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00
300
소현이 부산에 내려가고 없었기에 혁권은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덜컹.
“저 왔어요.”
그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허리에 앞치마를 두룬 채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셨다.
“오늘은 일찍 왔네.”
“예.”
1년 중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고 그나마 한국에 들어와서는 여자를 만나러 다닌다고 매일 늦게 들어왔던 것이 켕긴 혁권은 슬쩍 대답을 얼버무렸다.
“금방 저녁을 해 줄 테니까. 씻고 나와.”
“천천히 하셔도 돼요. 아버지는요?”
“오늘 좀 늦으실 거야. 일 끝내고 한잔하고 들어오신다네.”
“요즘도 술 많이 드세요?”
“네 아버지 유일한 낙이잖니. 이제 나이도 있어서 적당히 마시면 좋겠는데…… 걱정이야.”
마음에 안 드는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어머니를 보며 그는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었다.
씻고 나오자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났다.
“오늘은 콩나물국이에요?”
“그래. 날도 쌀쌀해지는데 뜨끈하게 먹으라고.”
“예.”
딱 봐도 밤에 술을 드시고 들어오실 아버지가 해장을 하시도록 끓인 국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입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은근히 아버지를 챙기시는 모습에 그는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다 되려면 조금 더 있어야 되니까 거실에서 텔레비전이라도 보고 있어.”
“알았어요.”
부엌을 나온 혁권은 리모컨을 찾아 들고는 소파에 앉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 봐도 딱히 흥미를 끄는 것이 없자 그냥 뉴스를 틀어 놨다.
-다음 뉴스입니다. 핵 협상을 마무리 짓고 화해 무드를 보이던 미국과 이란이 최근 20억 달러 규모의 동결 재산을 두고 큰 갈등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 돈은 이란 혁명 당시 미국 시티은행에 예치되어 있다가 재제 조치에 따라 동결된 자금입니다. 미국 대법원은 1983년 10월 발생한 레바논 베이루트 미 해병대 병영 폭파 테러와 관련해서 배후로 이란을 지목하고 미국 국내에 동결되어 있는 이란 자산을 배상금으로 쓰라고 판결했습니다. 여기에 9.11테러와 관련해서도 희생자들에게 거액의 배상을 하라는 법안이 국회에 계류되어 있어 향후 큰 외교 마찰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시티은행 계좌를 비롯해서 미국과 전 세계에 동결되어 있는 이란 자금이 무려 수백억 달러에 달한다는 앵커의 이야기에 그는 혀를 내둘렀다.
“역시 산유국이라고 해야 되나? 대단하네.”
한두 푼도 아니고 한화로 수십조 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돈이 해외에 묶여 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혁권은 눈을 번득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만…… 민주화 혁명이 벌어지면서 서방 국가들이 해외에 은닉해 놓은 카다피의 비자금을 동결해 놓은 것도 액수가 꽤 될 텐데…….”
러시아에 이어서 세계 9위라는 막대한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리비아였기에 수십 년간 철권통치를 해 온 카다피가 얼마나 많은 비자금을 숨겨 놨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걸 잘만 이용한다면 뭔가 그림이 그려질 것 같은데…….”
혁권은 팔짱을 낀 채 방금 떠오른 생각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진지하게 고심했다.
그때 저녁 준비가 다 됐는지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다 됐으니까 어서 와.”
“예.”
중간에 생각이 끊기는 바람에 아쉬웠지만 일단 배는 채우고 봐야 했다.
게다가 어머니가 밥을 차려 주시는데 계속 기다리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혁권은 입맛을 다시면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패션 위크가 시작하는 건 사흘 후지만, 그 준비를 위해선 상당히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야만 했다.
“마지막에 턴할 때 핸드백이 좀 더 잘 보이도록 위로 들어 줘요. 그래, 그렇지.”
머리카락을 형광핑크색으로 물들인 디자이너가 한 손에 핸드 마이크를 든 채 무대에서 워킹을 하는 모델들에게 이것저것 주문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쇼에 관련된 거의 모든 스태프들이 다 나와서 최종 점검 중이었는데, 덕분에 머리 위에선 커다란 조명들이 흰색, 붉은색, 노란색으로 바뀌었다가 배경 효과에 쓸 레이저까지 깜박거리면서 벽과 바닥을 비추어 댔다.
소현은 다른 모델들과 마찬가지로 상체와 다리 움직임이 잘 보일 수 있게 짧은 핫팬츠와 티셔츠를 입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리허설을 진행했다.
벌써 몇 번이나 무대를 왔다 갔다 하며 걸어 다닌 탓에 굽 높은 하이힐을 신은 발바닥이 뻐근해져 왔지만 쇼의 주인인 디자이너는 뭔가 계속 체크하고 싶은 것이 많은지 어지간해선 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포즈 취할 때는 너무 밝게 웃지 말고.”
자기 쇼의 테마는 시크하면서도 섹시한 거라고 디자이너가 외쳤다.
지적을 받은 모델은 네, 하고 대답하면서도 그가 정확히 어떤 느낌을 원하는 건지 잘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으나 워낙 패션계는 정체불명의 영어가 난무하는 곳이라 대충 자신이 눈치로 알아들을 수밖에 없었다.
디자이너 옆에는 무대연출을 맡은 감독과 모델 캐스팅 담당자가 함께 구경하러 나와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번 패션 위크에서 꽤 주목받는 쇼가 될 거라고 예상한 건지 업계에서도 중견 이상 급이 모여 있었다.
덕분에 가볍게 진행하는 리허설도 잔뜩 힘이 들어간 채로 워킹을 해 대니 다들 평소보다 일찍 피로해진 듯 무대 뒤에 순서를 기다리며 모여 있을 땐 벽에 불량한 자세로 기대 있거나 쪼그려 앉아서 쉬는 등 요령을 부리는 이들도 조금씩 늘어났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외국 여가수의 음악이 잠시 흘러나왔다가 끊긴 사이, 디자이너와 무대감독에게 헤드폰을 쓴 스태프가 달려와 뭐라 귓속말하자 감독이 손뼉을 크게 쳐서 모델들의 이목을 모았다.
“30분 쉬었다가 조명이랑 음악까지 다 넣어서 최종 리허설을 진행할게요. 모델 분들은 백 스테이지에서 대기해 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다 함께 허리를 숙여 스태프들에게 인사한 뒤 소현도 동료 모델들에 섞여 무대 뒤로 내려갔다.
흔히 백 스테이지라고 불리는 이 공간은 모델들이 쇼를 위해 준비하면서 대기하는 장소인데 아무래도 화장이나 머리 손질 같은 것에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패션 위크 기간이면 무대보다 여기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 피곤해.”
소현은 의자에 앉자마자 거의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입에 담으면서 핸드백을 뒤져 지압봉을 꺼냈다.
발바닥의 움푹한 부분을 지압봉으로 꾹꾹 누르다가 반대쪽에 달린 동그란 구슬 같은 것으로 데굴데굴 굴리니 찌릿찌릿하면서 뭉쳐 있던 것이 풀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혁권이 이걸 보면 할머니 같다고 놀리겠지만 어쨌든 모델에겐 필수품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러고 보니…….”
혹시 문자라도 한 통 왔을까?
패션 위크 기간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예정이라 전화해도 못 받을 수 있다고 미리 말을 해 두긴 했지만 그래도 힘내라는 문자 정도는 보냈을지 모른다.
작은 기대를 품고 핸드폰을 켜자 아니나 다를까 액정 화면 위로 메시지 한 통이 떠올라 있었다.
-열심히 잘하고 있어? 오늘 아침에 보니까 예쁜 꽃이 피었기에 사진을 찍어 봤어. 날이 많이 쌀쌀해졌는데도 꽃이 피어 있다니 놀랍지.
어느 집 담벼락에 핀 것을 찍었는지 노란 꽃 사진이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생긴 건 봄꽃처럼 작고 귀여운데 어디 하나 꽃잎 색깔 바랜 곳 없이 생생하게 활짝 피어 있는 것이 신기했다.
시간을 보니 아침 8시에 온 문자였다.
답장을 보내기에는 이미 한참 늦었지만 혁권이 아무 때나 상관없다고 했으므로 소현은 주저 없이 문자판을 눌렀다.
-사진 지금 봤어요. 꽃이 너무 예쁘네요. 부산은 서울보다 날씨가 무척 따뜻해서 밖에 나가 보면 아직 남아 있는 꽃이 많을 것 같은데, 계속 일하느라 구경할 정신이 없어요. 지금은 리허설 중에 잠깐 쉬는 타임인데 이거 끝나면 다른 데로 또 이동해야 돼요.
그러자 마치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혁권에게서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저런 불쌍해라. 밥은 먹고 일해?
소현은 막 입가에 대려고 하던 텀블러를 흠칫하고 허공에서 멈춰 세웠다.
바나나 반개에 자몽 반개, 샐러리 그리고 저지방 우유를 조금 넣고 갈아서 만든 주스였다.
물론 그마저도 한 끼 식사가 아니고 오늘 하루 먹을 치였으나 혁권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걱정할 것이 틀림없었으므로 일단은 숨기기로 했다.
-물론이죠. 이런 때일수록 체력이 필요한 걸요. 아침도 든든하게 먹고 나왔어요.
-그럼 다행이고. 난 또 저번처럼 사과 한 알로 끼니를 때우는가 싶었지.
“윽.”
정곡을 찔린 소현은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묘하게 이상한 데서 날카로울 때가 있다니까.
-나도 부산에 보러 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만 하지 말고 진짜 오지그래요?
때마침 화제가 바뀐 것에 감사하며 소현이 다시 답장을 보냈다.
-그리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멋진 자동차 타고 나타나서 날 구해 주러 와요. 동화에서도 백마 탄 왕자님이 공주님을 데리고 단둘이 떠나잖아요.
-진짜 그럴까?
-할 수만 있다면요.
반쯤은 장난으로 보낸 것이었으나 제법 진지하게 대꾸하는 것이 우스워 킥킥 웃었다.
-알았어. 갈게.
“으음?”
근데 너무 진지한 것 아닌가.
소현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진짜 혁권이라면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겠다 싶어 황급히 답장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설마 진짜로 받아들인 건 아니죠?
일 때문에 바쁜 사람을 자기 때문에 오라 가라 하는 것도 싫거니와, 패션 위크 기간엔 사방이 다 동종 업계 사람들뿐인데 또 괜히 묘한 소문이라도 퍼지면 더 이상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채나영과 그 무리도 있지 않은가.
소현은 어제 호텔 프런트 앞에서 있었던 말다툼을 떠올리며 불쾌한 듯 미간을 모았다.
“누구는 아주 여유롭네. 다들 리허설 준비하느라 바쁜 거 안 보여?”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뒤에서 누군가가 툭 하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돌아보니 어제 채나영과 함께 있던 손주아였다.
“혼자 스마트폰이나 만지작거리면서 낄낄거릴 시간 있으면 워킹 연습이나 더 하고 오지그래.”
그러자 소현의 눈매에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다른 건 몰라도 워킹 연습만큼은 매일 빠지지 않고 하는 그녀다.
밥을 굶는 한이 있더라도 학원비를 꼬박꼬박 내 가면서 출근도장을 찍는 것은 물론이고, 연습이 없는 날에도 집에서 한 시간 이상은 하이힐을 신고 걷는 연습을 했다.
워킹도 그냥 걷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최대한 굽히지 않고 채찍처럼 곧게 뻗으면서 다리가 길어 보이도록 하는 방법이 있고,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사뿐사뿐 걷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엉덩이를 살짝 흔들면서 리듬감 있게 걷는 등 여러 가지 방식이 있었는데 그걸 다 몸에 익히기까지 돈과 시간을 얼마나 투자했는지 모른다.
요즘엔 화보를 전문으로 찍는 일이 많아서 워킹을 등한시하는 모델도 많지만 소현은 적어도 기본기만큼은 충실하게 다져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꾸준하게 연습했다.
그런데 소현의 자존심이나 다름없는 부분을 건드리다니.
아무리 선배라도 여기서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는 건 그 동안의 노력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결국 소현 역시 뾰족하게 날 선 태도로 대꾸하고야 말았다.
“놀고 있는 게 아니라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제 워킹 실력에 불만이 있으시면 캐스팅 담당자랑 디자이너님에게 직접 얘기하지 그러세요? 그분들이 절 보고 마음에 들어 해서 뽑으신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