 광장 바닥을 드러낸 채 정적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그나마 소음을 자아내고 있는 것은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비둘기 무리와 사건 이후로 강화된 경비 덕분에 순찰을 다니고 있는 경찰들뿐, 그 외에는 인기척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1년 내내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 곳이라 이런 광경은 심히 낯선 것이었고, 일부는 마치 도시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다고 볼멘소리를 내뱉기도 하였다.
차에서 내린 젬블레 팀장은 가판대로 가서 타임스 신문 한 부를 사서는 광장 한쪽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신문을 펼치자 며칠 전 벌어진 워털루 브리지 습격 사건에 관한 기사들이 여러 면에 걸쳐 자세하게 실려 있었다.
기사 대부분이 테러를 사전에 막지 못한 내각과 MI5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피습당한 인물이 드비어스사의 수장인 보헤멘 회장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그에 관련된 이러저런 추측 기사들도 있었다.
아직까지는 내각에서 참아 주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마르케타 국장이 우려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자신도 모르게 젬블레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허리 아래까지 내려오는 코트를 입은 백인 사내가 한 명 다가와서는 옆자리에 앉았다.
바로 CIA 요원인 샌더슨이었다.
샌더슨은 자연스럽게 손에 들고 온 테이크아웃 커피를 마시면서 낮은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걸었다.
“한 1년 만인가. 지난번에 로마에서 본 것이 마지막이었던 거 같군.”
그러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계속 신문을 보는 척하던 젬블레가 살짝 눈가를 찡그리고는 퉁명스럽게 말을 받았다.
“남의 동네에 와서 불장난을 벌이니 좋았나? 그러다가 큰 코 다치는 수가 있어.”
“그 이야기는 조용히 묻어 두기로 합의가 된 걸로 아는데?”
“흥. 이번에는 운이 좋았지만 그게 언제까지 갈지 두고 보겠어.”
“이봐, 너무 그러지 말라고. 우리도 보통 골치 아픈 것이 아니야.”
“됐으니까 헛소리 그만하고 물건이나 내놔.”
샌더슨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USB를 젬블레의 상의 주머니에 슬쩍 집어넣었다.
“유튜브에 인터넷 동영상을 올리고 지하철 사물함에다가 폭탄과 무기도 넣어 놨으니까 각본대로 움직이면 감쪽같을 거야.”
“일이 잘못되면 그쪽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야 될 거야.”
싸늘하게 말을 내뱉은 젬블레는 보고 있던 신문을 쓰레기통에 던지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