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297
297
다음 날 사무실에 출근해 간단히 업무를 본 혁권은 하킴과 알아바디만 데리고 강남에 위치한 고급 한정식 집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심인성이 먼저 와서 별실을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종업원이 열어 주는 미닫이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심인성이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렇군요.”
상대가 먼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가볍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식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한창 바쁠 점심시간이었지만 홀과 따로 떨어진 별실이라 조용하고 다른 손님들의 시선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종업원이 방어회와 대하 구이를 가지고 들어왔다.
“바쁘실 것 같아서 제가 미리 주문을 해 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습니다.”
테이블 가득히 밑반찬을 깔고 회와 구이를 두 사람 앞에 먹기 좋게 내려놓은 뒤 종업원이 조용히 인사를 하고 룸을 나가자 심인성이 먼저 술을 권했다.
“한 잔 받으시지요.”
따뜻하게 데운 사케는 서늘한 가을 날씨에 딱 어울리는 술이었다.
“그럼 감사히…….”
혁권한테 먼저 사케를 따라 주고 자기 것에도 찰랑거릴 정도로 채운 심인성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으음. 역시 좋군요. 배 속부터 따끈해지는 느낌입니다.”
단번에 잔을 비운 심인성이 너스레를 떨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를 보며 말했다.
“만나자고 한 용건이 뭔지 말씀해 보시죠.”
“식사나 다 끝내고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성격이 급하시군요.”
“불편한 자리에 있으면 소화가 잘 안 되는 편이라서요.”
그다지 내키지 않은 만남이라는 걸 혁권이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심인성은 역시 노련하게 받아넘겼다.
“아직 불쾌한 마음을 다 지우지 못한 모양이군요. 나쁜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찌 됐건 다시 한 번 사과를 드리지요.”
그러면서 심인성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계속 화를 낸다면 자신만 속 좁은 사람이 되는 거였기에 혁권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가 바로 하곤 사과를 받아들였다.
“앞으로는 절대 똑같은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물론입니다.”
약속을 한다고 해서 과연 그대로 지킬지 솔직히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이쯤 하고 넘어갔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용건을 이야기해 보시죠.”
자세를 바로 한 심인성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용건을 꺼냈다.
“혹시 트리폴리 서부 발전소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고 계십니까?”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가 머리를 가로젓자 심인성은 예상했다는 듯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을 계속했다.
“일반인들한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일이니 모르실 수도 있을 겁니다. 부족한 리비아의 전력량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수도인 트리폴리에서 서쪽으로 2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 대규모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는 프로젝트입니다. 350MW급 발전기 4개를 세워 총 1,400MW의 전력을 트리폴리와 주변 지역에 공급하도록 되어 있지요, 공사액만 6억 8천만 달러 한화로 8,000억이 넘는 큰 공사입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혁권의 얼굴을 살핀 심인성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 갔다.
“리비아 전력청의 발주를 받아 국내 기업인 두정건설에서 공사를 진행해 계획대로 모든 설비를 완성시키고 시험 가동까지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터지고 말았지요. 바로 리비아에서 민주화 혁명이 일어나 대통령이었던 카다피가 죽고 정권이 무너진 겁니다. 이걸로 인해서 발전소 공사 대금 가운데 3억 8천만 달러를 받지 못하고 허공에 붕 떠 버리게 되고 말았지요.”
혁명 이후 정세를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하고 곧바로 리비아 전체가 종교와 부족 그리고 신념에 따라 갈기갈기 찢겨 내전 상태로 들어갔기에 카다피 정권 시절 벌였던 수많은 토목 공사들이 그대로 올 스톱되고 말았다.
예전부터 한국 건설 업체들의 진출이 활발했던 지역인 만큼 당연히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군요. 그런데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공사 미수금을 김 사장님이 좀 받아 줬으면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숨을 내뱉으며 그가 말했다.
“그걸 왜 저한테 해 달라는 겁니까? 그리고 국정원에서 이런 일까지 개입하는 건 오늘 처음 알았군요.”
약간 빈정대는 말투에 심인성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닙니다만 미수금 중에 1억 달러가량을 국책 은행에서 대출을 해 준 관계로 만약 이대로 회수가 안 된다면 고스란히 국민 세금으로 메워 넣어야 할 판입니다. 거기다가 국내 업체가 외국에서 돈을 받지 못한다면 그만큼 국익에 손해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은 그럴듯했지만 혁권은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렇다고 쳐도 두정 같은 큰 회사나 정부에서도 못하는 일을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지만 부탁할 곳을 잘못 찾은 것 같군요.”
“트리폴리 정부 실세인 이스라 모함메드 석유부 장관과 상당히 각별한 사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그 외에도 알할부시 미스라타 민병대 사령관을 비롯해 리비아에 아주 많은 인맥을 가지고 있으시더군요.”
“뒷조사를 한 겁니까?”
나직하게 깔린 목소리에 은은하게 불쾌한 기색이 묻어났다.
“아니, 해결 방안을 찾다 보니 우연히 발견한 사실입니다. 결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흠…….”
어딘가 미심쩍긴 했으나 지금 여기서 추궁해 봤자 순순히 입을 열 위인도 아니었다.
그보다 이런 말을 꺼낸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혁권이 일단 넘어가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이니 심인성이 이어 말했다.
“리비아에 이런 인맥을 가지고 있고, 사업적 수완도 탁월하시니 뭔가 다른 해결책을 찾아 줄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부탁을 하는 겁니다.”
이에 별다른 대꾸 없이 혁권은 손을 뻗어 술잔을 집어 들었다.
일부러 느긋하게 잔을 기울여 입술을 축이면서, 그는 잠시 생각했다.
“모함메드 장관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이건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막말로 가뜩이나 계속된 내전과 석유 생산 위축으로 인해 트리폴리 정부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은데, 카다피 정권이 추진한 사업 대금을 지불하려고 하겠습니까. 백번 양보해서 설사 그럴 의사가 있다 해도 그렇게 하면 다른 공사 미수금도 다 받으려고 덤벼들 테니 저 같아도 절대 대금을 지불하지 않을 겁니다.”
괜히 틈을 주면 피곤해질 수 있었기에 그는 아예 단호하게 거절했다.
“쉽지 않은 상황이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보다 그쪽 사정에 밝은 김 사장님이라면 돌파구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딱 자른 거절에도 불구하고 심인성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러지 말고 시간을 가지고 좀 더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처음부터 고개를 끄덕여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반응이었다.
“제 대답은 마찬가지일 테니 크게 기대하지 마십시오.”
“김 사장님한테도 나쁠 건 없을 테니 긍정적으로 한번 고려해 보십시오.”
혁권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심인성은 눈치껏 이쯤에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고는 식사를 하며 가벼운 대화를 이어 갔지만 자리가 불편해서인지 그는 음식에 별로 손이 가지 않았다.
일식집을 나와서 승용차 뒷좌석에 탄 혁권은 찝찝한 기분에 좀처럼 굳은 얼굴을 펴지 못했다.
자신보고 공사 미수금을 받아 오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다시 생각을 해 봐도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를 불러 이런 부탁을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재정이 부족해 카다피가 지금껏 모아 뒀던 미술품까지 헐값에 은밀히 내다 팔아 자금을 충당하는 상황에서 한국 업체를 위해 거액의 돈을 내놓을 리가 만무했다.
어려운 일이라면서 딱 잘라 거절하고 나왔지만 이상하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흐음.”
살짝 눈썹을 찡그린 채 가죽 시트에서 머리를 뗀 혁권은 안주머니에 넣어 둔 스마트폰을 빼 들었다.
액정에 뜬 시간을 보자 이제 막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장되어 있는 번호를 누르고 신호음이 서너 번쯤 울리자 홍선호 부장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쉬고 있는데 전화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군.”
-아. 사장님, 괜찮습니다.
홍선호 부장은 단번에 누구 목소리인지 알아듣고는 얼른 대답했다.
바짝 긴장한 홍선호 부장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다른 일이 아니고 한 가지 지시할 것이 있어서 전화를 걸었네.”
-말씀하십시오.
“두정건설이 리비아에 건설한 트리폴리 서부 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 대해서 좀 알아봐 줬으면 좋겠어.”
-트리폴리 서부 화력발전소 프로젝트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프로젝트가 어떤 식으로 진행됐는지 특히 자금 관계에 대해서 자세히 파악해 놓도록 해.”
-언제까지 보고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빠를수록 좋아.”
-알겠습니다.
여전히 부탁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지만 그래도 호기심에 어떤 상황인지 한번 알아보려는 거였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지는 말고 꼼꼼하게 조사를 해 오도록 해.”
-염려 마십시오.
통화를 끝낸 혁권은 다시 몸을 등받이에 대고는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태일그룹 역시 이집트에서 대규모 아파트 단지 공사를 하고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100달러 대를 유지하다가 폭락한 유가(Oil Price)와 중동 지역의 정세 불안에 최근 몇 년 사이 이런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일정 부분은 한국 건설 업체들이 미수금 규모가 커지는 걸 자초한 것도 있었다.
고유가 특수를 노리고 경쟁적으로 중동 건설 시장에 진출하다 보니까 한국 업체들 간에 필요 이상의 과열 경쟁이 벌어졌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가 수주와 불리한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확한 건 홍선호 부장의 보고를 들어 봐야 되겠지만 두정건설이 시공한 서부 발전소 프로젝트 역시 그럴 가능성이 아주 컸다.
검은 황금이 쏟아지는 중동 지역은 여전히 기회의 땅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모하게 덤벼들었다가는 사막의 모래지옥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수도 있었다.
이건 혁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항상 살얼음판 위를 걷듯이 신중에 또 신중을 기하면서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그사이 승용차는 한강 다리 위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퇴근 시간이라 그런지 차들이 꽉 막혀 거북이걸음을 했다.
빨간 브레이크 등을 켠 채 차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새삼 서울에 돌아온 걸 느낄 수 있었다.
홍선호 부장이 자세히 조사를 한다고 해도 리비아 현지 상황까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었다.
특히나 내전이 수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는 데다 현지 한국 대사관마저 철수한 상황이라서 더욱 정보를 알아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리비아에 기반을 착실하게 다져 둔 혁권한테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었다.
다음 날 운동을 하기 위해 시내에 위치한 호텔 피트니스 센터를 찾은 그는 진동으로 해둔 스마트폰이 울리자 러닝머신에서 내려왔다.
-보스, 저 자말입니다.
“그래, 지시한 건 알아봤어?”
하킴한테 건네받은 수건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아 내면서 혁권이 물었다.
-네. 트리폴리에 있는 정보원을 시켜서 직접 현장을 살펴보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됐어?”
-내전 중에도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겉보기에 멀쩡해 보였다고 합니다. 정부군 소속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서 내부까지는 살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어찌 됐건 다행이군.”
전쟁이 벌어지면 전력을 생산하는 발전소는 최우선 목표에 들어가는 전략 시설이었기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고 남아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더군다나 공사 미수금이 있는 상태에서 발전소 시설이 파괴됐다면 더욱 돈을 받기 어려워졌을 터였다.
자신 같아도 이미 부서지고 없는 시설이라면 더욱 미수금을 주지 않으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문제라니?”
-설비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가동시킬 기술자가 없어서 전기를 생산하지 못하고 그대로 놀려 두고 있는 실정이더군요.
그러자 혁권은 머릿속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운용 방법을 다 배우지 못한 상태에서 한국 기술자들이 철수한 모양이군.”
-그렇습니다. 부족한 전력량을 메우려고 트리폴리 정부에서 무리하게 가동을 시켜 보려다가 발전기 하나를 고장 낸 이후로는 그냥 경비만 세워 두고 방치하는 상태라고 합니다.
리비아에도 전문 기술자가 있을 테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장비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발전 설비를 가동시키기는 어려울 터였다.
괜히 손을 댔다가 더 망가뜨릴 것 같으니까 아예 나중에 사정이 좋아지면 다시 쓸 생각으로 시설만 지키고 있는 것이다.
대충 상황이 짐작된 혁권은 젖은 수건을 옆에 내려 두면서 말했다.
“다른 정보가 있으면 바로 연락하도록 해.”
-그런데 갑자기 서부 발전소에는 왜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그냥 좀 흥미가 생겨서 그래.”
충분치 않은 대답이었지만 때가 되면 알아서 혁권이 이야기해 줄 거라고 생각했기에 자말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통화를 끝낸 혁권은 물통을 들어 목을 축인 뒤 다시 러닝머신에 올랐다.
잠시 몇 분 쉬었다고 그사이 땀이 식어 몸이 차가워진 느낌이었다.
혁권은 러닝머신의 기울기를 높이고 방금 전보다 속도를 더 빠르게 설정한 후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도록 뛰는 것에만 열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