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74
274
다우닝가Downing Street 10번지.
평범한 3층짜리 벽돌집 외관을 가진 이곳은 영국 총리가 거주하는 관저로 건설된 지 280년 이상 된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관저의 중심부나 다름없는 집무실은 족히 수백 권은 넘을 듯한 책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벽을 꽉 채운 책장과 선반 덕분에 마치 도서관에라도 온 듯 특유의 종이 냄새가 가득했다.
방 중앙에 있는 커다란 책상은 붉은 마호가니 나무로 만들어진 것으로, 세월이 지나면서 관저의 주인은 계속 바뀌어도 이 책상만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야말로 역사의 뒤 페이지를 지켜본 귀중한 골동품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이 책상의 주인은 제임스 보너 총리였다.
보통 사람보다 배로 후덕한 체격의 그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책상 너머에 서 있는 마르케타 국장을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도대체 날 얼마나 실망시킬 생각이지!”
보너 총리가 손바닥을 내려친 책상에는 타임스와 더 선을 비롯한 주요 일간지들이 펼쳐져 있었다.
신문들 모두 1면에 얼마 전 워털루 브리지에서 있었던 테러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었는데, 하나같이 정부와 정보기관 들의 무능력함을 비난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총리 사퇴를 요구하는 기사까지 있었다.
가뜩이나 최근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서 지지율이 바닥을 치고 있는데 이런 일까지 벌어지자, 보너 총리의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더 선에서는 나보고 역대 최악의 무능한 총리라고 써 놨더군.”
마르케타는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판매 부수를 높이려고 자극적인 글을 쓴 것입니다.”
“그래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국민들이 분노와 불안감을 해소할 것이 없어 내각을 비난하지만, 곧 이성을 찾게 될 겁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너 총리는 재차 손바닥으로 책상을 세게 내려치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지금 내각 지지율이 몇 퍼센트인지 알고나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는 건가! 겨우 34%라고 더 이상 내각을 끌어 갈 수 없을 지경이란 말이야.”
지지율이 급락한 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있었지만 이번 테러가 기폭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었기에 마르케타는 변명을 하지 않았다.
“일각에서 MI5에 대한 무용론이 나오며 정보기관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난 끝까지 자네와 MI5를 지지했었네.”
보너 총리는 손가락으로 신문들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어려울 것 같군.”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과 MI5를 희생양으로 삼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에 마르케타는 몰래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왔기에 당황하지 않고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는 상황이 달라질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심드렁한 얼굴로 보너 총리가 쳐다보자 마르케타는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에 올려놨다.
“워털루 브리지에서 테러를 벌인 용의자들의 소재를 찾아냈습니다.”
“정말인가?”
“직접 확인해 보시죠.”
자신만만한 대답에 보너 총리는 얼른 서류철을 펼쳐 봤다.
그러자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MI5에서 지목한 인물들이 테러범임을 증명하는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으음.”
빠르게 내용을 훑어본 보너 총리는 굳은 얼굴로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국내에서 자생한 아랍계 외로운 늑대들이 벌인 일이라는 건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고개를 든 보너 총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을 해 보라는 시선을 보내자 마르케타가 준비해 온 대로 이야기를 했다.
“테러를 실행한 건 외로운 늑대들이지만,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하고 달리 IS가 뒤에서 지원을 해 준 정황이 포착됐습니다.”
“IS라고?”
“그렇습니다.”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해 보게.”
“일명 지하디 존의 사례처럼 영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진 아랍계 청년들을, 국내에 침투한 IS 조직이 은밀히 포섭해서 무기와 자금을 지원해 주고 이번 테러를 일으키도록 한 것입니다. 난민을 가장해서 국내에 들어온 IS 조직원들에 관한 건 자료 뒤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서류를 뒤적인 보너 총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왜 하필 우릴 노린 거지?”
“미국이 중동에서 벌이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국가가 바로 영국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테러에서 피습을 당한 보헤멘 회장은 그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잖나?”
역시 노련한 정치인답게 보너 총리는 허점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러나 미리 대비하고 있던 마르케타는 당황하지 않고 곧장 대답했다.
“정부기관이나 유력 인사에 대한 공격이 어려우니까 일종의 소프트 타깃Soft Target 테러를 벌인 것으로 보입니다.”
“소프트 타깃이라…….”
“보헤멘 회장 같은 경우에는, 아프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드비어스사가 다이아몬드 광산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적 약탈 기업이라 지목하고, 거기에 대한 테러를 가한 걸로 보입니다. 더불어서 유명 경제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벌여 브렉시트Brexit 이후 흔들리는 영국 경제에 타격을 주려는 의도도 있는 걸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럴듯한 설명에 보너 총리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중요한 점은 이번 테러가 끝이 아니라는 겁니다. 용의자들에 대한 도감청 결과 또 다른 타깃을 정해 두고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연쇄 테러가 벌어질 거라는 건가?”
“예.”
“이런 미친!”
보너 총리가 눈을 부릅뜨면서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도 이 난리인데 또다시 테러가 발생한다면 그때는 정말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마르케타는 찾아온 진짜 용건을 꺼냈다.
“추가 테러를 막기 위해 용의자들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를 할 수 있도록 승인을 요청 드립니다.”
그러자 보너 총리가 팔짱을 낀 채 상대를 잠시 지그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나한테 말한 내용이 전부 다 확실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망설임 없는 대답에 보너 총리는 머리를 끄덕이고는 이내 결정을 내렸다.
“즉시 테러범들에 대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시행토록 하시오.”
용의자가 아니라 테러범이라고 아예 못을 박아 지칭하자 마르케타는 입가에 살짝 미소가 번지는 걸 얼른 지우면서 고개를 숙였다.
“바로 실행토록 하겠습니다.”
보너 총리 역시 바보가 아니었기에 마르케타가 가져온 증거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석에 몰린 정국을 반전시키고 화가 난 민심을 달랠 것이 필요했기에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벽난로에 넣어 둔 마른 장작이 탁탁 튀는 소리를 내면서 열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가운데 혁권은 낡은 소파에 앉아 분해한 글록 권총을 헝겊으로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다.
생말로를 떠난 혁권과 부하들은 그동안 파리와 독일을 거쳐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남부에 위치한 필라흐Villach 외곽의 산장에 머물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와 떨어져 있어 주민들의 시선을 피하기 쉬운 데다 언제든지 국경을 넘어 슬로베니아나 이탈리아로 도주할 수 있었기에 은신처로 제격이었다.
아직까지는 안전했지만 CIA와 영국 정보기관들의 능력을 생각한다면 여기도 언제 발각될지 몰랐다.
뒤를 잡히지 않기 위해서 조만간 여길 떠나 다른 은신처로 옮겨 가야 될 터였다.
아직까지는 괜찮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도망을 다니다 보면 부하들뿐만 아니라 자신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 전에 어떻게든 상황을 해결해야만 됐다.
총기를 닦는 걸로 복잡한 머리를 식히고 있을 때 자말이 뭔가 다급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보스, 이걸 좀 보십시오.”
“뭔데 그래?”
태블릿 PC를 넘겨받아 살펴보자 영국의 대표적 공영방송사인 BBC 속보가 떠 있었다.
동영상 화면을 클릭하자 미모의 여성 아나운서가 심각한 얼굴로 속보를 전했다.
-오늘 아침 정보당국과 경찰이 런던 베스널 그린 지역에서 작전을 펼쳐 워털루 브리지 테러 사건 용의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아랍계 이민 2세인 용의자들은 일명 외로운 늑대로 불리는 자생적 테러범들로 IS와 연관돼 이번 테러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용의자 다섯 명이 체포됐는데, 이 과정에서 총격전이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당국은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서…….
이어진 현장 영상에서는 한 건물을 포위한 경찰 특공대 대원들이 뿌연 연막탄을 연속해서 터트리고는 커다란 방패를 앞세운 채 안으로 진입하는 장면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요?”
자신들을 여기 놔두고 엉뚱한 테러 용의자들이라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전에 샌더슨을 통해서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혁권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제야 손을 쓴 모양이군.”
“이게 다 CIA에서 꾸민 일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깜짝 놀란 얼굴로 샌더슨이 묻자 그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적당한 상대를 찾아 우리가 벌인 일을 덮어씌우는 거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이해를 한 자말은 기대 섞인 시선으로 혁권을 쳐다봤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겠군요.”
태블릿 PC를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혁권이 대답했다.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봐야 되겠지만 당장 은신처를 옮길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정말 잘됐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절대 긴장 풀지 말도록 해.”
“염려 마십시오.”
자말이 나가자 혼자 남게 된 혁권은 어느새 다 끝나서 멈춘 뉴스 화면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동안 내색하지 않았지만 홀로 CIA와 영국 정보기관들을 상대해야 된다는 것에 부담감이 이루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컸었다.
당장 얼마 동안은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해서 피해 다닐 수 있겠지만 운이 계속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었다.
결국 한계에 이르면 붙잡힐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속 시원하게 복수를 했다고 해도 애써 만든 사업체를 모두 잃고 목숨까지 위험해진다면 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전에 이렇게 마무리가 됐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해결하는 과정에서 샌더슨과 사이가 안 좋아지기는 했지만 그건 언제든지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청소를 끝내고 권총을 다시 조립하는 혁권의 손놀림이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사건에 대응하지 못하고 답답한 모습을 보이던 것과 달리 MI5는 수사를 빠르게 진행시켰다.
며칠 사이 체포된 용의자들만 이십여 명이 넘고 이들의 거처에서 다수의 무기와 폭탄을 압수했다.
거기다가 IS 깃발과 그들을 추종하는 각종 동영상 등 여러 증거물들이 속속 발견되면서 국민들 대다수가 이들이 워털루 브리지 테러를 자행했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 보너 총리가 마르케타 MI5 국장과 함께 TV 카메라 앞에 서서 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며 용의자들이 연쇄 테러를 계획하고 있다는 걸 밝히자 영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충격은 곧 아랍계 이민자와 난민 들에 대한 분노로 바뀌었다.
곳곳에서 차별과 폭력 사건이 일어났지만 국민들의 분노를 다른 쪽에 돌려서 정권을 계속 이어 가려는 영국 정부는 겉으로는 자제를 호소하면서도 그냥 손을 놓고 관망하는 태도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