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82
282
“일반적인 제품도 아니고 군용 무전기라면 다른 판매처를 찾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그러니까 자네한테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닌가.”
“홍 지사장님이 못하신 일을 제가 어떻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한발 빼는 태도를 보이자 홍성완 지사장이 간절한 얼굴로 이야기를 했다.
“자네가 암거래상들하고 거래를 한다는 걸 알고 있네. 정상적인 경로라면 처분하기 어렵겠지만, 암시장을 통한다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나.”
그 말을 들은 혁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런 소린 대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날 선 목소리로 추궁하자 홍성완 지사장은 순간적인 기세에 눌린 듯 어깨를 흠칫 떨다가 눈치를 슬쩍 보고 말했다.
“자네가 나한테 부탁해서 이주시켜 온 사람들하고 거래하는 물품들을 보고 대충 짐작할 수 있었네.”
하긴 그동안 그가 보여 준 행동이 일반적인 오퍼상의 모습은 절대 아니었다.
성석호 정도는 몰라도, 이쪽 바닥에서 닳고 닳은 홍성완 지사장이라면 진작부터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조심성 없이 행동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면서 끌탕을 한 혁권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아무리 제가 그쪽에 끈이 있다고 해도 갑자기 이런 물건을 처분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러자 홍성완 지사장이 간절하게 그를 쳐다봤다.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을 하지 않나. 절반 값이라도 좋으니까 어떻게든 판매처를 구해 주게. 그럼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네.”
혁권은 팔짱을 낀 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군용 무전기처럼 용도가 한정된 물건을 원하는 구매자도 없이 처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냥 제가 돈을 빌려 드리는 건 어떻습니까?”
잠시 망설이던 홍성완 지사장은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고마운 말이지만…… 그럼 당장 구멍 난 회삿돈은 채워 넣을 수 있을지 몰라도 제품을 계속 떠안고 있어야 하니까 손해가 더 커질 뿐일 거야.”
창고 보관비만 계속 잡아먹는 악성 재고를 끌어안고 있느니, 손해를 보더라도 빨리 처분해 버리는 것이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는 길이었다.
혁권은 입을 꾹 다물고 고심했다.
몇 분 되지 않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홍성완 지사장은 피가 바짝 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혁권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에겐 정말 이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유독 한 사람에겐 너무나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 끝에, 혁권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사실 그에겐 귀찮기만 하고 딱히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이었으나, 그간의 관계를 생각해서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좋습니다. 한번 알아봐 드리지요.”
“정말인가? 고맙네!”
홍성완 지사장이 감격해서 덥석 머리라도 조아리려던 찰나 혁권이 차갑게 딱 잘라 말했다.
“대신 확실히 된다는 보장은 못 해 드립니다.”
“그거라도 어딘가. 자네가 나서 준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온 거나 마찬가지일세.”
그러면서 홍성완 지사장은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꾸벅 숙였다.
“휴우, 일이 아직 해결된 것도 아닌데 그런 인사는 접어 두시지요.”
예전 상사였던 데다 나이도 많은 이에게 계속 감사 인사를 받는 것은 생각보다 더 불편한 것이었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기껏 시킨 음식인데 손도 안 대고 있는 것은 너무 아깝지 않냐며 혁권이 말했다.
막상 먹으려고 보니 차갑게 식어 있는 음식에 혀를 찬 혁권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미안한데 이것 좀 다시 데워 줄 수 있겠나?”
“아, 알겠습니다.”
한 입이라도 먹은 흔적 하나 없이 처음 세팅 그대로인 테이블을 본 웨이터가 한순간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차분하게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5분 정도 걸립니다만 괜찮으십니까? 차를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 필요 없네.”
물로 계속 배를 채우다간 정작 음식이 다시 나왔을 땐 배가 불러서 제대로 먹지도 못할 게 뻔했다.
혁권은 정중하게 사양하고는 여전히 경황없어 보이는 홍성완 지사장에게 침착하라고 일렀다.
“그럼 제가 도와 드리기로 결정했으니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그, 그래.”
“그리고 밥도 제대로 드시는 겁니다.”
두 번이나 다시 데워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며 혁권이 하는 말에 그는 약간이나마 긴장이 풀린 듯 아까보다 훨씬 편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홍성완 지사장이 BK-600 휴대용 무전기는 민간 제품을 군용 규격에 맞도록 개조한 제품이었다.
미군이 쓰는 AN/PRC-148 휴대용 전술 무전기보다는 성능이 떨어지지만 암호화 기능과 다중 주파수 사용이 가능한 데다 유효 전파 도달 거리도 꽤 길었다.
무엇보다 SDR(Software Defined Radio)이라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어 하드웨어는 최소한으로 한 채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통신 방식, 주파수, 네트워크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덕분에 무게가 가벼워져서 900그램이 채 되지 않았다.
상용 제품들 가운데서 이 정도면 상위권에 들어가는 성능이었다.
문제는 탄약이나 총기하고 달리 무전기 같은 물건은 구매처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과, 처분해야 될 수량이 많다는 점이었다.
혁권은 받아 온 제품 제원표를 탁자에 내려놓고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300세트라…… 거의 1세트당 2만 달러 정도 되는군.”
2만 달러면 한화로 2,300만 원이 약간 넘는 액수였다.
성능과 군용품이라는 걸 감안해도 싼 가격은 아니었다.
특히나 암시장을 통해서 물건을 구매하는 상대 대부분이 주머니가 그리 넉넉하지 않은 상대라는 걸 생각하면 부담이 되는 금액이었다.
“절반까지는 네고Negotiation를 해 줄 생각이 있다고 해도 이런저런 비용을 감안하면 최소한 15,000달러는 받아야 되는데…….”
살짝 이맛살을 찌푸린 얼굴로 제품 제원표를 내려다보던 혁권은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전화를 걸었다.
연결 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상대편 목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김.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걸려고 했는데 잘됐구먼.
묵직한 음성의 주인공은 거물 암거래상인 압둘라흐만이었다.
자신보다 이쪽 세계에 아는 인맥도 많고 몇 안 되는 믿을 만한 거래 상대였기에, 혁권은 제일 먼저 압둘라흐만한테 휴대용 무전기를 구매할 곳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자료는 살펴보셨습니까?”
-제원표대로라면 꽤 성능이 좋더군. 가격이 얼마라고 했나?
“세트당 16,000달러입니다.”
나중에 흥정할 때를 대비해서 일부러 조금 높게 불렀다.
-가격도 적당하군.
걱정과 달리 상당히 긍정적인 반응에 그는 반색을 하며 물었다.
“구매할 곳이 있겠습니까?”
-몇 군데 관심을 보이는 곳이 있기는 한데, 문제는 수량이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적다는 걸세.
“얼마나 원한답니까?”
-다 합쳐 봐야 30세트를 넘는 게 고작일걸.
“흠…….”
처분해야 할 물건의 양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개수였다.
그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곤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스마트폰을 다시 고쳐 잡았다.
“좀 더 많이 처분할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찾아보면 몇 군데 더 구매처를 찾아낼 수 있겠지만, 그래도 필요로 하는 개수가 그리 많지는 않을 걸세. 솔직히 AK소총이나 탄약처럼 대량으로 필요한 것도 아니고, 있으면 좋지만 그렇다고 꼭 가지고 있어야 되는 건 아니지 않나.
핵심을 정확히 지적하는 말에 그는 살짝 인상을 쓰면서도 수긍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고스러우시겠지만 구매처를 최대한 알아봐 주십시오.”
-공짜로 해 주는 것도 아니니 염려하지 말게. 그건 그렇고 지난번에 말한 할랄 전투식량은 제때 도착하는 거겠지?
“늦어도 다음 달 중순까지는 화물을 받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시원스러운 대답에 압둘라흐만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저기 좀 더 알아보고 다시 통화하도록 하지.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통화를 끝낸 혁권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짧게 신음을 뱉어 냈다.
“흠…….”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물량을 한 번에 받아 줄 구매자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다행히 제품 성능이 나쁘지 않아 서두르지 않고 길게 시간을 두고 찾아본다면 물량은 다 처분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구멍 난 회삿돈을 메워 넣어야 되는 홍성완 지사장한테는 참고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잠시 고심하던 혁권은 일단 자신의 돈으로 제품을 산 뒤에 천천히 구매처를 찾아 처분하기로 결정했다.
손이 많이 가는 번거로운 일이긴 해도 여태껏 홍성완 지사장이 해 준 걸 생각하면 이 정도쯤은 감수할 만했다.
그리고 앞으로 사업을 하는 데 태일물산의 잘 갖춰진 네트워크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홍성완 지사장이 필요했기에, 투자를 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혁권은 다시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익숙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됐나?
이런저런 말 없이 바로 결과만 물어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싶어 쓴웃음이 났다.
“오더 받은 액수의 절반 정도만 회수하면 된다고 하셨지요?”
-그럼 그것만 건져도 감지덕지지. 구매자가 있는 건가?
서둘러 묻는 말에 그는 차분히 이야기를 했다.
“320만 달러 정도면 어떻습니까?”
-나야 당연히 좋지. 결제는 현금으로 해 주는 거겠지?
“물론이죠.”
-그렇게 해 주게.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확인하듯 재차 묻자 홍성완 지사장이 한결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대로 있으면 돈 한 푼 못 건지고 악성 재고로 물건을 몽땅 떠안게 될 판인데, 절반이라도 건지는 것이 어딘가.
“이렇게 처분한다고 해도 여전히 메워 넣어야 될 액수가 부족하지 않습니까?”
-그건 따로 구할 데가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조금 염려가 됐지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하니 혁권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320만 달러를 주고 군용 휴대용 무전기를 넘겨받더라도 압둘라흐만과 이야기한 것처럼 한 세트당 16,000달러 정도에 판다면 손해 보는 거래가 아니었다.
“그러시다면 지금 바로 320만 달러를 보내 드릴 테니 계좌 번호를 알려 주십시오.”
-그래 줄 수 있겠나?
언제 회삿돈에 구멍이 난 걸 들킬지 몰랐기에 노심초사하고 있던 홍성완 지사장은 반색을 했다.
“어차피 드릴 돈인데 조금 더 빨리 보내 드린다고 해서 바뀔 것이 없지 않겠습니까.”
한두 푼도 아니고 큰돈이 오가는 만큼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았기에 홍성완 지사장은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이번 일 절대 잊지 않겠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힘든 일이 있으면 지사장님도 절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당연하지.
“그거면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얼마 있지 않아 금방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12자리 숫자의 나열.
홍성완 지사장이 보낸 계좌번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