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14
314
매일 뚝뚝 떨어지는 기온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행인들은 코트 깃을 높이 세우고 손은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크리스마스라는 생각에 그는 소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설마 크리스마스에 다른 사람하고 약속을 잡지는 않겠지?”
“예? 뭐라고 하셨습니까?”
조수석에 타고 있던 하킴이 몸을 뒤로 돌리면서 묻자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중얼거렸던 혁권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한쪽 팔을 내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서울 시내로 들어가자 조금씩 막히는 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간 벤츠 승용차는 다행히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도착했다.
현관으로 들어서자 코트 형식으로 된 제복을 차려입은 도어맨이 얼른 다가와 차문을 열어줬다.
하킴을 대동하고 호텔 로비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10미터 높이의 커다란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였다.
평일 오후였지만 로비에는 꽤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힐끗 주위를 둘러본 혁권은 그대로 로비를 가로질러 한쪽에 위치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12층에 도착해서 내린 혁권은 붉은색 카펫이 바닥에 깔린 복도를 걸어 1211호 앞에 걸음을 멈췄다.
띵동. 띵동.
오른쪽 벽에 달린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안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 같더니 이내 객실 문이 열렸다.
“다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열고 나온 사내는 그도 안면이 있는 국정원 요원인 최기혁이었다.
최기혁을 지나쳐 객실 안으로 들어가자 심인성이 환하게 웃으면서 소파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어서 오시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심인성은 함께 있던 사람들을 소개해 줬다.
“미수 채권을 맡길 건설 업체 임원들이시오.”
그러자 호리호리한 체격에 금테 안경을 낀 중년 사내가 먼저 손을 내밀면서 말했다.
“동아건설 전무인 백팔성입니다.”
“김혁권입니다.”
“우신건설 김재영이외다.”
대형 건설 업체 임원들답게 둘 다 만만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젊은 걸 보고 약간 놀란 기색이었다.
인사를 나눈 네 사람은 다시 소파로 가서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우신 건설 김재영 전무가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면서 입을 열었다.
“상당히 젊은 것 같은데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상체를 반듯하게 세운 혁권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대꾸했다.
“그게 이번 일하고 무슨 상관이지요?”
“아. 오해는 하지 마시오. 회사에서도 그동안 아무리 노력해도 어려웠던 공사 미수금을 대신 받아 내 준다고 하니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오.”
겉으로는 사과를 했지만 김재영 전무의 얼굴에는 네깟 놈이 어떻게 미수금을 회수하겠느냐는 불신이 가득했다.
나란히 앉아 있는 백팔성 전무 역시 눈에 실망감이 어렸다.
거의 포기하고 있던 공사 미수금을 절반이라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나왔는데, 그들의 기준에서 새파랗게 젊은 놈이 나타났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런 속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혁권은 일부러 턱을 내밀면서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어떻게든 돈만 받아 주면 되는 거 아닙니까. 급한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니 못 믿겠다면 일을 맡기지 않으면 됩니다.”
“으음.”
“거, 말이 좀 심한 거 아니오.”
대번에 얼굴을 찌푸리면서 불편한 기색을 나타냈지만 혁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펴며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먼저 도발한 건 그쪽일 텐데요. 그리고 다시 이야기를 하지만 일을 맡겨 달라고 매달린 적이 없다는 걸 분명히 했으면 좋겠군요.”
“허어.”
“이거야…….”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지만 두 사람은 화를 내거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못했다.
혁권이 지적한 대로 당장 아쉬운 건 그가 아니라 거액의 공사 미수금을 가지고 있는 건설 업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규모가 있었기에 회사가 흔들린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부실 채권으로 처리가 되어 있는 리비아 공사 미수금을 절반이라도 회수한다면 회사에 큰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더불어서 회사 안에서 그들의 입지 또한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그랬기에 말과 달리 소파에 계속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 거였다.
잠시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자 흥미로운 얼굴로 대화를 지켜보던 심인성이 웃으면서 나섰다.
“큰돈이 걸려 있으니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쓰는 건 이해하지만 아무려면 저희가 아무나 데려왔겠습니까. 김 사장은 모함메드 석유부 장관과 알고 지낼 정도로 리비아 고위층에 상당한 끈이 있는 인물이니 믿고 일을 맡겨도 될 겁니다.”
“……!”
이야기를 들은 백팔성과 김재영 전무가 눈을 살짝 크게 뜨며 혁권을 쳐다봤다.
모함메드 석유부 장관이라면 샤라빌 대통령의 측근으로 트리폴리 정부 내에서도 상당한 실세였다.
특히나 원유 수출 업무를 담당하며 실질적인 재정을 책임지고 있었기에, 두 사람도 모함메드 석유부 장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거물과 친분이 있다고 하니 당장 혁권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
그걸 보며 어쩐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내세워서 호가호위狐假虎威를 하는 것 같아 떨떠름했지만 혁권은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김재영과 시선을 교환한 백팔성 전무는 작게 헛기침을 하곤 옆에 놔둔 가방에서 서류철을 하나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공사 미수금 회수를 맡긴다는 위임장이오.”
서류철을 앞으로 당겨 펼치자 변호사의 공증公證이 들어간 위임장이 여러 장 들어가 있었다.
모두 여섯 곳의 건설 업체가 미수금 회수를 위임했는데, 그중에 가장 물려 있는 액수가 큰 두 회사가 대표로 이 자리에 나온 거였다.
액수로만 34억 달러에 달했는데, 그가 따로 꼼수를 부려 확보한 태일건설의 미수 채권이 빠져 총금액이 조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엄청난 거액이었다.
물론 이걸 다 받아 낼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절반만 회수한다고 해도 한화로 1조 5천억 원이 넘었다.
꼼꼼하게 내용을 다 확인한 혁권이 머리를 끄덕이곤 손짓을 하자 뒤편에 서 있던 하킴이 서류철을 넘겨받아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걸 지켜본 백팔성 전무가 손가락으로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말했다.
“미수금을 정말 회수할 수 있겠소?”
그러자 혁권은 고개를 들며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일을 맡지도 않았겠지요.”
간결한 대답이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이 쓸데없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보다 더욱 믿음이 가도록 만들었다.
처음과 달리 신뢰감을 느낀 백팔성 전무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약속한 액수보다 조금 적더라도 상관없으니 꼭 미수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해 주시오.”
“나도 부탁드리겠소.”
“오래지 않아 좋은 소식을 듣게 될 겁니다.”
혁권은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있는 심인성한테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더 할 이야기가 없다면 이만 일어서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오.”
몸을 일으킨 혁권은 그대로 하킴과 함께 객실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자 김재영 전무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우. 이거 정말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위임장까지 써서 넘겨줬는데 이제 와서 후회를 하면 뭐하겠소? 그리고 어차피 손에 쥐고 있어 봤자 돈을 받아 낼 길이 없으니, 이렇게 한다고 해도 딱히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지 않소.”
백팔성의 말에 김재영 전무는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심인성 역시 혁권이 어떻게 미수금을 받아 낼 생각인지 궁금했지만, 이제 그의 손을 떠난 만큼 그냥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강남에 위치한 고급 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손주아가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자 바텐더가 종이 받침을 밑에 깔며 칵테일 한 잔을 그녀 앞에 내려놨다.
“안 시켰어요.”
“저기 계시는 손님분이 주문하신 겁니다.”
“…….”
바텐더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스탠드 반대편에 사내 한 명이 손주아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 나쁘지 않은 얼굴에 고급스러운 옷차림까지 다른 때 같았으면 못 이기는 척 호의(작업)를 받아들였겠지만,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됐어요.”
“예?”
“필요 없으니까 치우라고요.”
뾰족한 목소리에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던 바텐더는 이내 손주아의 눈치를 살피며 칵테일을 도로 가져갔다.
“아. 예. 죄송합니다.”
그걸 본 사내의 얼굴도 와락 일그러졌다.
“짜증 나게.”
오늘 정오 꽤 이름이 알려진 패션 브랜드인 울츠의 새 인터넷 화보가 뜬 걸 보고 손주아는 기겁했다.
그녀를 밀어내고 모델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바로 예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고 거슬리던 정소현이었기 때문이었다.
채나영처럼 자신보다 윗줄의 모델한테 자리를 빼앗겼다고 해도 화가 날 판에 후배가, 그것도 업신여기면서 틈날 때마다 괴롭히던 애에게 밀렸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걸 보고 다른 모델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거리며 입방아를 찧어 댈지 벌써부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몇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자신이 정소현 따위한테 밀릴 이유가 없었다.
“계집애. 분명 뒤에서 로비를 했을 거야. 흥. 온갖 고상한 척을 다 하더니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쳐.”
작게 혼잣말을 내뱉으며 손주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양복 차림의 사내가 가게로 들어와 주위를 둘러보더니 이내 손주아 옆으로 걸어와 빈자리에 앉았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일이 많아서 말이야.”
“아니에요.”
안면이 있는 듯 편하게 말을 하는 사내는 울츠의 홍보 과장이었다.
아직 겨울이었지만 계절을 앞서 나가는 것이 패션 업계였기에 봄 신상품 준비로 한창 바쁜 시기라는 걸 손주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얼굴을 좀처럼 펴지 못하는 건 그 속에 자신이 끼지 못하고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뭘 드릴까요?”
바텐더가 다가와서 묻자 사내는 몸을 뒤로 조금 기대면서 대답했다.
“스카치 더블로.”
“알겠습니다.”
테이블 아래에서 스카치위스키를 꺼낸 바텐더는 유리잔에 술을 가득 따라 주고는 자리를 피해 줬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사내는 손주아를 보며 말했다.
“그런데 급한 일이라는 것이 뭐야?”
그러자 손주아가 애써 화를 가라앉히면서 입을 열었다.
“이번 S/S 화보 모델이 왜 갑자기 교체된 거예요?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런 말이 없었잖아요!”
따지듯 묻는 말에 사내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렸다.
태도가 상당히 눈에 거슬렸지만 업무 외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은 사이였기에 그냥 넘겼다.
“이미 이야기했잖아,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화보 책임자가 과장님인데 그게 말이 돼요?”
좋게 만날 때는 몰랐는데 자꾸 들러붙으면서 귀찮게 굴자 사내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위에서 너무 식상하다고 모델을 교체하라는데 난들 별수 있겠어?”
“뭐라고요?”
식상이라는 말에 손주아가 발끈했지만 사내는 아예 작정한 듯 말을 이었다.
“솔직히 오래 했잖아. 내가 뒤를 봐줘서 그렇지,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 나왔다고.”
“…….”
“감싸 주려고 해도 분위기가 이런 걸 어쩌겠어? 좋은 기회가 있으면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사내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키고는 지갑에서 지폐를 몇 장 꺼내 유리잔 옆에 내려놨다.
“단물만 쏙 빼먹고 이제 날 버리겠다는 거예요!”
고개를 돌린 사내는 무심한 시선으로 손주아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너도 나한테 바라는 것이 있어서 그랬던 거잖아. 차라리 잘됐네. 우리 사이도 이쯤에서 정리를 하자고.”
그러고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가게를 나가 버렸고, 혼자 남겨진 손주아는 굴욕감에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