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75
275
베네치아.
118개의 섬을 거미줄처럼 얽은 400개의 다리와 수를 셀 수조차 없는 수로가 한데 어우러진 미로와도 같은 도시.
물의 도시라는 별칭만큼 로맨틱한 이미지가 대중적으로 퍼져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패한 귀족들이 타락적인 향락을 추구했던 장소였기에 수로를 중심으로 한 오래된 건축물이나 다리에는 예전의 화려한 향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 표현했다는 산 마르코 광장은 사람들이 던져주는 빵조각이나 과자 부스러기를 받아먹으려는 비둘기들과 세계 전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필수 코스로 거쳐 가는 덕분에 항상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했다.
그런 산 마르코 광장을 조금 앞둔 운하 위의 커다란 아치형 석조 다리.
리알토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는 빛바랜 회색 다리 위에서 선글라스를 쓴 한 사내가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파 사이에 자연스레 뒤섞인 그는 혼자 여행을 온 것인지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가끔씩 수상버스가 모터 소리를 내면서 다리 아래를 지나가고, 연인과 신혼부부를 태운 곤돌라가 유연하게 물살을 헤쳐 나갔다.
테너처럼 듣기 좋은 목소리를 지닌 사공이 오페라의 유명한 아리아를 한 곡조 멋들어지게 뽑자 주변에서 박수와 함께 후한 팁이 쏟아졌다.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습이 매우 익숙한 걸로 보아,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이 같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추가 수입을 올리는 것이리라.
“구경은 재밌나?”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물음에 샌더슨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물론 그 역시 베테랑 정보요원이라 고개를 돌리거나 허를 찔린 기색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기척을 숨기고 바로 옆자리까지 다가오자 상당히 놀란 것이 틀림없었다.
“이번엔 나를 잘도 엿 먹였더군.”
“……어쩔 수 없었어. 나도 내 살길은 찾아야 하지 않겠나?”
“고작 그따위 변명이나 내뱉다니 실망이야.”
“변명이 아니라 정당한 이유인 거지.”
혁권은 미안한 기색 따윈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뻔뻔스레 내뱉었다.
어차피 이미 쏟아진 물이었기에 괜히 비굴해지기보다는 끝까지 당당하게 나가는 것이 더 나았다.
“그나저나 어째 꽤 재밌는 구도인걸.”
“뭐가?”
“이런 식으로 상대 앞에 예고 없이 나타나는 건 그쪽의 전매특허 아니었나. 그런데 오늘은 정반대가 되어 버렸군.”
여전히 눈은 다리 앞을 오가는 행인들 쪽으로 고정시킨 채 혁권이 말했다.
비스듬하게 몸을 기울이고 수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샌더슨과는 달리 혁권은 등을 돌리고 상점가를 향하고 있는 형태였다.
서로 대화가 통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이면서도 적당히 낯선 사이로 보이게 먼 간격을 유지하던 그는 우습다는 듯 픽 웃었다.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는 걸 즐기는 취미는 없지만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군. 앞으로 자네를 만날 땐 종종 써먹어야겠어.”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본데. CIA를 상대로 싸움을 걸고도 멀쩡할 것 같아?”
샌더슨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난 싸움을 건 적이 없어. 단지 약속대로 일을 이행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을 뿐이지.”
“그럼 나한테 보낸 이메일은 뭐지?”
“그거야 이런 것이 있으니까 섣불리 오판을 내리지 말라는 배려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군.”
“배려라…… 웃기는군.”
입술 한쪽을 비틀어 올린 샌더슨은 날 선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분명히 경고해 두겠는데 또다시 이렇게 날 우롱하려 든다면 그때는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야.”
슬쩍 시선을 돌려 샌더슨을 쳐다본 혁권은 살짝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지.”
“흥.”
샌더슨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물건이나 넘겨.”
그러자 혁권이 주머니에서 USB를 하나 꺼내 샌더슨한테 건넸다.
“따로 파일을 복사해 놓은 건 아니겠지.”
“신용은 확실히 지키는 것이 내 철칙이야.”
“그다지 믿음은 안 가지만 뭐 속는 셈 쳐주지.”
USB를 챙긴 샌더슨은 정색을 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상황을 마무리 짓기는 했지만 괜히 영국 친구들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당분간은 설치지 말고 얌전하게 지내도록 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혁권 역시 주위가 조용해질 때까지는 그냥 엎드려 있을 생각이었기에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알았어.”
샌더슨은 잠시 콧등에 느슨하게 내려온 선글라스를 고쳐 쓰곤 흔한 작별 인사도 없이 그대로 자리를 떠나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혁권 또한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리알토 다리의 계단 아래의 좁은 골목길에 드리워진 어둠에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그렇게 모든 일을 마무리 지은 혁권은 거의 보름 만에 아테네로 돌아갔다.
걱정과 달리 영국 정보기관들이 그를 쫓는 낌새가 없었고 CIA 역시 주위를 얼쩡거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에야 그는 마음을 놨다.
약간의 트러블이 있었지만, 샌더슨은 약속을 지켜 알레포에 무기를 가져다준 대가로 500만 달러어치의 오더를 줬다.
이번에는 갭GAP이 아니라 유럽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장병들한테 지급하는 피복을 납품하는 거였다.
조금 의외였지만 사실 큰 금액의 오더를 장기간 이어 가는 데에는 군대에 물건을 납품하는 일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제작한 샘플이 미군 보급품 기준에 전부 적합 판정을 받자 바로 정식 계약을 맺고 생산에 들어갔다.
그동안 갭에서 주문한 오더를 소화하면서 직원들의 숙련도가 많이 올라갔기에 처음과 달리 불량률이 현저하게 낮아졌다.
철컥철컥.
시끄럽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를 들으면서 혁권은 천천히 공장을 둘러봤다.
“보시다시피 생산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어서 보름 뒤에는 첫 물량을 납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장장이 고생을 많이 한 것 같군.”
“아닙니다. 그것보다 불량률이 떨어져 이제 더 이상 적자를 내지 않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손익분기점만 맞춰도 되니까 그렇게 수익을 내려고 무리하지 않아도 돼.”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공장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게 아니었다.
“많지는 않아도 다음 분기부터는 꼭 흑자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의욕이 넘치는 목소리에 혁권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투자 이민 승인을 받기 위해서 급하게 설립한 공장이었지만 이제 제법 그럴듯하게 모습을 갖춰 나가는 것에 그는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공장을 다 둘러본 혁권은 에시드 공장장의 배웅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호위 차량과 함께 공장 정문을 천천히 빠져나오자 옆자리에 앉은 자말이 그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메르신Mersin에 간 함단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화물은 잘 넘겨줬대?”
혁권을 대신해서 CIA가 주문한 할랄 전투식량을 시리아 반군 세력에 넘겨주기 위해 터키로 가 있었다.
“예. 별다른 문제없이 일을 끝냈다고 합니다.”
“국경 쪽 분위기가 안 좋아서 걱정했었는데 다행이군.”
“그렇지 않아도 함단이 전해 온 말에 의하면 터키군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합니다.”
“심상치가 않다니?”
“국경 지역에 병력이 대거 보강된 건 물론이고 기갑부대까지 배치됐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통행 제한까지 실시 중이라고 하더군요.”
“시리아에서 넘어오는 난민들을 통제하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난민을 상대하는 데 기갑부대를 동원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머리를 끄덕이던 혁권은 이내 얼굴을 살짝 굳히면서 말했다.
“설마 터키가 시리아 내전에 끼어들려는 건 아니겠지?”
“글쎄요. 지금껏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진흙탕에 발을 들여놓을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래도 아니라고 단언하지는 못했다.
“아니지. 시리아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서 IS 소탕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은근슬쩍 석유가 매장되어 있는 라카Rakka 지역을 노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겠어.”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검은 황금이라고 불리는 석유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충분히 터키가 욕심을 낼 만했다.
“짐작이 맞다면 시리아 내전이 더욱 복잡하게 꼬이겠군.”
혁권의 말에 동의하듯 자말이 머리를 끄덕였다.
알레포에서 직접 목격한 참상을 떠올린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가지고 있던 위성 전화기 벨이 시끄럽게 울렸다.
띠리릭. 띠리릭.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한 그가 전화를 받자 리비아에서 인연을 맺은 밀수업자인 압둘라흐만이 인사도 생략한 채 대뜸 물었다.
-자네 할랄 전투식량의 재고가 얼마나 있나?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겁니까?”
-내가 구매를 좀 했으면 하네.
난데없는 이야기에 의아했지만 혁권은 이내 기억을 떠올리면서 대답했다.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한 달 안에 5만 상자 정도 가져다줄 수 있겠나?
“확실한 건 알아봐야 되겠지만, 가능은 할 겁니다.”
-그럼 부탁 좀 하세. 대금은 바로 계좌로 보내 주겠네.
돈을 주고 물건을 사 가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전투식량을 이만큼이나 구하는 것이 뭔가 이상했던 혁권은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이만한 물량을 어디다 쓰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
잠깐 말이 없던 압둘라흐만은 이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자네니까 특별히 알려 주도록 하지.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 인사하고 큰 거래를 하기로 되어 있네.
“지금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그는 더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중동 지역에서 그나마 가장 평온한 국가 중 하나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전투식량을, 그것도 5만 상자나 필요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상적인 루트가 아닌 압둘라흐만 같은 밀수업자와 거래를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혁권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압둘라흐만이 말을 이었다.
-시리아로 보내질 물건이네.
“……!”
시리아라는 말을 듣자마자 단번에 어찌 된 일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면 혹시 시리아 반군에…….”
-자네가 짐작하는 것이 맞네.
시리아 내전은 미국과 러시아의 대립일 뿐만 아니라 수니파의 맹주 격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시아파의 이란이 맞붙어 싸우는 종교전쟁이기도 했다.
눈엣가시 같은 이란이 시아파 정부인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자 거기에 대한 대응으로 수니파인 사우디아라비아가 반군 세력을 돕는 형국이었다.
가뜩이나 복잡한 상황에서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까지 끼어들어 난장판을 벌인다면 시리아 내전은 더욱 수습하기가 어려워질 터였다.
“후우.”
-왜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혁권은 압둘라흐만의 말에 얼른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상황이 급하니까 물건을 가능한 한 빨리 부탁하겠네.
“최대한 맞춰 보도록 하죠.”
-그럼 또 연락하지.
통화를 끝낸 혁권은 쓰게 웃으면서 달리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리아 주민들의 고통이 심해질수록 주머니에 더욱 많은 돈이 들어오는 것에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