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76
276
수량이 상당히 많았지만 할랄 전투식량을 준비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때마침 미스라타 민병대와 CIA에서 주문한 물량을 모두 넘겨준 데다 혁권이 자금을 지원해 줘서 봉담식품의 생산 시설을 크게 늘렸기에 충분히 다 소화를 할 수 있었다.
“그러면 최대한 빨리 물건을 만들어 주십시오. 물론 그렇다고 품질이 떨어지거나 불량이 나와서는 안 됩니다.”
혁권의 말에 수화 너머에서 봉담식품 오대철 사장이 웃으며 대답했다.
-물론이지요. 다른 것도 아니고 사람이 먹는 음식인데 아무리 주문이 밀렸더라도 아무렇게나 만들 수는 없지요.
바로 이렇게 한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답지 않게 우직한 면이 오대철 사장의 단점이자 장점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만들어 내는 상품에 대해서는 철저한 점 때문에 혁권도 믿고 그에게 일을 맡길 수 있었다.
“오더 물량을 다 생산한 후에도 라인을 멈추지 말고 재고를 충분히 확보해 놓도록 하세요.”
-그러다가 재고가 쌓이면 상당히 골치 아파질 텐데 괜찮겠습니까?
오대철 사장이 살짝 우려를 나타내자 그는 자신감 가득한 태도로 말했다.
“찾는 곳이 많아서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설사 예상이 빗나간다고 해도 장기 보관 식품이라 2년은 너끈히 창고에 넣어 둘 수 있으니까 아무 염려하지 마세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니 알겠습니다. 이거 또 한동안은 계속 철야 작업을 해야 되겠군요.
말과 달리 오대철 사장의 목소리는 아주 밝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원청 회사의 횡포로 큰 은행 빚을 지고 부도가 나 길거리로 나앉을 뻔했는데 혁권 덕분에 그걸 이겨 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위기를 벗어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쉴 여유가 없을 정도로 오더가 넘쳐나니 몸은 힘들더라도 절로 신명이 났다.
그걸 알고 있기에 혁권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물품 대금은 오늘 중으로 들어갈 겁니다.”
-이거, 매번 감사합니다.
혁권과 거래를 해서 좋은 점 중 하나가 바로 이렇게 매번 결제를 선금으로 해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시 또 연락하도록 하죠.”
-물건은 어떻게든 기한 내에 다 만들어서 보내 드릴 테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통화를 끝낸 혁권은 위성 전화기 안테나를 접어 탁자에 내려놨다.
이걸로 간단하게 10만 달러를 벌었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할랄 전투식량을 중간에 끼어 컨테이너 채로 압둘라흐만한테 넘겨주기만 하면 되니까 위험한 일도 없고, 미리 선입금까지 받았으니 그야말로 땅 집고 헤엄치기나 마찬가지인 거래였다.
물론 한꺼번에 큰돈을 벌기는 어려웠지만 이런 것도 나름대로 괜찮았다.
이것도 그동안 혁권이 나름 인맥을 잘 형성해 뒀고 할랄 전투식량이라는 좋은 상품을 선점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나른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온몸에 쬐고 있자니, 문득 집에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전화해 봤자 몸 조심해라, 밥 잘 먹고 다니라는 간단한 안부 인사만 주고받을 테지만 그래도 자식이 혁권 저 하나밖에 없는지라 두 분이서 적적하게 지내고 계시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어릴 땐 동생이 있는 친구들이 하도 불평만 해 대서 잠깐 부럽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는데, 정작 자기가 집을 자주 비우는 형편이 되자 든든하게 뒤를 맡길 혈육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감상이 가끔씩 머릿속을 스치곤 했다.
혁권은 버튼을 꾹꾹 눌러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어머니, 저예요.”
-으응. 혁권이냐?
“잘 지내시나 해서 전화해 봤어요.”
-여긴 뭐 항상 똑같지. 그럼 지금 그리스에 있겠구나?
“예에. 숙소 방이에요.”
혁권은 창가로 걸어가 얇은 커튼을 치우고 바깥을 내려다보았다.
흰색 페인트칠을 한 키 작은 건물들이 찬란한 태양 광선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었고, 집집마다 베란다에 내놓은 꽃 화분이 붉고 노란 색소를 더해 주고 있었다.
몸을 가릴 겉옷을 걸치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까맣게 타 버릴 듯 강렬하기 짝이 없는 햇빛은 한국에서는 쉬이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밖에 햇빛이 엄청 따가워서 익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숙소로 돌아와 잠시 피신 중이었죠.”
-그러냐? 하긴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그 나라도 어지간히 더운 것 같더라.
어머니는 낮에 해 주는 여행 프로그램을 들먹이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을 쏟아 내었다.
정작 본인은 공항 문턱도 넘어 본 적 없지만 이색적인 경치를 구경하는 걸 좋아해 채널을 돌리다가 유럽이니 남미니 하는 말이 나올 때마다 반드시 멈춰서 들여다보곤 했다.
-어쨌든 바쁠 텐데 이만 끊어라. 항상 먹는 거 조심하고. 밖에서 아프면 약도 없잖니.
“알았어요. 어머니도 쉬세요.”
-오냐.
짧은 대화를 끝내고 길쭉한 소파에 늘어지듯 누운 혁권은 위성 전화기를 머리맡에 던져 버리곤 다리를 팔걸이에 걸쳐 대롱거렸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푹신한 침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좁은 곳에 몸을 구겨 넣는 게 더 편안할 때가 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10분만 누워 있다가 일어나야지.’
혁권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음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을 떠올리다가 그만 깊은 잠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샌더슨의 경고가 아니더라도 이번에 워낙 일을 크게 벌려 놨기에 당분간은 튀지 않고 몸을 사리고 있기로 했다.
봉제 공장은 CIA에서 넘겨준 오더 덕분에 당분간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시에라리온에 위치한 다이아몬드 역시 아직 본격적인 채굴을 시작하지 못한 데다 김덕현 전무가 알아서 잘하고 있었기에 굳이 그가 나설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미스라타 민병대와 거래를 하는 건 꾸준히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당분간은 여유가 있었다.
잠깐 한국에 들어갔다가 나올까 생각도 했지만 아직 완전히 마음을 놓긴 어려웠기에 그건 뒤로 미뤘다.
대신 그리스에 계속 머물면서 그동안 고생한 부하들한테 휴식을 주며 자신도 오랜만에 한가로운 시간을 가졌다.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서 그런지 날씨가 너무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지중해 특유의 강렬한 햇살이 거리를 가로지르는 걸음을 가볍게 했다.
오늘은 편하게 관광하듯 아테네 시내를 돌아볼 생각이었기에 승용차를 타지 않고 두 다리로 걸어 다녔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혼자서 움직이고 싶었지만 자말이 절대 안 된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하킴과 알아바디 두 명이 뒤에 서서 따라왔다.
아테네에서는 어디서나 아크로폴리스Acropolis 신전이 보인다고 하더니 고개를 조금만 들어 올리자 멀리 푸른 하늘 아래 우뚝 솟아 있는 웅장한 신전의 모습이 그림처럼 시야에 들어왔다.
신성한 느낌마저 드는 신전을 바라보며 얼마쯤 걸어가자 드디어 목적지인 아크로폴리스 미술관이 나왔다.
그리 크지 않은 미술관이었지만 현대적이면서 주위에 산적한 고대 유적지와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도록 지은 모습이 상당히 좋았다.
입장료 5유로를 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간 혁권은 진지한 얼굴로 전시된 미술품들을 하나씩 둘러봤다.
소장품 대부분이 아크로폴리스 유적지에서 발굴된 조각상들이었다.
지금도 계속 발굴과 보수가 진행 중인 아크로폴리스 유적지 발굴품들 가운데 보존 가치가 아주 높은 것들을 따로 모아 이렇게 보존을 하는 거였다.
하나 안타까운 건 한국처럼 역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희귀하고 예술적으로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상당수 외국에 반출돼 런던 대영박물관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페티멘트의 채석상과 고전기 신전 부속상은 물론이고 특이한 문양이 그리스 도자기까지, 가치 있고 흥미를 끄는 전시품들이 많아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수천 년 전 모습을 그대로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조각상들을 하나씩 볼 때마다 절로 놀라움과 탄성이 나왔다.
한참 동안 유물들을 둘러보고 나온 혁권은 근처 노천카페의 테이블에 앉아 차가운 라임 주스를 주문했다.
그늘 아래로 들어오니 그나마 살 것 같은 기분에 혁권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고 잠시 쉬고 있는데, 어디선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좀 더 아래로, 좋아. 그대로 몇 컷만 더 찍을게.”
여기선 들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익숙한 한국어였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미술관을 배경으로 한 무리의 촬영 스태프들이 둥그렇게 반원을 그리고 모여 뭔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검은 야구 모자를 쓰고 외국인처럼 턱수염을 기른 30대쯤의 사내가 한참 카메라 셔터를 누르다가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숙였던 허리를 폈다.
“잠시 휴식!”
그러자 한껏 렌즈를 향해 웃고 있던 모델들이 몸에 힘을 빼고, 동시에 뒤로 물러나 있던 여성 스태프가 달려와 파우더며 헤어 고정 스프레이를 뿌려 댔다.
“어우, 짜증 나. 여긴 왜 이리 더운 거야?”
머리카락을 구불구불하게 만 모델이 손부채를 파닥거리며 신경질을 부렸다.
“여기 원래 날씨 좋기로 유명한 나라잖아요. 게다가 지금은 여름이고.”
“다른 광고에선 되게 시원해 보였단 말이야. 그거 있잖아 청량음료 광고.”
“걔도 꽤 고생했다던데. 그래도 우린 계단 많은 골목길이 아니라서 다행이잖아요, 언니.”
“그래도 기왕이면 미술관 안에서 찍으면 시원하고 좋잖아. 거긴 에어컨도 있을 테고…… 아, 왜 밖에 나와서 이 고생이람.”
처음 말을 꺼낸 모델은 가닥가닥 잘라 붙여서 인공적으로 풍성하게 만든 긴 속눈썹을 연신 깜박이다가 땀이 눈 안에 들어갔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제대로 못 할래? 화장 다 지워지면 어쩔 거야.”
“죄송해요.”
기름종이로 콧등에 올라온 유분을 연신 찍어 내던 스태프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진짜. 하나같이 다 마음에 안 든다니까. 에이전시에 말해서 좀 더 빠릿빠릿한 애로 바꿔 달라고 해야지 원.”
“어머, 그런 걸로 치면 제일 먼저 갈아치워야 할 애가 한 명 더 있지 않아요?”
“아아. 쟤 말이지.”
딱히 누구라고 이름을 지칭한 것도 아닌데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어느 한쪽으로 쏠렸다.
거기엔 스태프와도, 다른 모델과도 딱히 어울리지 않은 채 혼자 동떨어져 있는 젊은 여성이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결이 곱고, 한 번도 염색하지 않은 것처럼 검은빛이 흘렀다.
휴식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디 의자에 걸터앉는 법 없이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는 것을 보곤 여자들 사이에서 아니꼽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쟤 또 저러고 있네.”
“촬영 중에는 절대 안 앉는다며? 다리도 안 아픈가.”
“어디서 들었는데 의상에 주름이라도 질까 봐 일부러 그러는 거래요.”
“유난이다, 유난.”
“쟤 에이전시도 없이 혼자 활동하잖아요. 케어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작은 데에도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요.”
“야, 저 정도면 구질구질한 거지. 저건 프로 의식도 뭣도 아냐.”
그녀는 옆에서 스태프가 다시 고데기로 굵게 말아 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빙글 돌리며 입술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