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33
33
이름과 위성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 있는 명함에 로스토프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금방 바로 했다.
“위층 상담실로 올라가시죠.”
두 사람은 로스토프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탔다.
5층에서 내려 안내된 상담실은 10평이 조금 넘을 것 같은 크기에 간단한 응접세트가 갖춰져 있었다.
푹신한 소파에 걸터앉자 여직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음료를 내려놓고 나갔다.
“화물기 임대를 원하신다고요?”
로스토프의 물음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혁권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네.”
“화물기라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생각해 두신 것이 있습니까?”
“An-26 정도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 컬Curl을 말씀하시는군요. 조금 낡았기는 하지만 좋은 비행기이지요. 어디 보자.”
가지고 온 서류철을 뒤적이며 운항 스케줄을 확인한 로스토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침 한 대 여유가 있군요. 임대는 얼마나 하실 생각이십니까?”
“닷새입니다.”
“그럼 30만 달러를 내셔야 됩니다. 물론 연료와 기타 부수적인 비용을 제외한 금액입니다.”
압둘라흐만에게 선금을 받아 자금에 여유가 있었던 혁권은 망설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계약을 하죠.”
나중에 깎아 줄 생각을 하고 살짝 비싸게 부른 금액인데 상대가 그대로 받아들이자 로스토프는 내심 횡재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행여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계약서를 내밀었다.
“여기 비어 있는 칸을 채워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혁권은 계약서와 함께 내밀어진 펜을 힐끗 쳐다볼 뿐, 손을 뻗진 않았다.
“대충 로스토프 씨가 알아서 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으음. 항공청에 보고해야 될 문서라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로마노프의 앞에 두툼한 돈뭉치가 툭 떨어졌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1년 동안 쉬지 않고 성실히 일해도 손에 쥘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액수에 로스노프의 눈이 홱 돌아갔다.
그는 마디가 불거진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굽혀 돈뭉치를 제 윗옷 주머니에 쑤셔 넣곤 헛기침을 터트렸다.
“크흠. 원래는 안 되지만 이번엔 특별히 편의를 봐 드리도록 하죠.”
“고맙습니다.”
로스토프는 계약서를 자기 쪽으로 당기고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비행기는 내일부터 언제든지 쓰실 수 있지만, 임차료는 출발하시기 전에 다 납부해 주셔야 됩니다.”
“그러지요.”
그 외에 자잘한 협의 사항 등을 마무리한 혁권은 로스노프와 악수를 나누고는 항공사를 떠났다.
이틀 뒤 혁권은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Sheremetyevo International Airport에 도착했다.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은 모스크바에 위치한 공항 중 세 번째 큰 규모를 자랑하며 국영 아에로플로트 항공사가 허브 공항으로 이용하는 곳이었다.
얼마 전 새로 증축한 커다란 현대식 공항 청사를 중심으로 여러 채의 부속 건물들이 주위에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서 아에로플로트 항공사가 소유한 격납고 한 곳으로 안내됐다.
“이 비행기입니다.”
차에서 내린 혁권은 항공사 직원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커다란 비행기를 바라봤다.
An-26 일명 컬이라고 불리는 쌍발 터보프롭 수송기로 구소련을 대표하는 비행기 중 하나였다.
유명한 안토노프 항공사에서 제작된 An-26은 최고 속도 435km/h에 항속거리는 2,660km나 되고 5톤이 넘는 화물을 적재할 수 있었다.
천사백 대가 넘는 기체가 제작돼 구소련과 동구권 국가에서 널리 운용될 정도로 성공적인 수송기였지만 원형 모델인 An-24가 1963년에 첫 비행을 실시했을 만큼 연식이 오래됐다.
격납고 안에 주기된 기체도 여기저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과연 하늘로 날아오를 수나 있을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런 혁권의 시선을 의식해서인지 항공사 직원은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보기에는 이래도 모스크바와 키예프 노선을 십수 년간 사고 한번 없이 운항했을 정도로 튼튼한 놈입니다.”
나름 변명이라고 한 말이었지만 10년 이상 된 노후 기종이라는 걸 스스로 밝힌 꼴이 됐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런 걸 다 감안하고 기체를 선택했기에 혁권은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괜히 무안해진 직원은 큰 소리로 격납고 한쪽에 있는 사내들을 불렀다.
“이봐, 다들 이리로 와 보게.”
그러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작업복을 입고 뭔가를 고치고 있던 사내들이 어슬렁거리며 가까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담배를 입에 문 금발 사내가 얼굴 가득 귀찮다는 기색을 드러내며 심드렁하게 묻자 직원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는 질책하듯 말했다.
“이반, 격납고 안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
“그럼 요청한 부품을 빨리 가져다주든지. 그러면 나도 이 빌어먹을 고물을 고친다고 벌벌 떨면서 여기에 처박혀 있지 않을 거 아냐!”
하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이반이라고 불린 사내가 삐딱한 태도를 보이자 직원은 입가를 실룩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바탕 잔소리를 쏟아 내고 싶었지만 손님이 있었기에 화를 애써 눌렀다.
“끄응.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그것보다 인사들 해. 앞으로 닷새간 자네 비행기를 임대하신 존슨 씨야.”
그때서야 이반은 옆에 서 있는 혁권을 쳐다봤다.
“다 낡아 빠진 비행기를 어떤 호구가 바가지를 쓰고 빌렸다고 하더니 당신이었군.”
“이반!”
당황한 얼굴로 버럭 고함을 내지른 직원은 이내 그의 눈치를 보면서 황급히 사과를 했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식은땀을 흘리며 연신 머리를 숙이는 직원과 달리 심드렁한 얼굴로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이반의 모습에 혁권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반갑소. 존슨이라고 하오.”
가죽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다.
“뭐 하고 있어!”
직원이 옆에서 재촉을 하자 이반은 마지못해 그와 악수를 했다.
“이반이오.”
“며칠 안 되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 서로 잘해 봅시다.”
“그럽시다.”
혁권은 고개를 돌려 직원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일 정오에 출발하려고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아. 그리고 방금 이반 씨가 말한 부품이 뭔지는 모르지만 제가 탑승하기 전까지 새로 교체를 해 놨으면 좋겠군요. 30만 달러나 내고 비행기를 빌렸는데 정비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직원이 당황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혁권은 정색을 하며 이야기를 했다.
“만약 조치를 해 놓지 않는다면 계약을 파기하고 그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겠습니다.”
단호한 어투에 직원은 기겁을 하며 얼른 대답했다.
“출발 전까지 아무 문제없이 정비를 끝내 놓도록 하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사실 이반한테 말한 것과 달리 필요한 부품은 공항 창고에 예비품이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운항을 하는 데 큰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었고 An-26기는 회사에서 보유한 비행기 가운데서도 가장 오래되고 기체 피로도가 심해 곧 폐기될 예정이었기에 일부러 부품을 내주지 않았던 거였다.
“좋습니다.”
혁권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삐뚜름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이반을 향해 살짝 턱을 까딱여 인사했다.
“그럼 내일 봅시다.”
이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혁권도 대답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는 듯 그대로 등을 돌려 떠났다.
뜻밖의 일을 떠안고 얼굴을 구기고 있던 직원이 그 뒤를 쫓아가자 이반의 곁에 있던 승무원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쳇. 우리한텐 바가지 긁는 마누라가 따로 없더니 저 사람 앞에선 꼼짝을 못하는 꼴 좀 보십시오. 동양 놈 주제에 제법 강단은 있어 보이네요.”
감탄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모를 말투로 중얼거리자 이반이 차갑게 내뱉었다.
“내일 비행하기 전에 정비나 확실히 해 놔.”
“예에.”
잠시 옆의 승무원을 향했던 시선이 다시 앞으로 향했다.
격납고 문 사이로 멀어져 가는 혁권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잇새 사이로 꼬나문 담배를 까딱이며 가늘게 코웃음을 쳤다.
“흥.”
다음 날.
정오가 되자 혁권은 미리 이야기한 대로 자말을 대동하고 다시 격납고로 왔다.
어제와 달리 임대한 An-26기는 격납고 밖으로 나와 주기장에 세워져 있었다.
“말씀하신 대로 문제가 있던 부품을 새것으로 교체하고 정비도 모두 끝마쳤습니다.”
교체 작업을 감독한다고 밤이라도 새웠는지 피곤한 얼굴로 직원이 이야기를 하자 혁권은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비행기 가까이로 걸어갔다.
그러자 발로 타이어를 차며 공기압을 점검하고 있던 이반이 그를 발견하고는 몸을 바로 했다.
“오셨소.”
비록 닷새뿐이라고 해도 명색이 고용인인데 상당히 불손한 태도에 자말이 한쪽 볼을 실룩였다.
하지만 혁권은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로 이반을 보며 말했다.
“출발 준비는 됐소?”
어제와 달리 파일럿 복장에 선글라스까지 낀 이반은 장갑을 낀 손으로 기체를 가볍게 두드리며 대답했다.
“덕분에 새 공기 압축기도 달게 됐으니 어디든 안전하게 데려다주겠소.”
그는 피식 웃으며 목적지를 알려 줬다.
“일단 바르샤바로 갑시다. 거기서 로마를 거쳐 리스본으로 갈 거요.”
“이거 오랜만에 마음껏 하늘을 날아 보겠구먼.”
예상했던 것보다 먼 장거리 비행에 이반은 부담스러워하기는커녕 하얀 이를 드러내며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잠시 뒤 혁권과 자말은 An-26기 안에 탑승해 있었다.
화물을 실어 나르는 수송기였기에 좁은 접이식 간이 의자에 앉아 있어야 했지만 어차피 퍼스트클래스 같은 안락함을 기대하지 않았기에 큰 불만은 없었다.
위이이잉.
엔진 소리가 시끄럽게 귀를 울리는 가운데 알란이라는 이름의 승무원이 가까이 다가와 큰 소리로 말했다.
“위험하니까, 안전고도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 안전벨트를 풀지 말고 자리에 앉아 있으십시오!”
혁권이 머리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알았다는 신호를 하자 알란은 후방 카고 도어가 제대로 닫혔는지 확인하고는 조종실로 들어갔다.
“준비가 다 됐습니다.”
“뒤에 있는 손님들은 어때?”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습니다.”
“큭큭큭.”
알란의 농담에 이반과 부조종사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출발해 볼까?”
그러자 부조종사가 무전기를 켜고 관제탑과 교신을 했다.
“여기는 아에로플로트 1578기 관제탑 응답하라.”
-1578기 말해라.
“이륙 허가를 요청한다.”
-1578기 2번 활주로가 비었다. 거길 이용하도록.
“라저.”
머리에 쓴 헤드세트로 교신 내용을 듣고 있던 이반은 곧장 조종간을 밀어 천천히 기체를 움직였다.
주기장을 가로질러 지정된 활주로에 기체를 세우자 관제탑의 지시가 다시 내려졌다.
-이륙해도 좋다.
“그럼 가 볼까.”
이윽고 An-26기는 빠르게 앞으로 내달리더니 힘차게 활주로를 박차면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귀마개를 하고 있었지만 커다란 엔진 소리에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혁권은 육중한 기체가 떠오르자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자신이 선택하기는 했지만 이런 낡은 기체가 제대로 떠오를 수나 있을지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런 우려를 불식시키듯 가뿐하게 이륙에 성공하자 혁권은 그때서야 마음을 완전히 놓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순항 고도까지 도달한 기체는 수평을 유지하며 바르샤바가 있는 서쪽으로 곧장 날아갔다.
바르샤바를 거쳐 로마에 도착한 일행은 급유와 휴식을 위해 하룻밤을 쉰 뒤 다음 날 다시 이탈리아를 떠났다.