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96
296
가재미눈을 뜨고 살짝 혁권을 흘겨본 소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혁권은 가볍게 가속 페달을 밟아 승용차를 출발시키면서 대답했다.
“재미있을 것 같은 영화가 있어서 예매해 뒀어.”
“무슨 영화인데요?”
“로맨스 코미디.”
“그런 것도 봐요?”
“그 반응은 뭐야? 내가 그럼 영화관에 가면 펑펑 터트리고 부수는 액션 영화만 보는 줄 알았어?”
“그러는 거 아니었어요?”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거든.”
그의 일상이 액션 영화보다 더 다이나믹한데 굳이 휴식을 취할 때까지 총을 쏘고 부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영화 보러 간 지가 꽤 됐는데, 잘됐네요.”
“그 전에 저녁부터 먹어야지?”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영화를 보면 밤이 되어 있을 테니 먼저 먹고 들어가는 것이 나았다.
“오늘은 조금 가벼운 메뉴로 골라요.”
“왜?”
“말했잖아요, 체중 관리해야 된다고.”
운전을 하며 힐끔 옆에 탄 소현을 쳐다보면서 그가 말했다.
“지금도 딱 보기 좋은데…….”
그러자 소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봐줘서 고맙기는 한데 사진에 잘 나오고 무대에서 다른 모델들한테 뒤처지지 않으려면 더 빼야 돼요.”
“지금 몸무게가 몇인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현이 눈을 매섭게 치켜뜨고는 그를 노려봤다.
“그거 아주 위험한 질문이라는 것 알고 하는 말이죠!”
“아,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권총 총구 앞에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았던 혁권인데 소현의 도끼눈 앞에선 절로 몸이 움츠려졌다.
“두 번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알았어…….”
정말 반 토막을 내 버릴 듯한 기세였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혁권은 한껏 주눅이 들어 시무룩한 표정으로 핸들을 붙잡은 양손을 생명줄인 양 꼭 부여잡고는 조용히 운전만 계속했다.
같은 시각 심인성은 직속상관인 도병진 국정원 3차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날카로운 인상의 도병진 3차장은 등을 뒤로 비스듬히 기댄 채 손에 든 서류를 천천히 살펴보고 있었다.
40대 중반의 도병진은 국정원장을 보좌하며 실질적으로 조직을 이끌어 가는 세 명의 실세 중 한 명이었다.
맡고 있는 분야는 대북 공작과 과학, 산업, 방첩 업무 등이었다.
여우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고 상황 판단이 빠를 뿐만 아니라 부하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도 가지고 있었다.
심인성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얼마쯤 기다렸을까 마침내 검토를 모두 끝낸 도병진 3차장이 서류철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회사원 출신의 암거래상에 CIA하고 연결된 흔적까지 있다라…… 아주 특이한 이력을 가진 놈이군.”
“최근에는 시에라리온에서 다이아몬드 광산까지 인수해 운영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손가락 끝으로 턱을 쓸면서 도병진 3차장이 말했다.
“정말 흥미롭군. 그런데 이자가 이번 일을 해결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까지 고려해 본 방법 중에 가장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보고서에도 적혀 있지만 리비아 정권 중요 인사들과 상당히 깊은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도병진 3차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다른 쪽 라인으로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협상 창구 하나 마련하지 못했으니 확실히 접근이 유리하기는 하겠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자 심인성이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이면서 말했다.
“문제는 일을 하도록 만들려면 적당한 대가를 줘야 될 거라는 겁니다.”
“그거야 두정그룹 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그런 것까지 우리가 관여할 필요는 없지 않겠나.”
“그 말씀도 맞습니다.”
“솔직히 예전 같으면 이런 일은 우리가 끼어들지도 않았을 거야.”
“그렇긴 합니다만, 어찌 됐건 국익에 관계된 일이니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냉전 시절 홍콩과 일본을 오가면서 북한 공작원들하고 치열한 첩보전을 벌였던 도병진 3차장은, 정보기관의 본질에서 약간은 벗어난 일을 하는 것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맡은 임무를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시대가 바뀐 만큼 뒤처지지 않으려면 거기에 맞춰 변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정원이라는 조직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가 국가의 이익과 안위安危를 지키는 거였기에, 필요하다면 어떤 일이든 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거기다 이미 쓸 수 있는 방법을 다 시도해 봤기에 딱히 다른 카드도 없었다.
“내일 만나기로 했다고?”
“그렇습니다.”
심인성의 대답에 도병진 3차장은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면서 결정을 내렸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까. 자네 생각대로 진행해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도병진 3차장은 보고서에 첨부되어 있는 혁권의 사진을 내려다보며 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김혁권이라…….”
상사 직원이었다는 이력도 특이했지만 짧은 시간에 암거래 상으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영화를 보고 분위기 좋은 곳에 가서 차茶도 한 잔 마신 혁권은 소현을 옆에 태우고 그녀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술까지 마셨으면 좋았겠지만 운전을 해야 되는 데다 소현이 내일 아침 일찍 일을 하러 가야 된다고 해서 그건 다음으로 미뤘다.
“그럼 내일 부산에 내려가면 언제 올라오는 거야?”
“패션 위크 준비를 하고 무대까지 서야 되니까 일주일은 꼬박 부산에서 머물러야 될 거예요.”
“뭐가 그렇게 오래 걸려?”
혁권이 약간 불만스럽게 이야기하자 소현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냥 무대에 올라가서 걷기만 하는 건 줄 알았어요. 연출하는 콘셉트에 맞춰야 되고 모델들 사이의 동선까지…… 준비해야 되는 것이 얼마나 많다고요. 거기다가 난 사흘 동안 무대를 3개나 뛰어야 된다고요.”
“그러면 하루에 한 번씩 무대에 오르는 거야?”
“중간에 하루 쉬고 마지막 날에 오전 오후 두 번요.”
“제대로 쉬지도 못하겠네. 일정이 너무 빡빡한 거 아니야?”
“이것보다 더할 때도 있는데요, 뭐. 그리고 모델은 누군가한테 선택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기에 바쁘다는 건 그만큼 다른 사람들한테 인정을 받는다는 뜻이니까, 오히려 기뻐해야 되는 거죠.”
“듣고 보니 그러네.”
모델의 화려한 면만 좇는 것이 아니라 나름 확고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모습에, 그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소현을 봤다.
“소현이, 넌 꿈이 톱모델이 되는 거겠네?”
“일단 첫 번째 목표는 그거예요.”
“모델 말고도 다른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거야?”
그러자 소현이 부끄러운지 약간 주저하며 이야기했다.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기회가 닿으면 연기도 한번 해 보고 싶어요.”
“연기?”
뜻밖의 말에 그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 봬도 고등학교 때까지 연극부 활동을 했었거든요. 졸업 공연 때는 줄리엣 역할도 맡았었어요.”
“이야.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리엣이었겠는데.”
“놀리지 마요.”
눈을 살짝 흘기면서도 그다지 싫지는 않은 얼굴이었다.
예쁘다는데 기분 나빠할 여자는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거기다가 상대가 호감을 가지고 있는 남자라면 더욱 그럴 터였다.
어느새 오피스텔 입구에 도착한 혁권은 천천히 승용차를 멈춰 세웠다.
“오늘 재미있었어요.”
“잠깐만.”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소현을 불러 세운 그는 대시보드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조수석 앞에 있던 글러브 박스가 덜컥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안에 선물 박스 하나 있지?”
“네.”
“선물이야.”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소현은 깜짝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이게 뭐예요?”
“열어 봐.”
포장을 풀고 나온 가죽 케이스를 열자 백화점 매장에서 구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다시 봐도 그녀와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어머. 이건 목걸이잖아요.”
“어제 만났을 때 목이 허전한 것 같아서 하나 준비했어. 어때, 마음에 들어?”
“좋기는 한데 이거 꽤 비싼 브랜드 아니에요?”
모델답게 브랜드를 금방 알아보곤 약간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혁권이 시선을 가볍게 넘기면서 말했다.
“어디 어울리는지 한번 해 보자.”
목걸이를 집어 든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소현이 몸을 뒤로 돌려 보이기 쉽도록 머리카락을 옆으로 쓸어내렸다.
모델은 보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식비를 줄이는 한이 있더라도 머릿결이나 손톱 관리는 빼먹지 않고 한다더니, 검은 생머리가 마치 비단결처럼 스르륵 흘러내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가느다란 목선에 혁권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햇빛을 보지 않아서 유독 하얗게 보이는 목덜미가 흑발과 대비되어 마치 한 폭의 미인도 같았다.
“뭐 해요?”
“아, 으응.”
소현의 재촉에 퍼뜩 정신을 차린 혁권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목걸이를 걸어 주고는 됐다, 하며 뒤로 물러섰다.
“어때요. 잘 어울려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묻는 소현의 말에 혁권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 어울려. 예쁘다.”
마치 처음부터 소현만을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너무나도 완벽하게 잘 어우러졌다.
다이아몬드라는 것이 제일 화려한 보석이니만큼 가끔은 얼굴이나 옷차림에 조화되지 못하고 밀리는 경우도 있는데, 소현은 오히려 안색이 더욱 환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는 직업을 가지고 있어서 더 그런지 몰라도, 아무리 평범한 옷을 입고 있어도 옷 태가 어딘지 다른 것처럼 몸에 걸치는 장신구 역시 본래 제 주인을 찾아간 듯 안정되어 보였다.
목걸이 하나 걸친 것뿐인데 이 정도로 빛이 난다면 지금보다 더 세세하게 꾸몄을 땐 과연 얼마나 아름다워질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혁권은 앞으로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은 느낌에 왠지 모르게 들뜬 기분으로 소현을 칭찬했다.
“그만 좀 해요, 민망해서 얼굴 다 닳겠네.”
부끄럽다며 소현이 핀잔을 주었지만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으로 거울을 은근슬쩍 확인하는 옆모습에 기쁜 기색이 완연했다.
마음에 드는지 한쪽 손으로 목걸이를 계속 쓰다듬던 소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혁권을 봤다.
“이렇게 비싼 선물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해 주고 싶어서 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정 부담되면 나중에 커피라도 한 잔 사.”
혁권의 말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집에 같이 들어가서는 못 타 줘도 커피숍에서라면 얼마든지 살게요.”
재치 있는 그녀의 대답에 그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래.”
“그럼 부산에 다녀와서 봐요.”
차 문을 열고 내린 소현이 손을 흔들고는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가자 혁권은 핸들을 돌리면서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